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현장에서는 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때론 지치고 힘들 때도 많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원하는 장면을 찍어냈을 때의 성취감이 모여 한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스틸 작가들이 현장에 상시 대기하면서 그 성취의 순간을 카메라로 담아 기록한다. 이번호에 소개하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 현장의 비하인드 컷은 2021년 한해 동안 관객과 시청자를 울리고 웃게 만들었던 작품이 어떤 노력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일종의 설계도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일기장 같기도 하다. 매년 영화 촬영 현장만 소개했던 터라 올해는 드라마 현장의 비하인드 컷도 수소문했다. 촬영 현장 비하인드 컷은 배우들이 현장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많은 비하인드 컷들이 독자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 한해를 빛낸 <자산어보> <랑종> <모가디슈> <구경이> <인질> <십개월의 미래> <술꾼도시여자들> <싱크홀> <빈센조> <마인> <인간실격> <세자매> <기적> 등 영화와 드라마 13편의 촬영 현장 비하인드 컷을 소개한다.
자산어보
사진 노주한 스틸 작가·글 이주현
천주교 탄압으로 옥에 갇힌 정약전(설경구), 정약종(최원영), 정약용(류승룡) 삼형제. “극중 상황은 심각하지만 세 배우가 나란히 칼을 차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재밌어서, 카메라 한번 봐달라 말씀드리고 사진을 찍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고, 한번 목에 칼을 차면 같은 자세로 긴 시간 앉아 있어야 했는데도 세분 모두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주한 스틸 작가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세 배우의 눈빛도 묘하게 달라 재밌다. <자산어보>로 첫 사극에 도전한 설경구, 우정출연으로 영화를 빛낸 류승룡과 최원영까지 관객의 마음을 훔친 죄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창대(변요한)는 지금 카메라 테스트 중. 본 촬영에 앞서 화이트보드에 적어둔 메모를 보고 스탭들은 의상, 소품 등을 최종 확인한다. <자산어보>는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의상 역시 색깔보다 질감이 더 중요했는데 노주한 작가는 “의상실장님은 물론 분장실장님까지 피부가 어떤 질감으로 표현될지 신경 쓰며 분장했다”라고 설명했다. 노주한 작가는 “흑백으로 사진작업을 하는 게 처음엔 톤 잡기도 어렵고 어색했는데 요즘은 흑백 모드로 사람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준다”라며 흑백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을 고백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학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끝내 능지처참당한다. <자산어보>에선 배우 김준한이 황사영을 연기했다. 사진에선 김준한이 손목과 발목에 밧줄을 묶은 채 멍석에 누워 있고, 이준익 감독이 배우의 머리 위에서 밧줄을 조심히 붙들고 있다. “배우의 안전을 위해 이준익 감독님이 직접 밧줄이 얼마나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확인하며 촬영했다.” 노주한 작가는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사도>에 이어 <자산어보>까지 이준익 감독의 현장을 다섯번 경험했다. 그때마다 이준익 감독의 “진정성”을 확인했다고.
랑종
사진 사시사쿨폰 스틸 작가·글 김성훈
<랑종>을 본 관객이라면 주인공 밍 가족이 키우던 강아지 럭키를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동물 학대로 보이는 장면을 두고 윤리적 재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현장에서 촬영하는 내내 럭키는 스탭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럭키의 실제 이름은 사부. 사진 속에서 사부를 안고 활짝 웃는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씨네21>과의 통화에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럭키가 밍 가족의 과거 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라며 “무서운 장면들이지만 촬영하는 내내 사부가 매우 영리하고 완벽하게 훈련돼 있어서 재미있었다. 관객이 우려하는 폭력적인 상황은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불교 국가에서 웬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릴까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밍이 크리스마스 퍼레이드에 참여해 즐기는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하지만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영화의 촬영지인 태국 이산 지역의 타래 마을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직접 보고 추가했다고 한다. 불교도가 90% 이상인 태국에서 타래 마을은 보기 드문 기독교 마을로, 매년 300대가 넘는 자동차가 크리스마스 카퍼레이드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밍을 연기한 배우 나릴야 군몽콘켓과 사진을 찍은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씨네21>과의 통화에서 “불교 국가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보니 문화가 풍부하고 이국적이라 시나리오에 추가했다”라며 “밍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설정은 영화의 메시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모가디슈
사진 김진영 스틸 작가·글 김성훈
‘모로코패션위크’ 런웨이가 아니다.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미국 기자를 찾아가 “유어 페이보릿 코리안 시가렛”을 외치며 북한쪽 정보를 캐내는 영화의 초반부 시장 시퀀스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프레임 밖은 곡물, 해산물, 낙타로 유명하고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평화로운 시장이다. 이석술 조감독은 “영화 속 시장은 공터 오픈세트에 채워넣은 공간이다. 미술팀이 물건을 실은 염소, 손님과 흥정하는 상인, 곡물, 해산물을 파는 상인 등 소말리아의 생활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느라 무척 고생했다”라며 “사진을 자세히 보면 조인성씨가 팔에 걸친 정장 상의에 미국 기자에게 줄 88담배 한 보루가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말끔한 옷차림이며, 광나는 선글라스며,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참 여유만만하다.
