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입니다.”
인터뷰 장소를 직접 의논하기를 원한 이영애가 전화 저쪽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뉘앙스가 강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고귀함, 현명함, 공명정대함, 불변성과 거기 불가피하게 따르는 보수성까지 한 세트의 가치가 따라다니는 무슨 상징 같은 이름. 윗사람의 딸을 높여 부르는 ‘영애’라는 말도 있지만 <막돼먹은 영애씨>(2007~19)라는 시리즈의 작명이 방증하듯 이영애는 아이콘적 속성이 강한 배우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가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공기가 변한다”는 감독과 스탭들의 경험담도 맥을 같이할 것이다. 단단한 팬덤과 시즌2에 대한 열렬한 요구 속에 12월12일 종영한 12부작 <구경이>를 돌아보는 이영애는, 그 이름이 부르는 연상 가운데 이제 ‘재미’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뻐하고 있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가 공백기 이전 이영애의 연장이었다면, <구경이>는 CF 외에 연기하는 이영애를 실시간으로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는 세대의 동시대 관객과 조우한 유의미한 작품이었다. “아들이 막 게임을 시작했는데 드라마에서 엄마가 게임을 하니까 신기한가봐요. 음악도 좋아하고요. 등급 때문에 전체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아들 친구들도 대사를 외우더라고요. 하지만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건욱 역의 이홍내 배우예요.”
배우는 뭔가를 행하는 액션뿐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작품의 재미와 의미를 창조한다. 특히 대중의 집단 기억 속에 페르소나의 역사가 저장된 이영애 같은 배우의 경우 이야기 정중앙에 떡하니 서는 것만으로 극중 세계의 날씨와 지형도에 영향을 준다. <구경이>의 이정흠 감독은 말한다. “이영애 배우의 기존 이미지와 구경이 캐릭터가 지닌 이미지의 간극에서 나오는 ‘기묘함’이 전체 톤을 크게 결정했다. 이 간극은 다른 배역을 캐스팅할 때도 기존 이미지를 비튼 실험적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편 성초이 작가는 “구경이가 저유조에 떨어져 고립돼 있는 9화는 이영애 배우가 출연하기로 한 다음에 쓴 에피소드다. 이영애의 ‘보게 만드는, 집중시키는 힘’이 없었다면 긴 시간 배우가 한곳에 갇혀 있는 설정을 밀어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들려주었다. 배우 이영애와 인터뷰만 해도 곧장 알 수 있는 노릇이지만 그는 본인이 연루된 프로젝트의 전모를 알고 싶어 한다. <친절한 금자씨>(2005) 공개 당시 작품을 온전히 감독의 성취로 단정하고 이영애의 기여를 제대로 보지 않는 기자들에게 다소 역정을 낸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우 인터뷰 기사에서 제작진과 가족 그리고 시청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은 당연하고 재미없어 생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경이>를 만들고 사랑해준 사람들에 대한 이영애의 인사말은 지울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그 말을 전하고 싶어 그가 인터뷰에 응했다는 사실이 문답을 주고받을수록 선명했기 때문이다.
- <구경이>는 이영애 배우에게 <내가 사는 이유>나 <대장금> <친절한 금자씨>가 그랬듯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기점이 될 만한 작품이라는 인상입니다.
= 저도 <구경이>는 유독 오래 앓았어요. 무엇보다 <구경이>에서의 제 모습이 제가 보기에 재미있었어요. 작가님들이 트위터에 올라온 반응과 팬아트를 보내주셔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젊은 시청자들도 이영애가 여태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눈빛과 표정을 저와 똑같이 재미있게 보고 있는 거예요.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트위터가 다른 소셜 미디어에 비해 진취적이고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진 20, 30대 유저가 제일 많은 플랫폼이라 더욱 반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 놀라기도 했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개성 있고 위트 있어서 재밌었어요. 제가 아주 큰 힘을 얻어서 <구경이>를 좋게 봐주신 시청자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웃음)
- 이정흠 감독이 연출자로 확정된 다음 이영애씨 출연이 결정됐다고 들었습니다. 몇 회차까지 대본을 읽고 결심하셨나요?
