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다함께 여름!'의 일탈이 만든 형식
2021-11-03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그 여름의 끝에 남은 것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언젠가 자크 로지에는 “나는 뤼미에르 형제처럼 영화를 만든다”라고 말했고, <엄마와 창녀>에서 장 외스타슈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나의 자유는 남들의 표현을 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욤 브락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누벨바그의 끄트머리에 있는 두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다함께 여름!>의 시작과 끝에는 축제와 파티가 놓여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이고 또 흩어지는 무작위의 현장 한가운데서 기욤 브락은 예기치 못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순간의 기록을 렌즈에 담는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모든 방향으로 열린 사건의 잠재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마주침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장소에서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나타나고 또 사라지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른 채로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비가시적인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을 테다. 마치 영화관을 오가는 이름 모를 유령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열리는 첫 장면에서 축제의 광경은 더없이 아름답다. 한밤의 도시에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추고, 흘러나오는 노래가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어색하게 주변을 서성이며 지켜보던 펠릭스(에릭 난추앙)는 어느 순간 춤추는 군중 사이로 들어가 알마(아스마 메사 우덴)와 춤을 춘다. 통제되지 않는 군중의 소란 속으로 카메라는 던져진다. 아직 우리는 두 사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알지 못하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다만 음악에 맞춰 춤추는 펠릭스와 알마의 움직임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표정과 동작이 한발 먼저 화면에 붙잡힐 뿐이다. 이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두 사람을 이루는 사회적 조건, 즉 이름과 신원, 직업이나 계층 따위에 앞서서 스크린에 펼쳐진 즉물적인 몸짓이 초기영화적인 청량한 매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캠핑장 근처 노래 바에서 벌어지는 영화 후반부의 파티는 도입부에서 묘사된 축제에 비하면 소박하고 범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브락은 기억에 깊이 남을 한순간을 포착한다. 그 순간은 아름답지만, 또한 멜랑콜리한 정취를 드리운다. 휴가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셰리프(살리프 시세)가 세실과 함께 바에 찾아온다. 술에 취해 마이크를 잡은 에두아르(에두아르 설피스)가 셰리프를 소개하고, 셰리프와 세실은 쭈뼛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떠밀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서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특정한 의미로 정박되지 않는 두 사람의 시간이 노래와 함께 흘러간다. 이곳에 왜 왔는지도 모르겠다던 셰리프는 휴가의 목적을 찾은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전히 수줍게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의 여행에 그럴듯한 이유와 목적은 필요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그런 무용함으로 가득한 시간을 돌연 긍정하고 만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치장도, 극적인 변화도 없다. 하지만 이 작은 파티는 관계를 맺는 데 서투른 개인들에게 서로의 눈을 살피면서 같은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낯선 결합의 순간을 제공한다.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의 춤과 마지막을 앞두고 부르는 두 사람의 노래. <다함께 여름!>의 처음과 끝의 도드라진 아름다운 순간은 한 화면에 두 사람이 함께할 때 발현된다.

일탈의 여정

이 모든 현상을 허용하는 절대적인 전제는 그들이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다함께 여름!>은 기욤 브락이 만든 또 한편의 바캉스영화다. 바캉스를 즐기는 예외적인 시기가 아니었다면 이리도 다양한 계급과 인종과 출신 지역으로 형성된 영화 속 인물들이 마주치고 재회하고 다시 헤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브락이 그리는 바캉스에 이야기랄 것은 없다. 알마와 나눈 하룻밤의 기억을 잊지 못한 펠릭스는 절친한 친구 셰리프와 함께 그녀가 사는 남부 프랑스 드롬강 지역의 휴양지로 떠나고,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카풀로 만난 에두아르가 합류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불규칙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고 조금씩 목적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정작 도착한 휴양지에서 알마는 당혹스러워하며 펠릭스를 피하고, 세 인물은 교통사고를 낸 자동차 수리로 인해 일주일 동안 발이 묶인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카메라는 경로를 바꾸고 서로 다른 우연에 휘말리는 우회를 도입한다. 기욤 브락이 장면을 움직이는 원리는 우회로를 만들어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관된 움직임으로 여정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로, 다른 방향을 구획해내어 변모하는 세계의 리듬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여정을 촉발시킨 최초의 목적이 사라지면서 역설적으로 영화의 인물들은 기존에 세워진 규칙을 넘어서는 자유로움을 취득한다. 브락의 영화에는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아마추어리즘의 놀라움이 새겨져 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기를 멈추지 않는 여행자/관광객의 눈과 귀처럼, 이 영화의 카메라는 같은 자리에 멈춰서 머물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에 캠프장까지 직진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시내를 구경하자는 펠릭스의 대책 없는 제안에서 알 수 있듯이 <다함께 여름!>의 연쇄된 장면들은 인과적인 결합을 따르기보다는 우연적이고 불규칙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영화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남으로써 화면에서도 예정에 없던 변형된 형식이 열리기도 한다. 펠릭스의 제안에 따라 방향을 바꾼 자동차는 너무 좁은 길로 들어선 나머지 의도치 않은 사고를 내는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자동차 근처로 모여든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우회로부터 산출된 상황에 또 다른 우회가 덧입혀지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벌어진 픽션의 세계는 연출되지 않은 아이들의 말과 반응을 끌어들이면서 다큐멘터리적 세계로 전환된다. 픽션의 사건이 다큐멘터리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다큐멘터리의 반응은 다시 픽션의 일부로 기입되는 변형이 거듭된다. 여기서 영화적 경로의 우회는 통합적인 형식에서 이탈하는 형식의 변형까지 포괄하는 영화 장치의 우회로 번진다. 길을 우회한다는 것은 눈에 비치지 않은 바깥으로 나서는 일이다. 그곳에서 낯선 얼굴과 소리를 채집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영화에 맺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용하는 열린 프레임을 구축하게 된다.

