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감정 교육
2021-12-08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이 말과 행동을 탐색하는 법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영화의 두 주인공은 감정에 관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강렬한 정념에 사로잡힌다.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고민과 혼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가리키는 치명적인 감정에 붙들린다. 그들의 감정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걸까?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영화의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이하 <러브 어페어>)은 말과 행동의 영화다. 말과 행동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영화는 지극히 드물기에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잇는 모호한 경계면을 탐색하는 영화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관성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때로는 뱉어낸 말과 수행하는 행동의 규범이 불화를 일으키기 마련이고, 말로 언급될 뿐 행동으로 변환되지 않는 것과 행동으로 전달하는데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남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말하는 것’과 ‘하는 것’은 늘 정합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엠마누엘 무레 감독은 모든 인물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 정신적 간극과 모순에 주목한다.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말을 들려주면서 그 미묘한 차이에 시선을 두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번역 일을 그만두고 감정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영화 속 막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견되고 변모하는 감정의 모양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극적이지만 분명한 어투로, 쓰고자 하는 소설의 주제를 ‘감정’이라 규정하는 막심의 말이 그러하듯 이 영화를 두고 감정이라는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정은 영화의 표면에 포착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시청각적 재현으로 관찰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붙잡히는 대상이 영화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존립하는 한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전제다. 그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라면 말과 행동으로 형성되는 가시적인 규범이 요구된다. 누군가를 바라보거나 외면하고, 다가가거나 멀어지고, 말을 걸거나 침묵하는 구체적인 표식을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말하고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고 시선을 두는 모습만으로 감정의 표식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선보이는 인물의 액션을 보고 감정의 상태를 가늠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견인하는 근원적인 기제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어떤 동력이 인물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인물은 변화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가?

전화벨이 네 번째 울리면

이야기가 만드는 인과적 질서는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지배적인 체계를 확립하지만, 감정을 움직이는 원리까지 좌우하지는 않는다. 거기엔 다른 논리가 있다. <러브 어페어>에서라면 초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의 대화를 언급하고 싶다. 막심의 옛 연인 상드라는 오랜만에 재회한 그에게 수년 전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의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한다. 그녀는 막심이 전화벨이 세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면 그를 만나러 갔을 것이라 뒤늦게 고백한다. 하지만 막심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상드라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해 의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고, 벨이 네번 울리는 때에 전화를 받았다. 진부한 말장난과도 같은 이 우연적인 어긋남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달리 말하면 우발적이고 무의미한 우연적 사건을 필연적인 원인으로 치환하는 방법이 그들에게서 실행되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서라면 세번 울린 전화벨과 네 번째로 울리는 전화벨은 아무런 의미의 차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단지 똑같은 음조와 길이의 청각 신호가 한번 더 반복됐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화벨이 울리는 횟수에 감정의 상태를 결부 짓는 규범을 도입하는 순간, 그것은 연인들의 엇갈림을 인도하는 픽션적 장치로 거듭난다. 상드라는 기계적인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전화벨 소리에 세 번째 울림의 끝과 네 번째 울림의 시작 부분을 설정한다. 그리고 두개의 소리를 나누는 극미한 구분에 맞춰 감정적 선택을 내맡긴다. 벨이 세번 울리는 동안 전화를 받는 막심과 네 번째에 받는 막심은 결코 같은 존재일 수 없다. 실제로는 1초도 안되는 시간의 차이일 테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변형시키고 삶의 다른 방향을 개시한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는 시점에 전화를 받은 막심의 우연한 결정은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필연적인 사태가 되고, 관계를 변용시키는 절대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이 미세한 차이로부터 영화의 테두리가 결정된다.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픽션이 도입되었다면, 그들은 더이상 일상 속의 평범한 인간일 수 없다. 픽션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과 행동을 붙드는 반성적 장치로 편재해있다. <러브 어페어>가 그리는 인물들은 그렇게 일찌감치 연극 같은 무대 위에 속해 있다.