= 전회를 읽은 건 아니었고 대략 4회까지 읽고 전체적 시놉시스도 있었어요. 기존에 보아온 시나리오와 무척 달랐어요. 처음부터 영상으로 상상해서 대본을 썼달까, 편집을 미리 염두에 두고 썼달까. 그래서 전개 구조가 마치 독특한 만화의 플롯을 읽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좀 올드해진 건가, 아기 낳고 머리가 안 좋아졌나 의심이 들 정도로. (웃음) <대장금>처럼 대중적이지 않다는 점은 처음부터 알았는데 대중적인 것 말고 조금 뒤틀린, 마니아적 작품도 필요하잖아요. 욕심날 수밖에 없었어요.
- 스크립트만으로도 어떤 작품을 만들겠다는 비전이 뚜렷하다는 인상을 받으신 셈인데 이후에 제작진을 만나면서 신뢰감을 얻은 부분이 있나요?
= 올해 초 제가 살던 양평까지 감독님과 작가님이 찾아오셨어요. 출연을 확정하기 전에도 몇 차례 만났어요. 주변에서 이정흠 감독님과의 작업을 추천하는 말씀도 많이 들었지만 촬영에 들어간 후 사물을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른 분임을 알게 됐어요. 대본부터 기성과는 너무 달랐는데 감독님이 그 대본 이상으로 해내셨어요. 제가 궁금한 점을 물으면 감독님이 “여기는 이렇게 애니메이션으로 갈 거고 이 장면은 밑에서 집어올릴 거고” 하며 자세히 설명해주셨어요. 그런 디테일을 기어이 구현하는 걸 보고 이분 한국에만 있기 정말 아깝다 싶었고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안타까움까지 생겼어요. (웃음)
- 이번은 행복한 경우인데, 반대로 작품 결정할 때 적신호로 여기는 요소가 있다면요?
= 특별히는 없어요. 다만 감독님이 기본적으로 인간적 결이 바른 분이면 작품의 장르가 하드보일드여도, 주제가 거칠어도 결국 잘 다듬어져서 빛나는 것 같아요.
음악이 좋아, 음악이!
- 다시 생각해보면 <구경이>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구경이 리로디드’라고 할 수도 있어요. 보험조사관일로 가끔 생활비만 벌던 경이가 통영 실종 사건부터 케이/송이경(김혜준)의 존재를 감지하고 다시 적극적으로 깨어나는 스토리니까요. 경이가 은둔 생활까지 포기하며 이 사건에 열심히 매달리는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 감독님과 초반에 구경이는 어떤 인물일까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예를 들어 커피잔을 잡을 때 손가락은 어떻게 펼 것인가까지. 구경이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장금이와 달리 정의를 위해 싸우는 대단한 슈퍼우먼은 아니에요. 그냥 본인의 의심이 행동의 동기인 아주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의심 때문에 남편을 죽게 만들고 오랜 시간 자신도 괴로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 때문에 죽었지만 그래도 남편의 진실이 궁금하다”라고 말하잖아요.
- “죽을 거면 알려주고나 죽지”라고도 말했죠.
= 그러니 어떻게 보면 구경이는 좋은 사람일 수 없어요. 그럼에도 케이와의 결정적 차이는 죄지은 자를 우리 손으로 직접 단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 그런데 통영 사건부터 줄줄이 딸려나온 케이의 살인 행적이 오랜만에 그의 의심을 강하게 자극한 거군요.
= 구경이는 어쨌든 뛰어난 사람인 건 틀림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를 잡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터질 거라는 그만의 촉을 가졌던 거죠.
- 구경이는 레이어가 많고 일관성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경찰이었던 과거 장면에선 차분하고, 히키코모리 생활 중에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가 하면, 조사에 들어가면 능청스럽게 거짓말도 하고 다녀요. 말투도 일하지 않을 때는 웅얼거리다가 탐정 모드에 들어가면 또렷해지죠. 배우로서 어떻게 인물의 일관성을 살릴지 걱정되진 않았나요?