구경이
사진 유은미 스틸 작가·글 김현수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 하트 포즈를 취한 이영애 배우의 모습은 구경이라는 캐릭터 그 자체다. 용 국장(김해숙)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 구경이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저유조에 갇힌 <구경이> 9화의 장면을 촬영할 때 유은미 스틸 작가가 찍었다. “현장에서 스탭들을 항상 편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고 사진 찍을 때도 편하게 대해주셔서 소스를 많이 찍을 수 있었다”고.
현장에서 이영애 배우는 마치 경이가 케이(김혜준)를 대하듯, 어린 배우들을 살뜰하게 챙겼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배우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서 챙겨주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는 유은미 스틸 작가는 11화 중반부와 12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을 찍을 때 “이홍내 배우의 배철수 분장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걸 기념하며” 이홍내, 김혜준, 이영애 세 배우와 이정흠 감독(왼쪽부터)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보았다. “초반에 시청률이 잘 안 나와도 ‘괜찮다, 너무 만족한다’라며 응원해주시던 게 기억난다. 오랜만에 느낀 행복한 현장이었다.”
인질
사진 김진영 스틸 작가·글 김성훈
몸도 얼굴도 만신창이라 웃을 힘도 없어 보이는데 퉁퉁 부은 얼굴에 번진 미소가 묘하다. 영화 <인질>에서 황정민이 납치범의 눈을 따돌려 탈출했다가 다시 잡힌 장면을 찍을 때다. 한번 도망친 전적 때문에 밧줄 대신 쇠사슬로 몸을 꽁꽁 묶었다. 총 48회차 중에서 31회차 촬영이라 배우도 스탭도 많이 지친 상태라고 한다. 더군다나 6, 7월에 진행된 촬영이라 세트장이 한창 습할 때였다. 이야기 내내 온몸이 묶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친 상태인데도 배우 황정민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김진영 스틸 작가의 카메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준규 프로듀서는 “황정민 선배님은 <인질>을 찍는 내내 많이 웃으셨다. 묶여 있을 때도,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항상 웃으면서 현장을 이끌었다”라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B컷 스틸이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인데도 웃는 황정민 선배님이 대단하지 않나”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십개월의 미래
사진 남궁선 감독·글 김현수
미래(최성은)와 윤호(서영주)가 장바구니에서 나온 물건들로 장난치는 장면을 찍을 때 남궁선 감독이 직접 셔터를 눌렀다. 이들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는 암시를 주기 위한 소품 촬영용 컷이었다고. 두 사람의 좋았던 시절을 소품에 담아 오프닝 신에서 표현해보려 했으나 다른 버전으로 편집되면서 아쉽게 삭제됐다. “미래의 ‘비포 카오스’ 시절이다. 한달간 몰아치던 본 촬영의 아드레날린과는 다른, 인물들의 여유와 장난기가 보였던 날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촬영 내내 미래와 함께 혼란을 뚫고 작품을 낳는 마음으로 촬영했다는 남궁선 감독의 행복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담긴 컷이다.