감정을 흔드는 영화에서의 사건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거나, 누군가 헤어질 결심을 하거나,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에서 인물의 내부로부터 내려지는 판단은 절대 명확한 이유로 해명되지 않는다. 감정은 인과적인 결정에 앞서 우리에게 도래한다. 참여자들의 조건을 분석해 이상적인 연인을 예측하고 매칭하는 데이팅 앱을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던 상드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불확정적인 우연의 도래야말로 세계를 지탱하는 모럴일 것이다. 하지만 도처에 널린 원인 없는 우연 앞에서 우리는 빈번히 혼란스러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픽션은 그러한 우연적 가능성을 필연으로 대체한다. 물론 픽션이 구축한 필연성의 근거는 네 번째 울리는 전화벨 신호처럼 터무니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연속된 우연만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버튼을 누른 상대방의 응답이 들려올 뿐이다. 엠마누엘 무레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말과 행동들을 진정 유의미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려면 믿음과 약속을 토대로 한 픽션이 전제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막심과 상드라가 그들조차도 자기 마음을 모르던 어느 순간에 전화벨이 만들어내는 작은 픽션에 휘말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약동하는 삶의 감정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결부 짓는 공통의 픽션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을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러브 어페어>는 다음과 같은 자크 랑시에르의 지적을 떠올리게 하는, 오늘날 프랑스영화의 지루한 경향을 답습하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랑스 희극처럼 ‘소피스티케이티드’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 쓸데없고 지리멸렬한 말을 자꾸 늘어놓는(…) 소피스티케이트한 관계, 소피스티케이트한 대사들, 그리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들, 사회의 변화나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사적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피상적인 영화의 한 사례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인물들의 감정을 둘러싸고 배치된 복잡한 픽션의 효과를 간과한 무성의한 독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러브 어페어>는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범상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의 표면을 구획하고자 하는 픽션적 방법론에 관한 관찰기다. 게다가 이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거나 사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기획이다.

내면의 픽션

사촌 형 프랑수아의 별장에 도착한 막심은 형의 애인 다프네와 단둘이 남아 서로에게 각자의 연애담을 말하기 시작한다. 플래시백으로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전반적인 드라마를 구성하는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기 전에 감정적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서술의 형태다. 앞서 언급한, ‘말하는 것’과 ‘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틈이 그들이 교환하는 이야기의 단락에서 만들어진다. 막심과 다프네는 각자의 삶의 구간을 거쳐온 행위자이면서 그 기억을 떠올리고 성찰적으로 재구성하는 목소리의 주인이다. 무레는 이 인물들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우연이 찾아올 때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끝내 털어놓는 순간을 섬세하게 비춘다. 영화는 이런 과정에서 상투적이라 부를 만한 상황과 묘사를 끌어들이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을 언어로 발화하는 순간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심리적 절차와 그 이후의 파장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영화는 감정을 고백하는 이들의 얼굴을 직접 비추기보다는 그들의 뒷모습과 침묵하는 얼굴 위로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 말과 행동이 멈춰진 자리에 크게 울려 퍼지는 음악은 숨겨진 마음을 대리하는 내적 진동이다. 그것은 음율의 형태를 띤 또 다른 전화벨처럼 인물들의 주변을 에워싼다. 그렇게 비루한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감정의 전조는 고백을 듣는 타인에게로, 그들이 머무는 공간 전체의 공기로 번져가는 것이다.

막심과 다프네, 프랑수아와 그의 아내 루이즈까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은 해야 하는 일과 행동하는 이유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들과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들 사이에 새겨진 모순을 능숙하게 봉합하는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어색하고,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래서 선택을 미루거나 예전의 궤적을 되돌아보며 숙고하는 유형에 속한다. 여러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이 영화의 관계망에서 인물들간에 세워진 질서를 이탈하는 충동적인 감정은 기존의 규칙을 위태롭게 하기에 그들 앞에 놓인 선택은 그저 하나의 선택만이 아니다. 선택에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겹의 규칙과 결부된 충돌이 있다. 그 충돌을 직접 맞닥뜨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영화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내밀한 긴장으로 충전된 장면들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고뇌에 붙들려 있다. 막심이 상드라의 몸을 만지면서 그의 친구이자 상드라의 연인인 가스파르가 알려준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떠올리고, 다프네가 선망하던 영화감독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프랑수아와 만남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키스와 포옹, 그리고 한 침대에 눕는 연인만의 고유한 순간에서도 그들은 눈앞의 한 사람만을 지켜볼 수 없다. 내부적 고뇌로부터 동떨어진 유토피아 공간은 없다. 그것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또 다른 규칙이다. 이 영화에서 누군가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 나가 혼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단독 장면이 반복해서 담기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존재인 무레의 인물들은 그렇게 잠시나마 희미한 평온을 얻는다.