= 글쎄요. 1화의 경우 주인공 구경이에게 초점을 두고 그의 너무 많은 면을 보여줘서 시청자가 벅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널뛰듯 하니까요.
- 저는 고교생 이경이 교실에 있는 첫 장면이 구경이의 어린 시절인가 했어요.
= 그게 바로 이정흠 감독님이 원했던 바라고 해요. 저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다가 놀라기도 했어요. 그런데 구경이를 그리는 제 입장에서는 일일이 연결고리를 생각하며 수학 공식처럼 생각하다보면 연기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구경이>는 큰 틀로 보면 말이 안되는 요소가 많죠. 이경이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힘은 왜 센지. 그런데도 이 드라마가 이해와 호응을 얻을 수 있던 이유는 일 더하기 일이 삼도 될 수 있는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을 연출, 음악, 편집 등 복합적 요소가 충분히 납득되는 장르적 색깔로 채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아무래도 우리의 선장 입장이라 시청률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너무 재밌어서 그런 염려 마시라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이 위축될까봐. 진심이기도 했고요. 제가 <사임당, 빛의 일기>를 한 4년 전과 비교해봐도 해마다 변화가 크다는 걸 절감했어요. 기술도 기술이지만 OTT가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매체를 택하는 폭이 넓어졌고 젊은 층은 TV보다 OTT를 통해 시청하는 경향이 강해서 시청률에 우리가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작품성에 집중해서 만들고 젊은 층에 제 이름을 각인시키기만 해도 저로서는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목표를 잘 이뤘어요.
- 1화부터 구경이와 송이경을 거울상처럼 놓는 구도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대사가 호응하게 매치컷을 한다거나 같은 포즈의 숏을 붙인다거나. 중반 이후에는 데님 점프 슈트나 나비형 선글라스처럼 비슷한 의상과 소품을 두 사람이 착용하기도 했고요. 어찌 보면 서로의 과거와 미래 같기도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죄와 벌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사고하죠. 이경 역의 김혜준 배우와 함께 둘의 관계를 이야기해본 적 있나요?
= 일화가 하나 있어요. 제가 한양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다녔는데 <구경이>를 준비하면서 어려운 캐릭터이다보니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알았던 스승 최형인 교수님께 조언을 구했어요. 그랬더니 “누가 케이 역을 하게 됐냐”고 물으셔서 김혜준 배우라고 말씀드리니 혜준이도 어제 고민을 안고 왔다 갔다고 하시는 거예요. (웃음) 알고보니 혜준이가 선생님의 학부 제자였어요. 연락해서 보니 집도 가깝고 혼자 산다 해서 저희 집으로 초대해 밥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혜준이는 성정이 밝고 바르고 오로지 연기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어요. 한번은 저희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고 동대문에서 비즈를 사서 하나하나 꿰어 만들어왔더라고요. 혈액형 신봉자는 아니지만 저랑 감독님은 둘다 AB형이라 특이한 걸 좋아해서 이야기하다보면 막 산으로 가는데 A형 혜준이가 옆에서 잡아줘요. (웃음)
- 인물 연구를 함께한다기보다 함께 시간을 보냈군요.
= 김혜준씨도 고민이 많았죠. 케이 역은 연기의 신이 맡는다 해도 고민이 많을 역이니까요. 저는 별로 도울 수 있는 건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딴 건 몰라도 케이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만 했어요.
- 케이가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많죠. 초반에 자주 비교됐던 <킬링 이브>의 요원 이브(샌드라 오)와 연쇄 살인자 빌라넬(조디 코머)의 관계에는 섹슈얼한 측면이 중요한 반면 케이와 구경이에게는 케이의 이모(배해선)와 구경이의 후배 나제희(곽선영)라는 여성 캐릭터도 곁에 있고, 관계의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 작가님들이 캐릭터 이름도 구경이, 송이경 이렇게 어찌보면 데칼코마니처럼 지어놓았잖아요. 연기를 하면서 서로를 참고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결국 유사한 점이 많이 드러났고 팬들이 둘이 은근히 서로 닮아간다고 만들어주신 영상도 있었어요.