<다함께 여름!>의 여행은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균일한 직선으로 움직이는 대신, 지나가는 풍경에 눈을 돌리고 잠시 멈춰 선 자리에 감도는 자연의 신호에 반응하는 굴절된 선들의 기록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바깥에 펼쳐진 강의 풍광에 사로잡히는 세 사람의 표정을 떠올려보자. 장면의 시작 지점에 자연과 풍경이 있고, 카메라가 움직이면 그 영역 안으로 인물들의 시선이 들어온다. 이 연결로부터 하나의 사건, 하나의 방향이 만들어진다. 기욤 브락은 이 영화에서 세계와 인물들의 만남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연의 풍경으로 가득한 세계는 무관심하지 않다. 단순히 무관심하지 않은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에게 가능한 행동과 반응에 윤곽을 제공하는 무질서한 기준이 되어준다. 세르주 다네의 표현을 빌린다면, 브락의 영화는 계절의 기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상학적 영화에 다가서 있다. 해양과 대기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변화무쌍한 활기로 가득한 영화라는 뜻이다. 하나의 예로, 펠릭스와 셰리프가 카풀을 위해 에두아르에게 사정하는 순간에 쏟아지던 대기 중의 폭풍우는 다음 장면에서 맑게 갠 하늘과 구름의 풍경으로 뒤바뀐다. 프레임의 주변을 지나는 모든 풍경이 무질서한 리듬으로 화면을 스쳐지나간다. 자연은 인물들을 좀처럼 멈춰 세우지 않는다. 그럴 만한 장소를 쉬이 내어주지 않는다.

물결의 흐름을 닮은 이 영화의 유연한 리듬은 인간이 만드는 관계의 단단함마저도 흐트러트린다. 두명씩 짝을 이루고 갈라서고는 또 다른 조합으로 반복하는 이 영화의 인물들은 영화의 형식과 마찬가지로 변형을 거듭하는 유동적 피사체에 속한다. 그들은 회화적 풍경 이미지의 일부로 포획되기도 했다가, 다큐멘터리적 질감으로 포착된 순간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물들과 변모하는 풍경은 분리할 수 없다. 그들의 신체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인물의 몸은 강물에 빠지고, 급류에서 낙하하면서 자꾸만 화면 바깥으로 움직이려 한다. 시종일관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거듭해서 인물들이 사라지고 교체되고 변형되는 화면 내부의 논리로 이해한다면 <다함께 여름!>은 나란히 마주 선 두 인물의 시간이 결코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휴가의 환상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끄트머리에 선 영화

