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화려한 만큼 정직한 욕망에 대한 고백
2021-12-15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신의 손>, 파올로 소렌티노가 숨겨놓은 어린 시절의 퍼즐을 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페데리코 펠리니를 떠올렸다. 펠리니 영화의 자전적 성향을 <신의 손>은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 그 자체로 보인다.

이 영화의 시작부는 다소 기이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바라본 나폴리의 풍경이 나타난 이후, 카메라가 곧장 비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파트리치아(루이자 라니에리)의 모습이다. 버스를 기다리던 파트리치아는 다소 몽환적인 상황을 겪는다. 그녀가 경험하는 사건 때문에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의 가족들이 한데 모이지만, 그곳에서 파트리치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없다. 오직 파비에토만이 파트리치아가 어린 수도승을 만나서 두 시간이나 귀가가 늦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의 관전 포인트가 형성된다. <신의 손>은 훗날 감독으로 성장하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영화’이며, 욕망에 관한 자서전적인 고백서이기도 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영화는 주인공 스스로의 경험이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중심으로 극을 진행한다. 이러한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인물들이 뿌리는 행위의 결말을 추적하는 일이다. 다소 기괴하게 흩뿌려진 어린 시절의 기억을 영화 <신의 손>은 ‘여성의 육체’를 중심으로 뒤쫓고 있다.

시네마라는 이름의 민낯

자칫 반짝거릴 순간에 멈춘 카메라, 고통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아이의 마음은 오직 파트리치아 이모만을 향해 있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은 말 그대로 ‘아름답게’ 채색된다. 당시의 경험을 모두 사실이라고 이르기는 어렵지만, 심리적으로 진정성 있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는 있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기존 작업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크적 과잉이 이번에는 ‘회상’에서 드러났을 뿐이다. 운명과 가족, 스포츠와 영화, 잃어버린 환상과 사랑이 혼합되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의 톤이 급격하게 바뀐다. 주인공이 축구장에 들러 자신의 오랜 소망을 이룬 어느 날, 운명적 사건이 발생한다. 행복이라는 위태로운 가면을 벗긴 자리에 드러난 삶의 맨얼굴은 ‘시네마’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건 이전의 초과된 밝음과 달리 시네마는 그로테스크한 어두움의 기운을 마구 뿜어낸다.

지금부터 우리는 거짓말 혹은 거짓으로 치장된 미사여구 사이에서 급작스럽게 마주친 사건의 진짜 정체를 파헤치려고 한다. 과정의 생략이나 일부 과장이 더해지지만, 모든 일의 중심에는 지속적으로 ‘영화’가 자리하고 있다. 알려진 바, 소렌티노가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인 계기는 안토니오 카푸아노의 <폴베레 디 나폴리>(1998)의 작업에 참여한 이후부터다. 시나리오 공동작가로 일하면서 그는 영화계에 입문했다. <신의 손>에는 이와 관련된 장면들이 직접 등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인공의 꿈에는 여배우 율리아가 나타난다. 텅 빈 거리를 걷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나폴리 어느 천장에 ‘매달린’ 남자배우의 모습, 그리고 여배우의 환상적인 워킹이 드러내는 실체는 말 그대로 이중적이다. 어쩌면 카푸아노 감독과의 인연은 소렌티노에게 마라도나를 향한 열정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비견컨대 마라도나가 쾌락의 흥분을 선사했다면, 카푸아노는 인생의 쓴맛을 알려준 위인이었다. 파비에토 가족의 쾌활했던 시기가 하필이면 카푸아노를 만나면서 우울해진 것이 증거다. 만일 파비에토가 바라보는 성인의 표본이 마라도나에서 카푸아노로 바뀌었다고 언급한다면, 마찬가지로 그의 시선이 바라보는 목표가 바뀐 것도 그즈음에 이르러서다. 처음에 파트리치아만을 쳐다보던 그의 눈빛은 사건의 경험 이후 남작 부인을 향하고 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파트리치아 이모는 그사이에 병원에 입원했고,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주인공의 어린 시절도 끝이 났다.

생각해보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은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간혹 모피 코트를 걸친 젠틸레 부인 같은 괴짜가 섞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들이다. 대표적으로 어머니가 그렇다. 그녀는 항상 웃는다. 장난을 좋아하고, 가사 작업에도 완벽하다. 특히 손을 이용해 공중으로 오렌지를 돌리는 솜씨가 탁월하다. 그녀의 존재는 마치 마법과도 같다. 흡사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매혹적으로 빛을 낸다. 다음으로 파트리치아 이모가 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아름답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변을 배경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리던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때의 이미지는 모두가 염원하는 ‘꿈’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파트리치아의 얼굴은 이탈리아 영화사의 전설 ‘페데리코 펠리니’의 여인들이 보인 환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스로 발광하는 그녀를 통해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성의 전신을 끌어안는다. 그런 맥락에서 <신의 손>에 등장하는 여성의 육체는 마치 예술적 성장의 지표처럼 여겨진다. 그중 가장 기묘한 포인트를 남작 부인이 찍고 있다. 이 인물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다시 말해 성인이 된 파비에토의 첫 경험에 깊이 관여한다. 그녀가 소년에게 알려주는 행위의 과정은 몹시 물리적이지만, 의미만큼은 추상적이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는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 그토록 원했지만 다가가지 못한 욕망의 열쇠를 남작 부인은 주인공에게 전달한다. 해석하건대 이것은 장치로서의 시네마를 향한 감독의 고백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그는 카푸아노와의 첫 과정에서 느낀 혼란을 표현한다. 극의 후반부, 카푸아노와 나눈 긴 대화의 일부를 떠올린다. 공교롭게도 “멍청한 놈들만 로마에 간다”는 대사 이후에 주인공은 나폴리를 떠날 결심을 굳힌다. 요컨대 영화 <폴베레 디 나폴리>의 시나리오 작업은 소렌티노 감독에게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자 동시에 성장하기 위해 잊어야만 했던 추억의 핵심처럼 보인다.

검은 옷의 수도승이 의미하는 것

강박적으로 나열된 도취의 성향, 끊임없이 표현된 과잉의 연속, 모든 인물이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이루는 탓에 이 영화의 외피를 벗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퍼즐의 내부에는 다소 직설적인 비밀이 담겨 있다. 회상의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마지막 미스터리에 관해 생각한다. 로마로 출발하는 기차 안, 주인공은 선로에 선 ‘꼬마 수도승’을 발견한다. 이 인물의 모습은 처음에는 단지 파트리치아의 시야에만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비에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파트리치아 이모는 그를 가리켜 ‘불가능한 잉태’를 성공하게 만드는 부적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어쩌면 자기혐오를 피하려는 속물근성일 수도, 그저 공허한 미학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해석을 우리는 받아들이려 한다. 검은 옷의 수도승은 어쩌면 향후 파비에토가 만들게 될 창작력의 실체를 알리는 도상처럼 보인다. 소렌티노는 화려한 미장센의 외관에 직설적인 진심을 숨기는 연출자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화려한 만큼 정직하다는 점을 우리는 간파해냈다.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신의 손>의 고백은 이 실체를 알려준다. 소렌티노의 미학이 공허함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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