- 스크립트부터 시각화가 준비된 작품이라고 하셨지만 편집과 음악, 그래픽이 들어간 결과물을 보고 가장 놀란 장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1화 오프닝부터요. 처음부터 인트로 음악이 너무 멋있잖아요. 대본을 받고 제작사 대표님과 식사하면서도 제가 <대장금>처럼 음악이 30%는 차지할 작품이라고 했었거든요. <대장금>도 음악이 정말 좋잖아요? <구경이>도 음악이 전체 흐름을 좌우할 만큼 좋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첫회 도입부에서 애니메이션과 결합해 음악이 한번에 힘을 딱 불어넣는 걸 보며 깜짝 놀랐어요.
- 방영 시작 전에는 음악을 안 들어보셨어요?
= 음악 나오면 먼저 달라고 부탁해 들어보긴 했죠. 저는 새 인물을 맡으면 어울리는 음악부터 찾거든요. 시나 그림에서도 도움을 얻지만요. <구경이>의 경우는 아주 헤비하지 않은 록, 퓨전 록을 많이 들었어요.
- 첫 사건에서 실종된 남성의 아내 윤재영(박예영)을 대하는 구경이의 태도가 흥미로웠어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라고 재영이 폭발하자 “내가 왜 알아야 하지?”라고 반문하는 구경이는, 나는 탐정이지 유모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았어요.
= 그게 구경이의 매력인 것 같아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장금이와 금자 사이라고. (웃음)
-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BBC의 <셜록>을 보면 셜록 홈스가 추리를 할 때 ‘마인드 팰리스’라고 하는 머릿속 공간이 등장해요. <구경이>도 구경이가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거나 과거를 불러내 제3자 위치에서 관찰하는 장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현실을 특수한 방식으로 인식하는 사람인가 싶기도 했어요.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는가 하면, 과거를 현재화하기도 하고, 여러 타임라인과 여러 레벨의 리얼리티에서 살 수 있는 인물인가 싶었어요.
= 그런 편집과 연출이 구경이를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플래시백으로 그냥 왔다갔다 했다면 “뭐지?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여자네”에서 그쳤을 텐데 연출의 힘으로 한번 더 보게 하는 깊이가 생긴 것 같아요. 결국 캐릭터는 배우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거죠. 모든 스탭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 2화 말미에 연쇄살인의 경과를 기다란 무대에서 연극적으로 요약하는 연출을 보고 이 드라마가 정말 야심 있구나 확신했는데요.
= 세트장에 만들어진 무대였어요. 감독님이 연극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말씀만 했는데 가서 보고 놀랐고 이후로 오늘은 또 뭐가 있으려나 촬영장 가는 길이 설레고 즐거워졌어요.
“의심스러운데?”는 구경이식 아이돌 인사
- 저는 서장금 하면 뭔가 깨닫고 대궐 안을 뛰어다니던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나고 <나를 찾아줘>의 정연 하면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은 동작이 떠올라요. 캐릭터의 자세와 무게중심 같은 ‘태’는 어떻게 찾아가시나요?
= 예를 들어 구경이가 1화에서 게임에 몰입할 때 어떤 자세가 좋을지 감독님과 상의했어요. 결국 모니터로 들어갈 듯이 앞으로 숙인 자세로 연기했는데, 게임에 조예가 깊은 김가연 배우에 의하면 진짜 게임의 신들은 상체를 뒤로 여유롭게 젖히고 마우스 잡은 손만 민첩하게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자세와 동작은 아무리 집에서 이렇게 해야지 하고 궁리해 가더라도 현장 공기를 접하고 의상을 입고 상대역과 마주 서면 또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 구경이는 한때 경찰이었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산 시간도 길었죠. 추격과 액션 장면에서 어느 정도의 운동력과 민첩함을 가졌다고 설정했나요? 제가 본 바로는 훈련했던 기억이 몸에 남아 있어서 순간적으로 날렵할 때도 있는데 착지라든가 마무리가 어설프던데요.
