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제작 남아진흥주식회사 / 감독 유현목 / 상영시간 114분 / 제작연도 1979년
유현목은 1956년 개봉한 <교차로>로 감독 데뷔하여 1994년 <말미잘>까지 40여년간 모두 43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39번째 연출작인 <장마>는 그의 후기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973년 발표한 윤흥길의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분례기>(1971, 방영웅 원작), <불꽃>(1975, 선우휘 원작) 등 1970년대에도 그는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를 연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원래 과작 감독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는 문예영화를 만들 수 있는 우수영화 제도가 부침을 겪었던 탓에 꾸준한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분례기> 이후 장편 연출이 힘들게 되자 유프로덕션을 설립해 문화영화를 만들며 아마추어 영화인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필모그래피의 연속성으로 보면 1981년에 개봉한 <사람의 아들>이 실질적인 작품 활동의 마지막이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상한 갈대>(1984)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했고,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 대학에 재직하다 연출에 복귀한 <말미잘>이 마지막 개봉작이었다.
지루한 장마 속 사람들의 비극
영화는 장마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삼킬 듯 몰아치는 황토물과 억수 같은 빗줄기를 잡던 카메라는 한 기와집의 주변을 관찰하다 집 안으로 들어간다. 한 노년 여성의 입으로 불덩이가 들어오고 이가 빠지는데, 이 집에 사는 외할머니(황정순)의 악몽이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무슨 놈의 장마가 이렇게 기냐며 방을 나서 딸(선우용녀)과 손자 동만을 찾는다. 겹겹의 프레임이 존재하는 한옥 공간 속에 놓인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데, 영화 내내 감독은 정교한 공간 구도와 인물 배치를 결합시키며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그녀가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안채에 사는 동만의 친할머니(김신재)가 다들 논둑이 무너져 나간 것 같다며 말을 건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각각 자리한 사랑채와 안채의 공간적 거리감과 구도의 뉘앙스로 이후 둘의 관계 변화를 예감케 한다.
엄마와 이모를 찾으러 나선 동만은 동네 친구 옥이와 마주치고, 움막에서 옥이는 동만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한다. 어린아이 동만의 성적인 행동은 이후에도 등장하는데, 처절한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가족을 잃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전투의 섬광을 보며 수박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천둥 소리 같은 포와 총소리에 동만이 놀라자 옥이는 어젯밤 봉우리마다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천진한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동만의 친삼촌 순철(이대근)이 빨치산이 되어 건지산에 들어가 있음이 드러난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다 모인 자리에서 꿈 얘기를 하며 아들 길준(강석우)에게 나쁜 일이 있을 거라 말한다. 가족들은 장마 탓이라며 나무라지만 그들 역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 호롱불이 꺼지는데 그녀는 아들의 혼령이 찾아왔다고 믿는 듯하다. 마을 구장과 국군이 찾아와 길준의 전사 소식을 알린다. 누나인 동만 어미는 울부짖지만, 외할머니는 자기 꿈이 맞았다며 “내사 뭐 암시랑도 않다”라며 슬픔을 감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큰 울림을 준다.
가족들의 슬픔이 계속되는 가운데 동만이 서울의 대학에 다니며 축구 선수까지 하던 외삼촌 길준을 떠올리며 플래시백이 작동한다. 6•25전쟁이 터져 한강을 건넌 외할머니 가족이 딸의 시집으로 피난 와 사돈이 같이 살게 된다. 결국 이 마을에도 인민군이 들어오자 길준은 가족들의 제안으로 집 근처 대밭의 움막으로 숨고, 우직한 성향의 친삼촌 순철은 빨간 완장을 차고 인민군의 수하가 되어 악행을 저지른다. 마을에 다시 국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건지산으로 숨어들게 되면서 부역자 순철도 빨치산으로 합류한다. 그간 길준이 숨어 있었음이 드러나 순철은 양민들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서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선을 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소설의 설정과 같이 동만의 시선으로 기록된다.
국군 소대장으로 입대해 전선으로 떠나는 길준을 지켜보던 동만의 숏이 현재의 모습과 섞이며 이제 플래시포워드가 작동한다. 또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고 천둥 번개가 친다. 외할머니는 하늘을 향해 숨어 있는 빨갱이 놈들을 다 쓸어내라며 손을 모으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역정을 내는 친할머니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간 것도 죄라며 우리 아들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 말한다. 결국 외할머니는 해서는 안될 “이런 빨갱이 집”이라고 내뱉고 본인조차 놀란다. 이때 음악이 끊기고 각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숏의 연쇄는 숨을 멈추게 만든다. 특히 이 순간 황정순의 연기는 그녀가 대배우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전쟁은 군인들이 죽어간 전선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또 한 가족 속으로 들어와 서로의 몸과 마음을 상처 내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샤머니즘적 순간
인트로에서 본 장독대에 장맛비가 내리는 숏이 반복되며 영화는 후반부를 시작한다. 산에서 잠시 내려온 순철에게 가족들은 자수를 권하고 그 역시 동요하지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도망가버린다. 동만은 찾아온 형사에게 삼촌 얘기를 했다가 아버지 순구(김석훈)가 잡혀가 고초를 겪게 만들고 친할머니의 미움을 받게 된다. 빨치산이 읍내를 공격하러 내려왔다가 거의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순구는 급히 읍내로 가지만 순철의 시체를 찾지는 못한다. 친할머니와 고모는 마을 점쟁이를 찾아가 순철이 돌아올 날을 받고, 그녀는 아들을 위해 음식을 잔뜩 장만한다. 그날 밤 비가 멈추고 또 범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 대나무 밭과 호롱불이 흔들린다. 외할머니는 구렁이 우는 소리가 들 린다며 순철의 죽음을 직감한다. 그녀는 잠결에 동만에게 그날 밤 인기척의 주인공은 자기였다며 고백한다.
다음날 잔치가 끝날 때까지 순철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이 집으로 돌아간 후 큰 구렁이가 대문으로 들어온다.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해치려는 아이들을 내쫓고 동네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마치 구렁이가 순철이라는 듯 말을 건넨다. 집안 걱정하지 말고 갈 길 잘 가라며 친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한줌 받아와 태우고 모친이 마련한 음식을 눈요기라도 하라며 소반을 내어준다. 신기하게도 구렁이는 나무에서 내려와 집밖으로 나간다. 가족들은 순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친할머니는 험한 일을 치러준 외할머니와 화해한다. 또 삼촌의 행방을 얘기했던 손자를 용서하고, 동만은 없어졌던 은비녀를 슬쩍 친할머니의 머리맡에 올려둔다. 동만은 자유롭게 뛰놀 수 있지만, 언제든 외삼촌과 친삼촌을 잃은 기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