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음악을 눈으로 보다 ‘아네트’
2021-10-27
글 : 송경원
레오스 카락스, 또 한번 영화의 근본을 탐문하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침묵해주십시오. 숨 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막이 오르고 오프닝곡 <So May We Start?>가 흐르면 예언 같았던 내레이션은 금세 현실이 된다. 카메라는 스튜디오에 앉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 딸 나타샤, 스파크스 형제를 차례로 비추다 배우 애덤 드라이버와 마리옹 코티야르와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공연을 시작한다. 레오스 카락스의 신작 <아네트>는 음악과 침묵, 희극과 비극, 충동과 욕망이 뒤섞여 경계를 가로지르고, 마침내 익숙한 것들을 해체하는 환상적인 뮤지컬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나쁜 피>(1986)의 도발적인 상상력은 물론 <홀리모터스>(2012)에서도 자기 파괴적인 형식미를 펼쳐냈던 레오스 카락스가 이번엔 오랫동안 꿈꿔왔던 뮤지컬에 도전했다. <홀리모터스>가 기계장치로서 영화 매체에 대한 창의적인 탐구였다면 <아네트>는 뮤지컬, 음악, 무대 위와 무대 뒤, 궁극적으로는 픽션과 진실에 대한 탐미적인 탐색이다.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코티야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애덤 드라이버)는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아니 다르면서도 같다. 헨리가 ‘죽여주는’ 무대를 하고 왔다고 자랑할 때 안은 무대에서 사람들을 ‘구원했다’ 말한다. 사과를 먹는 오페라 배우와 바나나를 먹는 코미디언은 스타로서 둘 다 정점에 섰을 때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고, 이들 사이에 딸 아네트가 태어난다. 꿈처럼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승승장구하는 안과 달리 헨리의 인기가 식어가자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헨리가 자기 비하의 그늘 아래 점차 폭력적인 충동에 잠식되자 안은 관계 회복을 위해 헨리와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거대한 폭풍우처럼 잔혹한 운명이다.

어쩌면 영화와 가장 닮은 예술 장르는 사진이 아니라 음악일지도 모른다. <아네트>는 운명과 비극의 선율 아래 음악을 ‘눈으로 보는’ 영화다. 레오스 카락스는 때론 무대를 하나의 덩어리처럼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때론 비현실적인 장치를 사용, 익숙한 영화언어를 적극적으로 해체해 가지고 논다. 가령 딸 아네트가 내내 인형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뮤지컬 양식과 퍼펫애니메이션의 신선한 조합, 자기 파괴적인 운명과 비극의 서사, 현란한 색채와 감각적인 무대까지 재료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한데 익숙한 요소들이 레오스 카락스의 손을 거쳤을 때 종전에 접하지 못했던 파괴적 에너지가 발생한다. 헨리는 여러모로 레오스 카락스의 그림자가 반영된 초상처럼 보이는데, 파멸적인 충동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은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힌다. 이 모든 유희의 중심에는 미국 록 밴드 스파크스에서 불꽃을 일으킨 음악이 있다.

제74회 칸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한 <아네트>의 표면은 흥미로운 뮤지컬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아도 충분히 눈과 귀가 즐겁고, 집착과 불안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익숙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속살을 한 꺼풀 들춰보면 영화의 존재론, 예술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심연을 마주할 수도 있다. 레오스 카락스는 <홀리모터스>에 이어 또 한번 영화의 근본, 기계장치적인 속성에 대해 탐문한다. 무대 위와 무대 뒤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 오페라, 무대의 각종 이미지를 콜라주한 끝에 인간 본연의 어둠, 심연과 교감하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경험인 동시에 픽션과 무대에 대한 흥미로운 체험. 레오스 카락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록 오페라, 뮤지컬, 코미디, 장중한 드라마, 멜로와 누아르, 심지어 SF 판타지의 그림자마저 아우른다. 고전적이고 신화적인 희비극을 형식의 경계를 가로질러 담아낸, 우울하면서도 묵직한 농담이라고 해도 좋겠다. 신랄하고 어여쁜 자기 파괴적 에너지로 누구라도 단숨에 홀려버릴 거대한 농담.

check point

레오스 카락스의 첫 번째 뮤지컬

1984년 <소년 소녀를 만나다> 이후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 <홀리모터스>까지 단 5편만 선보인 레오스 카락스의 6번째 영화는 무려 뮤지컬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을 뮤지컬로 제작하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은 미국 록그룹 스파크스의 제안을 통해 현실이 됐다.

홈 무비적인 접근 방식

9년 만에 작품을 연출한 이유에 대해 레오스 카락스는 “나 자신이 달라지고 변화했을 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작 <홀리모터스>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레오스 카락스의 딸 나타샤가 오프닝부터 등장한다.

마리오네트

“늘 인형극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다”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아기 아네트를 살아 있는 인간 대신 마리오네트로 표현했다. 3, 4명의 인형조종사가 직접 마리오네트를 움직이고 CG로 조종사들을 지웠다. “인형극에는 영화만큼이나 마술적인 속성이 있다.”(레오스 카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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