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은의 차분한 목소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도 톤을 높아지지 않는다. 갓 스물이 넘은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데는 그 목소리가 한몫했다는데, 정말 그렇다. 고요히 머리 숙인 갈대밭 같은, 연갈색톤의 목소리다. 그리고 가끔 고개를 돌릴 때면, 배우 심은하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실제로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서울의 달’을 가슴에 품었던 부산 소녀의 상경기 1막1장. 임정은은 81년 부산에서 나서,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부산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도 서울에서 다니고 싶었고, 서울 사람들 쓰는 표준말 쓰고 싶어 혼자서 거울보고 연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꿈은 그냥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때도 예정된 미래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1 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홀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몰래 모델콘테스트대회에 응모한 적이 있었다. 나갔다가 떨어지면 창피해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 하는 생각에 몰래몰래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붙이던 소녀는, 꿈을 꾸었다. 내일은 어쩌면 연기자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막상 콘테스트에서 입상했지만, 학생 신분으로 활동해선 안 된다는 학교의 방침 때문에 당분간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TV에 나왔음 좋겠다’는 막연하던 꿈은 나이가 들면서 연기자의 꿈은 ‘내가 아닌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유, 연기자는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매력적’이라는 구체적인 이유로 완성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단호하게 서울행을 결심했다.
오늘, 꿈은 현실이 되었다. 무작정 상경한 부산 소녀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영화와 조우했다. 얼마 전 개봉한, 21억여원이 든 돈가방을 우연히 손에 넣은 고삐리 삼인방의 해프닝을 그린 영화 <일단 뛰어>에서 임정은은 인터넷방송국을 운영하는 고교생 진원과 우정을 나누는 소녀 유진으로 스크린을 똑똑, 두드렸다. 연기의 세계를 향한 문이 스르르 열렸고, 그녀는 조심스레 한발을 들여놓았다. 유진은 FBI가 되고 싶어하는 착하고 예쁜, 그리고 엉뚱하기도 한 소녀. 조의석 감독이 임정은에게 주문한 첫 숙제인 인물분석을 위해 A4 용지를 메우며 ‘나의 첫 캐릭터’ 유진과 만났다. ‘유진’이 된 첫날은, “즐거웠어요”. 카메라 앞에 처음 섰을 때의 설렘과 긴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다고 하지만, 반짝이는 눈은 그렇지 않다고 그때의 가슴떨림을 항변한다.
“네가 이런 일을 할 줄 몰랐어.”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임정은은 카메라도, 인터뷰도, 모든 것이 낯선 시간 속을 침착하게 통과하고 있다. 광기에 찬 열정적인 캐릭터보다는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톤의 연기, 자신의 본모습을 닮은 연기로 시작하고 싶다는 차분한 소망도 밝힌다. 또 하나의 진한 소망은, 고두심이나 윤여정처럼 10년 뒤에도 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것. “스타가 되기보다는 금방 끊기지 않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윤종신의 <해변 무드송>,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등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고, <일단 뛰어> 다음엔 SBS 시대극 <대망>에도 얼굴을 비치는 등 조금씩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그녀의 다음 꿈은, 시한부 인생을 연기하는 것. “심금을 울리는 슬픈 연기, 꼭 해보고 싶어요. <가을동화>의 송혜교 같은….” 발랄한 역보다는 슬픈 여주인공을 꿈꾸는 것도 차분한 스물, 그녀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