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르는 눈물, 사람들이 몇입 먹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식사, 두어 모금으로 다 타고 마는 담배, 빠른 동작으로 완벽하게 써내려가는 노트…. 미국 영화평론가 마니 파버는 매끈하고 완벽한 영화 속 세계를 미니어처와 같다고 공격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영화 속 세상보다 훨씬 거칠고, 진행이 더디며, 예상하지 못한 여러 사건으로 가득하다. 파버가 비판한 ‘미니어처 영화’와 완벽히 대조되는 영화가 있다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자주 머뭇거리고,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오해를 쌓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단어를 고쳐 잡는 과정을 거친다. 주인공은 어떤 결심을 하고도 불쑥 찾아온 상념에 빠지기 일쑤이고, 때론 실수도 저지르며, 대화 중 빙빙 둘러 말하다가도 타인의 내심을 콕 짚어 말하는 뾰족한 구석도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관객은 기존 영화와는 다른 독특한 리듬에 당황스러움과 낯섦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삶의 리듬을 닮은 영화에 몸을 맡기면 작지만 귀한 성찰의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왕년의 여배우 상옥(이혜영)의 24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상옥이 여동생 정옥(조윤희)의 아파트 소파에 앉아 메모를 끼적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문을 연 영화는, 상옥이 여동생과 아침식사를 하고, 조카의 떡볶이 가게, 그녀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영화감독과 만나기로 약속한 술집을 방문하고 다음날 소파에서 눈을 뜨는 뼈대를 세운다. 상옥에 대한 정보는 느리고 모호하게 제시되는데, 그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그곳에서 술집(bar)이 아닌 주류 판매점(liquor shop)을 운영한 것으로 밝혀진다. 상옥은 여동생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한국에 있는 조카 승원(신석호)을 그리워할 만큼 가족에게 애틋함을 지니고 있어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여다보고 싶게 한다.
홍상수 감독은 상옥의 모든 행동의 원인을 모호하게 둔 채 관객이 상상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는 플래시백 없이 상옥의 현재만을 보여주는 화법으로 텅 비었던 상옥의 과거를 채우는 장기를 발휘한다. 상옥은 서울과 그 근교를 배회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홍상수 감독의 전매특허인 술자리 신 역시 등장한다. 초록빛 소주병 대신 중국 독주가 담긴 희고 투명한 병이 탁자 위를 채운다. 애초 영화감독 재원(권해효)이 상옥과 만나 차를 마시려고 했던 자리는, 끼니를 먹지 못하고 나온 상옥을 위해 중국 음식을 시켜서 먹는 조촐한 식사 자리로 바뀌고, 동석한 조연출의 제안으로 중국 독주를 곁들인 술자리로 재차 바뀐다. 머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낳은 예상 밖의 술자리는 상옥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특권적인 순간으로 솟아오르고,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보면 된다”라는 담백한 상옥의 대사가 곁들여지면서 기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최근작 <인트로덕션> <강변호텔> <풀잎들>에서 흑백의 세계를 택했던 홍상수 감독은 <당신얼굴 앞에서>에서는 다채로운 색감을 이용한다. 상옥의 붉은 잠옷과 연분홍 블라우스, 녹음이 우거진 공원은 차갑고 건조한 겨울을 배경으로 했던 앞선 영화들과는 다른 무드를 만들어낸다. 홍상수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춘 이혜영 배우는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도 관객의 주의를 잡아끄는 호연을 보여주며, 권해효와 조윤희 배우 역시 상옥의 하루에 조화롭게 녹아든다. <당신얼굴 앞에서>가 최근 홍상수 감독이 보여주고 있는 담백한 세계에서 한뼘 더 나아갔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 뒤떨어지지 않는, 흡족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장편영화로 제74회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받았다. 홍상수 감독의 칸 진출은 이번이 11번째로, 저명한 감독들의 신작을 소개하기 위해 신설된 칸 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되었다. 또한 제 26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부문에 초청받았다.
CHECK POINT
이혜영의 첫 홍상수 월드 나들이
영화, 뮤지컬, 연극, 드라마계에서 40년 넘게 활동한 이혜영 배우가 <당신얼굴 앞에서>로 처음 홍상수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더 게임> 이후 이혜영 배우의 13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그는 <만추> <쇠사슬을 끊어 라> 등을 만든 ‘천재 감독’ 고 이만희 감독의 딸이기도 하다.
제작실장 김민희
<인트로덕션>에서 배우이자 스크립터, 제작 조수 역할을 했던 김민희 배우가 <당신얼굴 앞에서>에서는 제작실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당신얼굴 앞에서>에 출연은 하지 않고 제작실장 업무만 맡았다. 제작실장은 흔히 제작자와 스탭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수행한다.
홍상수 월드에 새겨진 부동산 이슈
요즘 사람들은 모이면 모두 부동산 이야기를 한다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아파트값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아침 식사 신에서 여동생 정옥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서 자신이 얻은 혜택에 대해 은근히 자랑한다. 정옥은 언니에게도 아파트를 마련하라고 종용하는데, 목돈이 없는 상옥으로서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난감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