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온더비치>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밤치기> <하트> 등 연애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온 정가영 감독의 첫 상업장편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가 11월24일 개봉한다. 독립영화 팬들이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큼 자유분방한 연애에 오랫동안 집중했던 정가영의 세계가 전종서와 손석구를 만나 어떤 결을 갖게 되었을까. 개봉에 앞서 <연애 빠진 로맨스>를 감상한 임수연, 김소미 기자의 짧은 감상을 전한다.
임수연 기자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남자에게 3년 넘게 섹스 파트너로만 취급받고 이제 막 한달 만난 남자와도 시시하게 헤어진 자영(전종서)은 섹스는 너무 하고 싶지만 더 이상 사랑 같은 감정 노동 서비스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우리(손석구)는 같은 회사 선배가 원할 때 잠자리 상대가 되어주는 호구가 된 것 같아 속이 쓰린 와중, 편집장으로부터 독자들을 사로잡을 ‘어그로’를 끌 수 있는 섹스 칼럼을 쓰라는 지시를 받는다. 크게 내키진 않지만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은 칼럼 소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데이트 어플 ‘오작교미’에 가입한 자영과 우리는 어색하게 만났다가 술 마시고 모텔에 가고 연애 빼고 연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게 된다.
데이트 앱과 섹스 파트너 같은 설정은 결국 ‘연애’와 ‘로맨스’를 구성하는 성분과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가려내기 위한 장치다. 가장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보여주지 못하는 진짜 내면을 보여주고 술 마시면서 이상한 거 물어봐주고 섹스도 할 수 있는 관계 속에 오가는 텐션은 ‘연애’에 관한 단순하지만 예리한 가설로 발전한다. 내 인생의 주연이 되지 못하고 ‘따까리 조연’이 된 처지를 한탄하는 20대의 고민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그런데 연인 때문에 상처받고 감정을 소모하는 흔해빠진 순간이야말로 삶 속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찰나가 아니겠냐는 인생 선배의 말은 왠지 위로가 된다.
좋은 캐스팅의 힘이면서, 두 배우 모두 전작에서 보여주지 않은 매력도 보여준다. 일정의 발칙함을 품은 캐릭터들을 고유한 에너지로, 타고난 능글맞음으로 뻔뻔하게 설득하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전종서와 손석구가 귀엽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콜>에서 제멋대로 폭주하던 괴물이 됐던 전종서는 이번 작품에서 친구들과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지고, 못된 남자를 만나 상처받았으면서 애써 호기로운 척하고,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지만 씩씩하게 이겨내는 95년생 함자영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배우 전종서 사용법’에 다양한 선택지를 추가한다. 평양냉면이 행주 삶은 물 같지 않으냐고 소심하게 투덜대며 먹다가 뻘쭘한 얼굴로 모텔에 가고, 다시 만날 때 조심스럽게 자신이 잠자리에서 어땠는지 지질하게 묻는 우리는 어느 쪽에서 봐도 로맨틱할 요소가 없는데 어이없게도 은근 매력 있다.
다만 실제 경험담을 당사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칼럼으로 게재한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뒤끝이 마냥 깨끗할 순 없다. 예고된 갈등이 촉발되고 마무리되는 방식 역시 관객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범주가 달라질 듯하다. <비치온더비치> <밤치기> 등 독립 및 단편영화를 만들 때부터 본인만의 인장이 확고했던 정가영 감독이 첫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김소미 기자
우리 자신이 복잡한 이상, 결코 간편한 만남과 연애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외로움과 효율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데이팅 어플을 선택한 밀레니얼 남녀의 로맨틱 코미디 <연애 빠진 로맨스>의 맛은 오래 곱씹지 않아도 금방 달고 쓰고 복잡한 매력을 드러낸다. 곧 서른, 학자금에 월셋집 대출까지 더하면 1억에 육박하는 대출금을 계산하던 함자영(전종서)은 기회비용이 높은 연애부터 포기하기로 한다. 문제는 성욕. 데이팅 앱으로 간편히 해결해보려 하지만 말이 쉽지 현실은 각종 진상들과의 대화로 귀결되거나 납치, 강간, 살해 위험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다가 끝난다. 편집장에게 19금 섹스 칼럼을 강요받은 잡지사 기자 박우리(손석구)에겐 글의 소재와 영감이 되어 줄 체험이 절실하다. 그렇게 각자의 충분한 명분을 손에 쥔 채 자신은 얄팍한 속물이 아니라고 믿는 두 남녀가 그렇게 막자영과 직박구리라는 야한 이름으로 조우한다.
데이팅 앱으로 표면만 업데이트되었을 뿐, <연애 빠진 로맨스>는 고독하고 공허한 도시 남녀의 로맨스 코미디가 약속하는 정서적 컨벤션을 착실히 따른다. 소주, 대화, 모텔로 축약되는 교류 이후 뜻밖의 고민이 시작된다는 것. 가볍게 만났지만 진심을 쓰게 되고 의외의 연결과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 여기서 새로운 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캐릭터 함자영의 코믹한 말맛과 속도전에 능한 정가영 감독의 뻔하지 않은 영화적 화술이다. 일말의 지체와 망설임이 없는 내러티브의 태도가 <연애 빠진 로맨스>를 뒤끝 없이 즐겁게 만든다. 박우리의 칼럼을 읽은 잡지사 편집장의 말마따나 <연애 빠진 로맨스>는 “모텔에 들어갔다”가 곧장 “모텔에서 나오는” 섹스 코미디다. 아예 생략되거나 매우 짧게 축약된 베드신 대신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술을 삼킬 때마다 서로를 곁눈질하기 바쁜 두 남녀의 취중 대화다. 동물적인 두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펼치고, 그 기세 그대로 상대의 매력과 경합을 벌일 때 발휘되는 센슈얼한 화학작용이 이 영화의 대화신에서 폭죽을 터뜨린다. 예고편에서부터 반향을 일으킨 대로, 처음 만난 상대에게 “니가 제일 성병 안 걸린 것 같아서” 택했다고 밝히는 여자 함자영은 전종서 외에 다른 배우를 결코 떠올리기 힘들만큼 배우 본연의 야성적인 성미로 펄떡댄다. 적당히 능청맞게 건들거리면서도 결정적으로 무해한 태도를 갖춘 남자를 연기하는 손석구는 후반부로 갈수록 정극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둘 모두, 짜릿하고 사랑스럽고 아슬아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