= 보는 분들이 이영애가 20대 아닌 걸 알기도 하고, 그래야 리얼리티가 살 것 같았어요. 제게 베스트 액션 신은 구경이와 송이경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한강 컨테이너 시퀀스인데 경찰로서 기본기는 있지만 예전 같진 않은 구경이의 어중간함에 맞는 액션이었어요. 대역 액션배우가 연기할 때면 제가 옆에서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티나니까 살살하세요” 하기도 하고. (웃음) 경이 허리가 안 좋은 건 지문에 있었는데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리는 현장에서 덧붙였어요. 촬영 끝나고 다시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하긴 했습니다.
- 중반 이후 구경이는 주로 오버핏 외투에 원색 트레이닝 팬츠를 입어요. 옷이 만드는 움직임의 실루엣이 인물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 같아요.
= 트렌치코트는 원래 기본 설정이었고 어떤 바지를 입느냐는 미정이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여러 옷을 고민하다 결국 트레이닝복에 올인했어요. 집에만 박혀 있었으니 과거 남편이 입었던 옷을 포함해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헐렁하고 편한 옷을 입을 거라는 상상 때문이었어요. 대신 디테일을 잘 보는 분들만 아시겠지만 양념이 될 만한 독특한 프린트 티셔츠들이 있었죠. 평범하지만 평범치 않은 우리만의 메시지들도 거기 숨어 있어요. 마지막에 특별출연 이영애가 나오기 전에 구경이가 입었던 옷에는 산타 프린트도 있었어요.
- 12화에서 이영애로서 특별출연한다는 아이디어에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 드라마 후반부 촬영할 때 감독님이 살짝 귀띔해주셔서 알게 되었어요. 그야말로 신박하고 <구경이>다워서 쾌재를 불렀죠. 나중에 본방에서 보니 이영애가 등장할 때 뒷배경도 숲으로 바뀌고 ‘특별출연 이영애’ 자막까지 들어가서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재미나고 짜릿했어요. 그렇게 12화의 막이 내리고 그날 밤 허전함과 여운으로 잠을 설쳤죠.
- 9화에서는 주인공 구경이가 거의 내내 저유조(대량의 석유를 저장하는 탱크.-편집자) 바닥에 갇혀서 혼자 고립돼 있어요. 굉장히 용감한 연출이라고 생각했어요. 대본 봤을 때부터 찍기 힘들겠다 싶었던 에피소드인가요?
= 일단 저유조가 뭔지 몰라서 검색해야 했어요. (웃음) 이런 데가 어디 있나 했더니 상암동에 있다고 해서 외부는 그곳에서 찍었어요. 세트장에 만든 저유조 바닥에 소품 쓰레기가 많아서 냄새가 많이 났거든요. 이건 일화인데 제가 집에 오면 아내고 엄마잖아요. 지저분한 꼴로 들어오면 아이들이나 남편이 놀라고 걱정할까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이영애로 돌아온 다음 귀가했어요. 이번 작품이 워낙 힘들고 촬영도 길어서 캠핑카를 이용했는데 그곳에서 핏자국 분장도 제대로 닦고 머리도 빗고 “엄마 왔다!” 하며 집에 들어섰죠.
- 성초이 작가님에 의하면 저유조 장면은 이영애씨 출연이 확정된 다음에 썼다고 합니다. 배우가 시청자의 주의를 붙들어주지 못하면 버틸 수 없는 신이라서요. 그린 스크린도 쓰셨나요?
= 네. 저유조 내부는 세트를 지었고 그린 스크린도 있었어요. “할리우드네” 했다니까요? 그런데 결과물은 할리우드 드라마보다 잘 나온 것 같아요. <구경이>가 한주 결방한 이유도 저유조 신 후반작업 완성도를 위해서였어요. 고담(김수로)이 연 로봇 시연회에 나온 로봇들도 전부 그래픽이에요. 대단해서 입이 벌어지는 것들이 많았어요.
