[씨네21 리뷰]
[리뷰] '아임 유어 맨' 인류의 탁월함에 심취한 학자와 AI 로봇의 동거
2021-09-10
글 : 김소미

근미래의 베를린, 인간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이 상용화 단계를 앞두고 있다. 로봇 회사는 비혼, 비연애 상태인 사회 각계의 엘리트를 섭외해 휴머노이드와 3주간 동거한 뒤 감정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한다. 알마(마렌 에거트)는 페르가몬 박물관 소속의 고고학자로 연구비 마련을 위해 마지못해 실험에 참가한다. 헬레니즘 문화에 깃든 인류의 탁월함과 복잡성에 심취한 학자가 AI 로봇과 동거하는 이야기인 <아임 유어 맨>은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인간다움에 관한 소박한 성찰로 향해간다.

인간과 로봇의 동거라는 다소 전형적인 설정에서 <아임 유어 맨>이 새롭게 첨가한 변수는 알고리즘이다. 로봇 톰(댄 스티븐스)은 사전 조사를 통해 이미 알마의 취향에 맞게 섬세히 설계된 상태지만 알마와 직접 만나 교류를 하면 할수록 알고리즘이 최적화돼 더욱 완벽해진다. 톰은 운전하는 알마에게 운전석 시트를 좀더 높게 조정하라고 충고하는데, 그 순간 알마가 보인 잠깐의 머뭇거림만으로도 새로운 입력값이 도출된다. “안전 개선을 위한 충고에 혐오감을 보였음을 기록합니다.” 물론 이 또한 휴머노이드인 자신을 대상화하는 톰의 농담이다. 톰은 3주만 버티자는 명목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알마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 설계되었으므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 는 게 그의 지론. 대화의 달인이기도 한 톰은 동시에 은근한 여지도 흘릴 줄 안다. “하지만 제 알고리즘은 거듭된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통해 점점 개선될 겁니다.”

상실과 불신, 고독을 곱씹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갈망하는 도시인의 내면 풍경은 영화가 유독 사랑하는 배경지다. 깊은 우울과 냉담함을 입을 수도 있었던 세계는 <아임 유어 맨>에서 따뜻한 색채와 조도로 형상화됐다. 드라메디적(코미디 드라마적) 화법을 구사하는 영화가 실없는 웃음과 멜랑콜리 사이를 오가는 동안, 주인공 알마는 우아한 겉옷을 하나씩 벗으며 로봇 앞에서 점점 볼품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3년을 바쳐 몰두한 연구 주제가 실은 다른 연구팀이 이미 발표한 내용임을 알게 된 순간의 자괴감, 재혼과 임신 소식을 알려온 전남편에게 느끼는 박탈감 같은 감정이 알마를 거쳐 톰에게도 차곡차곡 입력된다. 주인공이 자신의 멍청하고 부끄러운 욕망, 두려움, 주저함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스크린이라는 벽은 조금씩 투명해지기 마련이다.

지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신경증도 알마 캐릭터를 흥미롭게 만든다.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 약한 비위, 중요하고 숭고한 가치에 대한 지나친 헌신은 알마를 분별력 있는 프로페셔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쉽게 불행해지는 부작용도 얻었다. 이런 인간형에겐 좋은 기억력도 때로는 삶을 질식시키는 질병이 된다. 지난 관계가 남긴 상처와 회의감을 품고 있는 알마는 그런 자신을 간파한 톰에 의지해 조금씩 기억의 선별 작업을 시도해나간다. 어떤 기억은 잘 묻어두고, 또 어떤 기억은 발굴해 아름답게 복원해야 한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희극적인 상황과 대사를 통해 자기 연민의 함정은 피해가면서 한 여성의 윤리적 사유와 개인적 성찰, 그리고 결단을 조화롭게 그려냈다. 늘 약간 찌푸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알마의 미간과 입꼬리에 미묘한 감정을 담아낸 배우 마렌 에거트의 연기 또한 무척이나 근사하다. 관객이 <아임 유어 맨>에 정서적인 친밀도를 갖게 하는 결정적 미장센인 배우 마렌 에거트는 이 작품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최고연기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이 파격적으로 남녀 연기상을 통합하기로 결정한 이후 첫 수상자다.

<다운튼 애비> <미녀와 야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파이어 사가 스토리>로 알려진 영국 배우 댄 스티븐스가 휴머노이드 톰을 연기했다.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뽐낸 댄 스티븐스는 이국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알마의 취향을 고려해 어색한 영국 악센트를 쓰는 독일 로봇을 사랑스럽게 조형했다. 감독인 마리아 슈레이더는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파니 핑크>(1994) 속 파니로 한국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바로 그 배우다. 시나리오작가와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그는 넷플릭스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2020), <아임 유어 맨>으로 연이어 호평받으며 연출자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CHECK POINT

<그녀>와 무엇이 다른가

<그녀>의 인공지능 운영체제(OS) 사만다는 말 그대로 OS라는 한계가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하지만 <아임 유어 맨>의 휴머노이드 톰은 외관상으로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AI 판타지의 끝까지 나아간 존재다. 알마가 톰을 처음 만나는 장소인 나이트클럽은 100% 홀로그램으로 꾸며진 곳인데,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마구 휘저어보던 알마에게 유일하게 물리적 실체로 감지되는 인물이 톰이다.

멜랑콜리 사운드

덴마크 그룹 Bremer/McCoy의 인스트루멘털 뮤직이 알마가 보내는 고독의 밤을 부드럽게 채운다. 도심과 자연, 현대와 역사가 유려하게 공존하는 베를린의 도시 경관과 어우러지는 멜랑콜리한 사운드를 잊기 힘든 영화다. <Drommer> <Aben bog>를 추천한다.

혹시 당신도?

<토니 에드만>의 스타 잔드라 휠러가 휴머노이드 로봇 회사에서 파견된 알마의 담당 상담사로 등장해 또 한번 뛰어난 코미디 자질을 선보인다. 가뜩이나 휴머노이드를 믿지 않는 알마는 매뉴얼대로만 응대하는 것 같은 담당 직원에게도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의심이 뒤늦게 찾아온다. 혹시 저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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