한편으로 <다함께 여름!>에 비친 풍경들은 카메라 발명 초창기에 영상이 만들어냈을 법한 시각적 자극을 꿈꾸게 한다. 렌즈의 표면에 포착된 강의 물줄기와 태양광선, 흔들리는 나뭇잎과 바람의 움직임만으로 화면은 강렬한 밀도로 부푼다. 이는 대상의 물질성을 직접 눈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의 순수한 매혹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현재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영화사의 끄트머리에서 위치한다는 지각을 되돌려준다. 영화는 물가 근처에 두세명의 인물을 세워두는 간단한 배치만으로도 놀라울 만큼 풍부하게 성립할 수 있지만, 그 장면들은 또한 영화사의 흔적들을 지목하며 이미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나뭇잎과 물을 보면서 지극히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초기영화의 생김새를 떠올리는 것처럼. 작고 사소한 움직임에도 영화의 근본적인 역량을 숙고하게 하는 예민한 반응을 일으킨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서 이런저런 영화들의 흔적을 거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바캉스의 시간을 다루는 영화의 특성이 기욤 브락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고유한 방법은 아니다. 반대로 브락은 해변을 담아낸 프랑스영화의 긴 전통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가라고 말해야 타당할 것이다. 장 비고와 장 르누아르, 장 그레미용의 해변, 그 뒤로 이어진 장 뤽 고다르와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와 자크 로지에의 해안의 바캉스. 그리고 <나의 작은 연인들>(장 외스타슈)의 모든 것이 사라질 듯한 바캉스의 기억. 바캉스의 시간은 영화의 한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무대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브락의 작업은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영화라고 할 만한데, 그가 다루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기 욕망과 감정에 서투르고 능숙하지 못한 유년기적 성질을 지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화가 뤼미에르에서부터 누벨바그에 이르는 동안 영화가 구축한 해변과 바캉스의 역량을 배면에 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욤 브락을 누군가의 뒤에 선 작가로만 말하는 건 게으르고 손쉬운 해석일 테다. 브락이 그리는 인물은 자기 욕망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게다가 지적인 말을 들먹이지도 않는다. 인물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측면에서 본다면, 브락의 영화와 가장 닮은 건 에릭 로메르나 장 르누아르가 아니라 외스타슈의 영화다). 그들은 단지 일회적인 욕망의 순간을 지나치는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행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시간을 통과한다. 캠프장에 도착한 펠릭스가 알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 이를 예증한다. 초록색 나무를 뒤에 두고 밝은 태양을 비추고 있던 펠릭스의 주변 환경은 그가 전화를 걸고 알마의 대답을 듣는 시간 동안 천천히 푸른빛을 드러내며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화를 내는 알마의 반응에 펠릭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어두워졌음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다함께 여름!>을 수놓는 인물들의 사이는 연약하고 이질적인 수많은 차이로 가득하다. 다양한 계급과 사회적 격차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서로 다른 언어와 국적, 파리와 남부의 휴양지, 부유한 학생과 노동자계급,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갓난아기와 성인까지. 기욤 브락의 바캉스는 바로 그러한 차이들을 토대로 특별한 통합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물에 빠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기를 보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특수한 몸짓을 통해 유지되는 임의적 질서를….

일시적으로 모든 격차를 무효로 하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셰리프와 에두아르가 한 텐트에서 잠들기 직전에 대화를 나눌 때다. 비좁은 텐트에 배우 두 사람과 카메라를 밀어넣고 두대의 스마트폰 빛에 의지해 촬영된 이 빈곤한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제한된 물리적 조건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한결 내밀한 순간으로 그려진다. 화면 양쪽에 나란히 누운 두 남자는 텐트 안에서 나는 냄새에 관해 말한다. 둘이 함께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순간에 이르면 사회적, 외형적 격차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고 그저 같은 냄새를 맡고 같은 소리를 내는 두 사람이 카메라에 비칠 뿐이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이유 없이 감동적이다. 영상의 의무는 카메라에 찍힌 자들에게 정당한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오시마 나기사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이 장면에서 브락은 사회적 격차에 의해 포착할 수 없었던 정당한 우정의 기록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좁은 텐트 안에 감도는 희귀한 어둠을 포착하면서, 잃어버린 관계의 기록을 구축한다.

바캉스의 끝

휴가는 끝난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이 품은 감정과 욕망은 좌절되거나 덧없이 사라진다. 규칙이 다시 작동하고 모두 제자리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다함께 여름!>이 붙잡는 것은 그럼에도 움직이는 시간이다. 강가에서 깨어난 펠릭스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길거리의 광대와 재회하는 동안, 에두아르는 자동차 수리비를 채우기 위해 화장실 청소를 한다. 일터에 휴가를 내기 위한 셰리프의 거짓말에서 출발한 모험은 다시 노동의 시간을 살아가는 에두아르의 손끝에 도착한다. 그리고 셰리프의 무표정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벗은 몸으로 한 침대에 누운 세실을 바라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창밖의 풍경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마주 선 두 사람의 형상이 금세 사라지는 것과 같이 여름이라는 한 계절이, 혹은 유년기의 어느 시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무표정한 셰리프의 얼굴에서 멈추는 영화의 결말은 이유 모를 불안을 드러낸다. 그것은 휴가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통속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더는 춤을 출 수도, 쑥스럽게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인 단독자의 불안이다. 관계의 끄트머리에서 춤과 노래가 없다면, 달리 말해 휴가의 시간이 없다면 남녀의 투숏을 지속하는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자의 불안이다. 사라지기 직전의 얼굴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어느덧 셰리프가 장난스럽게 말한 “어른들의 시간”이 드리운 건지도 모른다. 이는 바캉스의 끝, 그리고 영화의 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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