- 그런데 9화는 기술 말고 연기적으로도 어렵지 않았나요? 구경이는 저유조 바닥에서 내가 여기를 벗어나 기를 쓰고 살아갈 이유가 있나 고민하잖아요.
= 저유조 바닥에서 존재의 이유를 물은 다음 스카프를 던지면서 묵묵히 벽을 타고 올라가는 구경이를 보고 트위터의 어떤 분은 울었다고 쓰셨더라고요.
- 절대 혼동할 수 없는 음색의 소유자입니다. 배역에 따라 발성에 변화를 주시나요? 가령 <구경이>에서는 “의심스러운데?”를 어떤 톤으로 말할지를 포함해 어떤 고민을 하셨어요?
= 평소 제 목소리 톤이 얇은데 20대 때는 말의 속도도 빨랐어요. 그러다가 경험이 쌓이면서 톤을 조절하고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어요. <사임당, 빛의 일기>처럼 사극을 할 때는 더 낮추기도 하고 <나를 찾아줘>에서는 조금 더 우울하고 깊은 소리를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구경이는 목소리 톤도 여러 가지잖아요. 회차가 늘어가면서 구경이 톤에 익숙해졌고 집에서도 종종 저와 남편이 “어, 방금 구경이였다”라고 하기도 했어요. “의심스러운데?”는 아이돌의 인사처럼 구경이만의 시그니처가 됐으면 좋겠다고 작가님과 이야기하며 여러 시도를 했어요. 그리고 구경이는 혼잣말을 많이 하잖아요. 히키코모리 시기에는 발음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웅얼거리다가 구경이의 본능으로 돌아올 때는 딕션도 눈빛도 또렷해지죠.
- <친절한 금자씨>, 단편 <아랫집> 그리고 <구경이>를 보면서 이영애씨의 정면 클로즈업이 일반적인 클로즈업이 갖는 공통적 효과 이상의 어떤 힘이 있어서 이렇게 자주 쓰이는 걸까 생각하게 됐는데요.
= <구경이>만 보자면 워낙 카메라 보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많아 일단 인상을 좀 강하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구경이가 셜록처럼 자기만의 ‘생각의 방’으로 들어갈 때 스위치가 딱 켜지는 거죠. 카메라를 정면 주시하는 얼굴이 시청자를 집중시키고 화두를 던지고 뜻을 소통하는 모티브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 확실히 정면 숏이 나올 때마다 공기가 환기되면서 제가 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네요. 메시지를 쏘아 보내는 기분으로 카메라를 봤나요?
= 네, 네. 카메라를 향해 마술을 걸었죠. 유리 겔러처럼! (웃음)
- 구경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걸어다니면 사람들이 피하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결국은 나제희, 산타, 오경수에게 둘러싸이게 됩니다. 혼자 연행되어가는 이경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이 12화를 통틀어 그가 제일 딱해 보이는 순간입니다. 어떤 면이 사람들로 하여금 제멋대로인 구경이를 돌보게 드는 걸까요?
= 구경이는 무심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주변을 끌어안을 수 있어요. 제희에게도 말도 안되는 심한 말을 던지다가도 문득 스카프를 던져주며 밀당을 하잖아요. 그리고 산타의 과거를 끝내 알 수 없는데도 그대로 끌어안아요. 그런 반전이 있다는 걸 주변 사람들도 느끼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도 한 팀을 연기한 곽선영, 백성철, 조현철 배우는 물론 모든 동료 배우들 덕택에 잘 마칠 수 있었어요.
- 산타에 대한 결단은 구경이의 성장인 것 같았어요. 의심하는 바를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서 모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변화. <구경이>에서 케이가 벌하는 가해자들은 거의 다 남성이고 죄의 내용도 우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서 보게 되는 젠더 권력에 기초한 예가 많습니다. 여성주의 서사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겠다는 염려는 없으셨나요?
