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과 가상현실(VR)이 만난다. 감독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시나리오, 어쩌면 데뷔작이 됐을지 모를 <아버지가 사라졌다>라는 영화를 VR로 구현해보는 프로젝트다. 이명세 감독이 직접 출연해 작품 전반을 소개하고 특정 장면은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마치 영화 세트장 한복판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싱픽쳐스>는 세계가 주목하는 해외 합작 프로젝트로 차이밍량, 아벨 페라라 감독 등 세계적인 감독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시리즈 프로젝트다. 수십대의 카메라와 거대한 서버로 가득한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이뤄지던 8월의 어느 날, 이명세 감독을 찾아가 VR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싱픽쳐스>의 프로젝트 전개 상황과 볼류메트릭 캡처라는 독특한 촬영 기술에 관한 소개도 함께 덧붙인다. 한국영화의 비주얼리스트가 품고 있던 영화라는 꿈이 VR과 만난 현장이다.
이명세 감독에게는 못다 이룬 꿈이 있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헌신하다 사라져버린 아버지에 관한 영화, <아버지가 사라졌다>로 데뷔작을 찍겠다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안성기, 황신혜 주연의 <개그맨>으로 데뷔했고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못했다. 시도는 여러 차례 했으나 번번이 투자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명세 감독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이 미완의 작품에 관해 그의 지인인 박평식 평론가는 언젠가 <씨네21>의 지면을 빌려 이렇게 소개한 적 있다. “요즘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중략) 이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부성이 사라진 시대에 진정한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겠다며 이 감독은 내게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 알도 오노라티의 <아버님 전상서>(Lettera al Padre)를 소개했지요.”
VR과 드라마 장르의 만남
한국영화의 스타일리스트 혹은 비주얼리스트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이명세 감독의 작품 세계와 VR의 조합이라니, 한껏 기대되는 동시에 궁금증도 생긴다. 액션이나 누아르처럼 장르가 두드러지는 소재가 아니라 아버지에 관한 드라마를 VR로 구현해보겠다니 과연 적절한 조합인가 싶다. 돌이켜보면 이명세 감독은 어떤 소재나 장르를 다루더라도 카메라에 담긴 시공간과 인물의 감정을 감각적으로 비트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프랑스의 VR 제작 스튜디오 아틀라스파이브와 한국의 기어이 스튜디오가 공동 제작하는 프로젝트 ‘<미싱픽쳐스: 아버지가 사라졌다> 이명세 감독편’은 감독이 구상했던 실사영화 시나리오 전체를 일종의 VR 영화 형태로 구현하는 작업은 아니다. 감독이 직접 등장해 영화의 컨셉과 연출상의 특징 등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꾸며진다. VR 헤드셋을 쓴 사용자 혹은 관객은 이명세 감독의 실물과 똑같은 형상 옆에 서거나 그의 주변을 맴돌 수 있다. 감독이 소개하는 영화 장면이 시시각각 펼쳐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 속 가상의 세트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목에서도 예상했듯 <미싱픽쳐스>는 이명세 감독뿐만 아니라 전세계 영화감독들이 못다 이룬 영화를 VR의 형태로 구현해보는 시리즈 프로젝트다. 감독들이 직접 등장해 자신들이 만들고 싶었던 꿈의 비전을 직접 소개하고, 비주얼, 스토리, 프로덕션 전반에 대해 VR로 재현한다. 이명세 감독 이전에 차이밍량, 아벨 페라라 감독이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작품을 완성했고 이명세 감독의 뒤를 이어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작품을 만들 예정이다. 전체 6개 프로젝트로 꾸려졌으며 다른 2명의 감독도 곧 발표될 예정이다.
지난 8월 25일, 서울 상암에 위치한 ‘K-실감 스튜디오’에서는 이명세 감독이 직접 <미싱픽쳐스: 아버지가 사라졌다>에 등장하는 장면의 촬영이 이뤄졌다. 해외 합작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전파진흥협회에서 추진하는 ‘21년도 5G 전략시장 공동제작 지원사업’,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의 스튜디오 무상 제공 지원을 받은 정부지원프로젝트인 만큼 98억여원이 투입되어 60대의 4K 카메라 동시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를 쓸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 프로젝트는 전체 기획 단계에서부터 볼류메트릭 캡처라는 촬영 기술로 감독을 촬영하고 그가 직접 작품 안에 등장한다는 형식적인 전제 조건을 갖고 있어서 반드시 이 스튜디오에서 일부 장면을 촬영해야 했다. 일반적인 2D 기반의 실사 촬영과 달리 많은 카메라, 그리고 입력 데이터를 렌더링하고 최종 결과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고속 디스크와 네트워크 등이 구성된 스튜디오에서 반드시 촬영이 이뤄져야 한다.
이명세 감독이 60대의 카메라에 둘러싸여 촬영한 장면은 땅에 놓인 종이비행기를 주워 들고서 그가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직접 소개하는 장면이다. “오늘 촬영 때문에 모자도 새로 샀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명세 감독의 표정은 다소 들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뷰파인더를 목에 걸고 온 것에서부터 그 설렘이 느껴졌다. 하지만 덕분에 모든 입체 테스트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60대의 4K 카메라로 촬영한 소스를 바탕으로 시차를 만들어내고 그 시차에 의해 입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내는 촬영 원리이기 때문에,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의 형체, 즉 옷과 모자, 신발끈 등의 요소가 사전에 고려되어야 한다. 스탭들의 임기응변으로 뷰파인더를 갖고 촬영할 수 있었던 이명세 감독은 사소한 손동작과 동선, 발걸음의 보폭까지도 계산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입체 촬영에 당황해하며 몇번의 엔지를 냈다.
이명세 감독이 직접 등장한다고?
<미싱픽쳐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이명세 감독이 직접 등장해 영화를 소개하는 볼류메트릭 캡처 촬영 장면 외에 언리얼 엔진을 통한 실시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 그 안에는 영화에 담고 싶었던 미장센이나 소품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해보일 예정이다. 예를 들면 <첫사랑>에 등장하는 집과 종이비행기,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계단, <M>의 골목 등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보여줬던 이명세 스타일의 공간과 소품을 활용해서 아버지와 관련된 많은 공감각적 요소를 구현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올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돌입한 <미싱픽쳐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작품과 함께 올 연말쯤 제작을 마무리할 예정이며, 내년 초 세계 영화제 등에서의 공개가 목표이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어떤 시나리오?
1960년대를 배경으로 문산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아버지 영호가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다. 체통을 중시하는 멋쟁이 신사지만 형광등 하나도 제대로 갈아 끼울 줄 모르는 어설픈 남자 영호는 양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어렵게 가족들을 먹여살린다. 그는 가족들과 나들이 가서 아내 몰래 사이다병에 소주를 따라 마시고 그걸 또 들키는 그런 남자다. 게다가 과하다 싶을 만큼 오지랖이 넓어 자신의 가족은 굶더라도 길에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절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대책 없는 삶의 태도를 늘 질타한다. 하지만 그는 한때 별명이 황소라 불릴 만큼 힘이 장사이며, 햄버그스테이크를 끝내주게 잘 만들고, 아이들 이름을 내건 통닭집을 차릴 꿈을 갖고 있다. 어린 영민과 영수 형제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일상을 차분하게 서술하듯 보여주는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그날의 어떤 소동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빈자리를 기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