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지 감독은 매니저를 대동하지 않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오늘의 인터뷰를 위해 홀로 메이크업을 했다는 그는 “위치에 맞게 행동하는 게 맞다”며 배우가 아닌 신진 감독의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장편영화 <장르만 로맨스>의 개봉을 앞둔 그는 최근 걱정과 두려움, 떨림과 설렘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배우들의 코믹한 몸짓과 앙상블이 돋보이는 <장르만 로맨스>는 캐릭터와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에 대한 조은지 감독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중학생 시절 “내일도 모레도 또 보고 싶을 게 분명해서” 주성치 영화 비디오를 습관처럼 연체하던 소녀는 영화 <눈물>로 데뷔해 20년 넘게 배우의 옷을 입은 뒤, 이제 코미디영화 <장르만 로맨스>의 연출자로 관객 앞에 섰다.
- 첫 상업 장편 연출작을 개봉한다.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 개봉할 때의 감정과 어떻게 다른가.
너무 다르다. 배우로서는 내 캐릭터가 이 극에 어떤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이라면, 감독이 되니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관객에게 가닿을까 궁금하다. 관객이 내 생각과 의도를 잘 읽어줄지 긴장된다.
- 몇년간 이 작품에 몰두했나.
2018년 11월에 김나들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땐 <입술은 안돼요>란 제목의 이야기였다. 제작사로부터 어떤 코멘트도 없이 시나리오를 받았기 때문에 출연 제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출 제의였다. 내 단편영화 <2박 3일>을 본 제작사 비리프측에서 내게 연출을 맡겼다. 시나리오가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과 성장을 다뤄 평소 내 관심과 맞닿아 있었고, 연출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상업 장편영화를 잘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역제안을 했다. 각색을 해볼 테니 그 결과물이 제작사가 생각하는 기획 의도와 맞는지 보라고. 한달 동안 각색해서 제작사에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제작사의 의견과 잘 맞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연출을 하게 되면서 1년6개월 동안 <장르만 로맨스>에 매진했다. 이후 2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드라마 <인간실격>에 참여하며 바쁘게 지냈다.
- 관객은 <극한직업> 전까지 류승룡 배우를 선 굵은 연기를 하는 배우로 인식해왔는데, 그를 코미디영화의 주인공에 캐스팅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극한직업>은 류승룡 선배가 <장르만 로맨스>에 캐스팅된 다음 개봉한 작품이다. <극한직업> 외에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자연스러운 연기가 많았다. <거룩한 계보> <열한번째 엄마> <된장>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류)승룡 선배의 필모그래피가 코미디부터 슬픈 서사까지 다 아우르고 있어 그 자체로 주인공 현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연출자로서 다른 배우는 생각나지 않았고, 승룡 선배가 아니면 자신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 현의 전 부인 미애(오나라)와 현의 친구인 순모(김희원)는 연인 사이다. 둘의 사랑이 미움받지 않도록 연출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미애와 순모가 연인이 된 상황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쉽고 본능적인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모는 미애를 평생 바라봤고 미애는 현과 이혼을 겪으면서 순모에게 위로도 받고 그의 마음을 알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애는 선뜻 순모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은 특정 공간에서만 자유롭다. 차 안에서만 알콩달콩하고, 주거지인 서울을 떠나 강원도에서 자유롭다. 순모가 강원도 여행 계획을 촘촘히 세우는 것도 서울에서 미애에게 못다 해준 걸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영화에 담진 못했지만 엔딩에 두 사람이 한강공원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있는데, 주위의 시선을 극복한 사랑의 결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 현의 아들 성경(성유빈)과 이웃 주민 정원(이유영) 사이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생긴다.
정원의 개인 서사가 특별히 보이진 않지만 나는 그가 굉장히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성경이 마치 예전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을 거다. 정원이 생각 없이 성경에게 다가간 게 아니라, 좋은 이웃이자 좋은 친구가 돼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이를 깨달은 정원은 정원 나름대로 성장을 한다. 그래서 성경과 정원 사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원의 표정은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있고. 성경도 성장통을 겪고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된다.
- 세 커플 중 다수가 어떤 관계라고 정의 내리지 않은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김나들 작가가 쓴 시나리오 엔딩 그대로다. 그 결말을 나도 지켜야겠다고 판단했다. 영화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서로의 치부와 아픔을 다 드러내고 난 다음에는 서로를 더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이전보다 한 단계 뛰어넘는 관계가 형성된다.
- 방은진, 문소리, 김윤석 이후 오랜만에 배우 출신 감독이 출현했다. 언제부터 연출자로서의 열정을 깨달았나.
20대 중반부터 글쓰기가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일기든,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무작정 썼다. 그러다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는데, 지인들이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부추겼다. 아직 세상의 빛을 못 본 첫 작품 <2만원 효과>란 단편을 만들었다. 어느 카페에서 2만원 때문에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의심하는 내용인데,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사실 계기는 간명하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걸 했다. 지금은 연기뿐 아니라 영화란 매체를 더 알아가야겠다는 마음이다.
-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종식되는 시점에 영화를 개봉하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다.
어떤 결과가 내게 올지 모르겠지만 참 고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만큼 많이 성장했다. 단편 <2박 3일>을 보고 나를 연출자로 택한 백경숙 비리프 대표와 투자배급사 NEW에도 감사하다. 그들은 로또보다 훨씬 더 큰 기회를 내게 맡기고 내가 잘해내길 응원해줬다. 그래서 나도 치열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연출에 임했다. 영화를 개봉하는 마음은 솔직히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오늘 인터뷰하러 오면서도 심장이 바닥 끝까지 내려갔다가 갑자기 하늘로 치솟기를 반복할 정도로 여러 감정과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영화인으로서 이렇게 주목받아본 적이 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