내적인 감정이 폭발하는 무대로 주어지는 건 그들이 머무는 집이다. 집은 모든 감정적 충동을 허용하는 관용의 장소이자, 픽션의 규칙과 인물들이 숨겨둔 열망이 뒤얽히는 삶의 무대이다. 하지만 그곳에 항구적으로 정박할 순 없다. 이미 말했듯이, 충동적인 감정이 일어나면서 공간을 유지하는 규칙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세개의 집을 말할 수 있는데, 막심과 다프네가 이야기를 나누는 교외의 별장, 막심이 상드라와 가스파르 커플과 함께 사는 집, 그리고 루이즈가 프랑수아를 속이기 위해 가짜 애인과 연극을 벌이는 빈집이 그 예시다. 이 공간들에서 어김없이 질서를 흩트리는 위반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특히 마지막의 빈집은 <러브 어페어>가 다루는 감정의 문제가 픽션, 거짓말, 연극적인 가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환기한다. 루이즈는 프랑수아의 외도를 목격하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거짓 연극을 꾸미는데, 신기하게도 연극을 벌이는 빈집의 공간에서만큼은 실제의 연인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꾸며낸 연극은 현실의 한 부분을 위안하고, 현실을 대체하는 또 다른 ‘현실적’ 순간이 된다. 전화벨 소리로부터 촉발된 내면의 픽션이 꾸며낸 연인의 심리로, 거짓된 집의 외관으로 넓혀진 것이다. 물론 이는 빈집의 문이 닫히고 픽션의 시간이 지속될 때까지만 유효한 ‘현실’의 한 단면이다.

엠마누엘 무레는 연인들의 행복만이 아니라 질투와 불안, 배반과 체념을 포함하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다룬다. 그리고 이 복잡한 무대에서 하나의 행복은 다른 하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이 솟구칠 때마다 영화의 인물들이 고민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래서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듣게 하는 픽션의 무대는 그런 미숙하고 불완전한 이들에게 삶의 기록을 달리 마주하는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한다. 삶에 던져진 변화의 기점을 다른 각도로 직면하고 이후의 삶에 합류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을 관찰자의 눈으로 되짚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은 삶의 모든 순간에 끊임없이 던져진다. 하지만 <러브 어페어>에서 감정이 시작되면서 찾아오는 진통은 찾기 어렵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던 막심과 다프네는 어느 순간 금기를 넘어 상대에게 이끌리지만, 두 사람이 사랑에 이르는 여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된 말과 행동이 또 다른 감정을 추동하는 이 불가해한 수순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일 수도 있을 테지만, 대신에 영화는 변화를 지각하는 반응의 궤적을 면밀히 주시한다. 우발적으로 다가온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안에 침입한 타인의 장력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레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발생했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어떤 말과 행동으로 받아들이느냐다. 그러므로 감정은 특별한 윤리적 선택의 장소다. 규범을 벗어나는 판단이 요구되는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끈질기게 묻는 곳이다. 감정을 마주 보는 것은 그런 윤리적 행동과 직결된다.

감정은 윤리적 장소다

후반부의 최종적인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막심은 솟아오른 사랑의 감정을 회피하려는 듯 갑작스럽게 짐을 챙겨 프랑수아가 오기 전에 별장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다프네가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책 한권을 막심에게 건넨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짧은 포옹과 키스를 나눈다. 입맞춤이 끝나면 다프네는 프레임을 퇴장해, 미세하게 떨리는 눈을 감고 문턱 앞에 선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을 지나쳐 다시 뒤돌아 막심을 바라본다. 화면은 이제 둘로 갈라진다. 다프네를 바라보는 막심의 숏과 막심을 바라보는 다프네의 또 다른 숏.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길지 않을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그들에겐 선택만이 남았다. 그대로 바라볼 것인가, 시선을 거둘 것인가. 나의 자리에 머물 것인가, 상대방의 자리로 침입할 것인가. 머지않아 다프네는 막심의 숏 안으로 다가가 그를 끌어안는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의 키스가 반복된다. 하나의 세계가 결정되고 다른 하나의 세계는 사라진다. 이 순간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손이 서로의 몸을 강하게 붙잡는다. 말을 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대신해 음악은 어느 때보다 고조된다. 이 간단한 장면의 표층에 감정을 둘러싼 영화의 기록이 응축되어 있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의 픽션이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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