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오징어 게임' 기훈 역 이정재, "판타지로의 빠른 몰입이 관건이었다"
2021-09-28
글 : 이주현
사진제공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배우 이정재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관상> <암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2010년대에 그가 보여준 강렬한 에너지의 영화적 캐릭터들과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영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드라마 <느낌> <모래시계> 등 1990년대부터 이정재를 지켜봐온 팬들에게도 <오징어 게임>은 낯설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가 연기하는 성기훈은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는 인물이다. 성기훈의 사연에 마음을 열게 만드는 이정재의 노련하고도 본능적인 연기는 <오징어 게임>의 아이러니에 힘을 싣는다. 유연한 연기법에 관해 이정재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한때 일본과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서바이벌 게임물은 한국에선 생소한 장르다. 돈 때문에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적인 상황, 한국적인 정서와 잘 맞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나.

=목숨을 건 서바이벌 콘텐츠들이 기존에 꽤 있었는데, 그것들과 <오징어 게임>은 차이점이 있다고 느꼈다. 서바이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을 이렇게 면밀하게, 설득력 있게 그린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으로 시작하지만 인물들의 애환을 잘 드러내면서 그들의 사연을 깊게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 그런 점이 여타 서바이벌 액션 장르물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또 황동혁 감독의 영화를 모두 재밌게 봤기 때문에 언젠가 감독님과 꼭 한번 같이 작품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제안이 와서 너무 반가웠다.

-<마이 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 <오징어 게임>까지 황동혁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겹치는 장르가 없다.

=매번 새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해온 감독이다. <오징어 게임>은 지금까지 황동혁 감독이 했던 작품들을 총망라한 게 아닌가 싶다. <마이 파더>처럼 개인 대 개인의 감정을 터치하는 부분도 있고, <도가니>같이 섬뜩하고 날카로운 이야기와 장르 연출도 있고, <수상한 그녀> 같은 재밌고 유쾌한 부분도 있고, <남한산성>처럼 깊은 주제의식을 담은 부분도 있고. <오징어 게임>이라는 하나의 그릇 안에서 자신의 장기를 다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와 욕심이 보였다.

-성기훈 캐릭터는 정리해고, 사업 실패, 이혼, 도박, 사채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생계 문제가 절박한 소시민 캐릭터를 연기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다보니 주로 극의 분위기를 무겁게 조성하거나 압박하는 강렬한 영화적 캐릭터들이 주로 들어오더라. <오징어 게임>의 기훈처럼 실생활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역할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낯설어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봐주실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성기훈은 초중반까지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게임을 거듭할수록 자기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에 절박함을 깨닫는 캐릭터라, 캐릭터가 변화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설계해야 했다. 그런 다음엔 감독님을 믿고 따라갔다.

-배우 이정재가 가진 세련되고 깔끔한 이미지, 차갑고 뜨거운 카리스마가 있다. 더군다나 최근작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잔인한 킬러 레이였고. <오징어 게임>에선 기존의 이미지를 지우는 작업이 필요했을 텐데, 후줄근한 소시민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나갔나.

=어릴 땐 그렇게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가난을 이겨나가야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을 최대한 끌어다 활용하려 했다. 황동혁 감독님도 비슷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기훈처럼 쌍문동에서 사셨고. 감독님이 효자인 게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까지 가셨다. (웃음) 본인의 기억과 주변에서 보고 들은 모습들을 참고해 성기훈이란 인물을 만드신 것 같고, 감독님과 과거의 개인적 기억들을 나누면서 ‘맞아, 나도 그때 저랬었는데’ 하며 캐릭터 작업을 했다.

-기훈은 어떤 외형의 인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작품이 많아질수록 ‘그때와 비슷한 거 아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매번 다른 모습, 다른 캐릭터를 보여드리려 노력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이번에도 최대한 이정재가 아닌 성기훈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감독님이 생각한 성기훈의 모습은 잠잘 때 입는 옷과 밖에 나갈 때 입는 옷에 큰 차별성이 없는, 잠잘 때 머리랑 외출할 때 머리가 별 차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웃음)

사진제공 넷플릭스

-특유의 눈웃음이 <오징어 게임>에선 유독 짠해 보일 때가 많았다. 오랜 기간 서서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중년 남자의 웃픈 얼굴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는지.

=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동작이나 표정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 연기를 오래할수록 집중해야 할 건 캐릭터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표정 생각하고 몸동작 생각하면 정작 감정에 집중을 못할 수도 있어서 이제는 눈꼬리가 요만큼 처졌는지 이만큼 처졌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캐릭터에 집중하면 표정과 동작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결국 캐릭터와 감독을 믿고 따라가는 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같은 경우는 스타일이 꽤 중요한 작품이라 판단돼서 신경을 많이 썼지만, 보통 캐릭터 스타일링에는 개인적인 의사를 많이 반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상상력이 무한할 수 없다. 작품이 달라지면 스탭도 달라진다. 달라진 스탭들이 내는 아이디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돌입하기 전인 초반 1, 2화에선 기훈의 개인사가 드라마의 주축이 된다. 저마다의 사연과 동기는 다르지만 왜 이 사람들이 목숨 걸고 게임에 참여하는지 기훈이 초반에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게임 자체가 황당무계하다. 이런 게 영화적인 설정이고. 결국 판타지를 얼마나 믿게끔 하느냐, 얼마나 빨리 몰입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초반부는 그래서 늘 중요하다. 기훈의 가정사라든가, 저런 애라면 저런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성격적인 면들을 쌓아가면서 시청자들이 ‘어, 내가 언제부터 믿기 시작했지?’ 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은 가상적인 공간과 가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라 초반부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멀티 캐스팅 작품이고 조·단역도 많이 투입된 현장이었다. 주연배우로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나.

=책임감, 부담감은 시나리오를 읽고 결정할 때 제일 크게 느낀다. 그다음엔 촬영 전 준비할 때. 막상 촬영할 땐 부담감이나 책임감을 못 느낀다. 오늘 이 신을 찍어야만 하는 연기자로서는 그 감정에 몰입해야 하니까 다른 생각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촬영장에서 나는 대체로 말이 없다. 동료들끼리 개인적인 이야기 같은 것도 못 나눈다. 연기에 집중하느라 잠깐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배우도 많다. 전환이 빨리빨리 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이번 작품에서의 부담감은 시청자들이 새로운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거였고,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해내야만 하는 몫에만 신경 썼다. 촬영할 때는 촬영에만 집중하고. 그래도 이번 작품은 동료 연기자들이 다들 성격이 밝아서 즐겁게 촬영했다. 동료들이 먼저 말도 걸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더라. (웃음)

-<오징어 게임> 촬영을 마치고 감독 데뷔작인 <헌트>를 찍었다. 연출과 주연을 맡은 <헌트> 촬영은 잘 마무리되어가고 있나.

=연출이 처음이라 많이 힘들다. 그만큼 재미도 크지만. 촬영은 80% 정도 진행했다. 스파이물이라 이야기가 촘촘해서 어렵지 않게 잘 찍어야 하는데, 새로운 걸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촬영의 난이도가 꽤 높은 작업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스탭들이 나보다 더 욕심을 내고 있다. (웃음) 당분간은 <헌트>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