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은 있지만 기차는 서지 않는 마을이 있다. 철로를 따라 다른 역으로 걸어가는 것이 마을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위험한 순간이 반복되자 어린 준경(박정민)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준경은 ‘마을에 제대로 된 기차역을 세워달라’는 54통의 편지를 보낸다. 이장훈 감독의 신작 <기적>은 1988년 대한민국 최초로 세워진 민자역 ‘양원역’을 모티브로, 기차역이 지어지길 염원하는 준경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창조했다. 영화는 기차역을 중심으로 준경과 그를 돕는 친구 라희(임윤아), 누나 보경(이수경), 아버지 태윤(이성민)의 관계를 차근히 쌓아간다.
영화는 준경에게 기차역 개설과 천문학 공부, 두개의 꿈이 있음을 강조한다. 천문학에 대한 준경의 애정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별을 동경하면서도 준경이 기차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갈등하는 준경의 태도를 주의 깊게 다루면서, 관객 역시 준경을 따라 자연스레 기차역에 집중하게 만드는 전략을 취한다. 레트로가 유행인 오늘날, 극중 배경인 1980년대는 꽤 흥미로운 소재였을 것이다. 하나 영화는 이를 단순히 스타일리시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복고풍의 의상만큼이나 카세트테이프, 비디오, 가구, 학용품 등 눈에 띄지 않는 소품까지 각별히 신경 쓰며 관객을 1980년대로 불러들인다. 낯선 봉화 사투리도 인물들에게 현실감을 더하는 장치가 된다.
주연을 맡은 박정민과 임윤아, 이수경은 이미 익숙한 배우들임에도 <기적>에서 새로운 얼굴을 내보인다. 각자 맡은 인물에 레이어를 더해 한끗 다른 인물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가령 박정민은 <시동>의 택일에 이어 다시 한번 10대를 연기하는데, 날것에 가까운 택일의 분위기와 달리 훨씬 차분하고 무겁게 준경의 에너지를 가져간다. 간혹 엉뚱하게 굴긴 하나 기차역 개설에 관한 책임감, 꿈에 대한 열정, 남다른 천재성에 방점을 찍으며 준경을 보다 단단한 사람으로 만든다. 임윤아도 마찬가지다. 영화 <엑시트>, 드라마 <허쉬>를 거치며 자기 주도적인 이미지를 굳힌 임윤아는 <기적>에서 처음으로 10대의 명랑함을 내보인다.
영화 말미, 현재 양원역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친다.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던 1980년대 그때 그 사람들의 현재는 어떨지 영화 밖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막연한 기적을 기대하는 대신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이야기. 양원역에서 시작된 이장훈 감독의 상상은 <기적>이라는 영화로 확장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