술꾼도시여자들
사진 최석 스틸 작가·글 이주현
‘술방’, ‘먹방’의 신기원을 보여준 <술꾼도시여자들>의 세 주인공 한선화, 이선빈, 정은지(왼쪽부터)가 술병 대신 과자를 들었다. “이날은 감독님이 편의점에서 한턱 쏜 날이었는데, 먹고 싶은 거 다 고르란 말에 세 배우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최석 스틸 작가는 각자의 취향대로 고른 과자를 들고 인증숏을 찍으면서 즐거워하는 세 배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스틸 작가에게는 축복받은 현장”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예쁘고 멋진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맨날 취한 모습만 연기해야 해서 안타까웠지만(웃음), 망가진 모습도 개의치 말고 편하게 찍어 올리라고 해준 배우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싱크홀
사진 최창훈 스틸 작가·글 김성훈
새로 들어온 수중촬영 스탭인가. 잠수복을 입은 스탭 사이에서 맨몸으로 뜬 차승원의 표정이 여유만만하다. 그를 포함한 청운빌라 사람들이 부표를 타고 지하에서 탈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촬영 현장이다. 150여평 규모의 아쿠아 세트에서 만수 역할의 차승원은 부표에 매달린 채 물 밖으로 나오는 수중촬영을 대역 없이 직접 소화했다. 최창훈 스틸 작가는 “추가 촬영한 장면이다. 따뜻한 물로 가득 채운 아쿠아 세트가 깊어서 쉽지 않은 촬영이었는데도 차승원 선배가 하루 종일 수영하며 찍었다”고 설명했다.
빈센조
사진 이다래 스틸 작가·글 김현수
권력의 꼭대기를 정조준하는 금가 패밀리가 올 블랙 슈트를 차려입고 세운상가, 아니 금가프라자 앞을 걸어가는 장면을 찍을 때, 송중기 배우가 선창으로 “반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를 외치는 순간이다. “항상 웃음이 넘치는 현장이었다. 매일 출근할 때면 오늘은 누가 뭘로 웃길까 기대했다”라는 이다래 스틸 작가의 말처럼 촬영하면서 배우들끼리도 굉장히 친해졌고 대본 없이 애드리브를 하며 찍은 신도 많다고. 금가 패밀리의 찐친 모드가 드라마의 완성도를 좌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마인
사진 이다래 스틸 작가·글 김현수
내 것이란 무엇인가. 그들 각자의 ‘마인’을 찾아나서는 길고 처절했던 사투를 보면서 올 상반기가 아주 뜨거웠다. 이다래 스틸 작가는 극중 희수의 유산 장면을 촬영하던 날을 “이보영 배우가 엄청난 감정을 쏟아내는 신이어서 모든 스탭들이 다 같이 긴장했던” 날로 기억한다. 모니터를 보다가 같이 울음을 터뜨리는 스탭도 있었다고. 컷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평상시와 완전히 다른 감정을 쏟아내며 연기한 이보영 배우가 잠시 쉬던 순간을, 이다래 작가가 재빨리 포착했다.
인간실격
사진 유아라 스틸 작가·글 김현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딸 부정(전도연)의 모습을 찍기 위해 제작진이 평택의 한 폐병원에 모였다. 전도연 배우가 손선풍기 하나로 땀을 식히는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유아라 스틸 작가에 따르면, “하필 에어컨이 고장 나 모든 스탭들이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더웠던” 날의 기록이다. “촬영 전에는 엄청난 대사량 때문에 대체 언제 다 찍을지 의문이었는데 매 장면 대사 엔지가 거의 없이 한번에 찍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신기하고 색다른 현장이었다”고.
세자매
사진 박지현 스틸 작가·글 김현수
희숙, 미연, 미옥 세 자매가 끔찍했던 가족 모임에서 벗어나 바닷가에서 셀카를 찍는 마지막 장면을 찍던 날을 박지현 스틸 작가는 “겨울 바다가 몹시 추웠다”고 회상한다. 영화를 보면 계절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덜덜 떨 정도로 추운 순간을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이 대단했다”고. 그저 셋이 모여 셀카를 찍는 단순한 장면 같지만 장윤주, 문소리, 김선영 배우(왼쪽부터)가 지닌 각기 다른 연기 스타일을 찰나의 순간에 만끽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동선과 포즈의 디테일을 자세히 보면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기적
사진 전혜선 스틸 작가·글 이주현
“니 해봤나?” “함 해보까?” “제정신이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야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다가 생애 첫 뽀뽀를 시도하는 준경(박정민)과 라희(윤아)의 모습이다. “딱 보기에도 두 사람이 잘 어울리지 않나?” 전혜선 스틸 작가는 “두 배우의 성격이 잘 맞아 서먹서먹함 없이 뽀뽀 장면을 재밌게 살렸다”라면서 “윤아씨가 분위기를 잘 리드했고, 정민씨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디테일한 연기도 돋보였다”라고 회상했다. 쉽지 않은 경상북도 봉화 사투리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한 두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도, “왜 박정민과 윤아 두 배우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라고 했다. “<기적>의 현장은, 분위기도 영화를 닮고 배우도 영화 속 캐릭터를 빼닮은, 억지스러움이 없는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