= 전혀요. <구경이>의 주연이 남자였다면 이런 반응이 있었을까 싶어요. 그런 면보다 소재가 풍부해졌구나, 따라서 전에 없던 재미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어요.
- 전작 중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까운 드라마는 있었지만 <구경이>가 장르적으로 코미디 성격이 제일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평소 코미디 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나요?
= 코미디 연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어요. 그런데 전작인 <나를 찾아줘>와 <아랫집>이 어두운 분위기가 있기도 해서 이번에는 재미있는 걸 무척 해보고 싶었어요.
당장 다음달이라도 새 작품을
- 과거 인터뷰를 보면 돌아올 자리를 다지기 위해 30대까지 무리해서라도 열심히 일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일찍부터 어렴풋이 결혼이나 다른 이유로 공백기를 가질 것이고 반드시 컴백해 연기를 재개할 거라는 것까지 예상하신 건가요?
=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주변에서 (여자배우가) 결혼하고 나면 돌아오기도 힘들고 복귀해도 예전보다 역할 폭이 좁아지는 모습을 봤나봐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요. 나름 열심히 살아온 자부심은 있어요. 20대, 30대에도 멜로드라마만 하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를 많이 경험했거든요. 일단 열심히 해서 뿌리를 깊게 내리면 언젠가 다시 와도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했을 때 샬럿 램플링 배우(<45년 후> <베네데타> <듄>)가 심사위원장이셨거든요. 대화할 시간이 나서 그런 고민을 같이 나눈 적 있어요. 샬럿 램플링은 하루에 여러 편 영화를 보면서도 꼿꼿한 자세가 변함없어서 인상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부친이 군인이고 육상 금메달리스트여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습관을 배웠다고 하셨어요. 롤 모델이 한분 생겼구나 싶었죠. 올해도 신작이 개봉했더라고요.
- 연기를 평생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분명했나요?
= 제가 연기를 너무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후 생활에도 감사해요. <구경이>에서는 결혼 전에 없던 제 눈빛을 볼 수 있었어요. 저만 알 수 있는 눈빛일 수도 있지만요. 배우란 결국 인간을 그리는 일이고, 자신의 눈빛과 손짓, 분위기를 통해 살아온 길을 보여주는 건데 결혼하고 출산하고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제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공백기가 진짜 공백기가 아닌 거 같아요.
- 일할 때 평상심을 유지하는 루틴이 있나요?
= 아이들이 2살부터 7살까지 전원생활을 했는데 제게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요즘도 가끔 가서 채소도 키우고 자연에 많이 의지해요. 촬영 중에는 혼자 음악을 듣거나 계속 걸어다니면서 다스려요.
- 2017년부터 연기를 재개하셨는데 제안받는 작품에 유형이 있다면요?
= 여성 서사도 많고 트렌드는 확실히 있어요. 이제 저는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하게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 아주 오래전부터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고 후원도 해오신 걸로 압니다. 자식이 생기면 한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의 범위도 달라질 것 같은데,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살며 아이들이 살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 정말 지구의 안녕이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다 끌어모아 드리는 제 기도 제목이에요. 등교가 불규칙해진 아이들이 걱정되지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죠. 그렇다고 제가 집에만 있으면 싸움만 하고. (웃음) 살길 찾아야죠, 엄마도! 이제 아이들도 자라서 엄마가 일하는 걸 좋아해요. 일을 지지해주는 가족에게 새삼 큰 감사를 느꼈어요. 그러니 많은 작품을 제안해주십사 널리널리 알려주세요. (웃음) 제의받은 작품이 있지만 저는 다음달이라도 빨리 들어갔으면 좋겠거든요. 요즘은 사전 제작도 많고 주간 노동시간 제한도 있어서 12부작도 6개월 가까이 걸렸어요. 그래서 인내심을 키워야겠더라고요.
- <구경이>를 마쳤으니 쉬고 싶다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 음, 제가 너무 많이 쉬었잖아요? 20대에는 1년에 세편도 하고 막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