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드라이브 마이 카' 박유림, 우울과 자기 의심이 한번에 뒤집히고 용감해지는 마음
2022-01-13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WHO ARE YOU

2020년 초겨울, 박유림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호출을 받고서 들뜬 마음으로 그의 전작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감독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철저히 암기하고 나간 자리에서 상대는 태연스럽게 “지금까지 무얼하며 살았는지 말해달라”고 질문했고 배우는 오히려 크게 당황하고 만다. 이후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한 대목까지 소리내어 읽은 뒤 첫 만남은 마무리됐다. 두 번째 만남에서 박유림은 같은 대목을 수어로 연기했고, 이 경험은 나중에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유나(박유림)가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첫 대면하는 오디션 장면으로 이어진다. 당시 그의 나이 28살.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오디션을 준비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던 때에 “우울과 자기 의심이 한번에 뒤집히고 용감해지는 마음”이 그녀 안에서 급격히 일렁였다. 배우가 자신의 강한 에고를 최대치로 비워내길 주문하는 하마구치의 연기지도법은 아직 행인을 허락하지 않은 설원처럼 신비하게 반짝이는 이 배우의 한가운데를 느리고 조심스럽게 가로질렀다.

수어 연기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아쉽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지점이다. 평소에도 나는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수어사용자에겐 표정도 무척 중요한데,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유나는 귀로 들을 수 있고 후천적인 성대 문제로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이라 감독님은 표정을 쓰는 방식도 나답게 편안한 쪽으로 디자인했다. 내가 수어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율동처럼 보인다고 감독님이 말해주었을 때 기뻤다.

하얀 카디건 첫 오디션을 볼 때 입었던 하얀 카디건을 영화 속 오디션 장면에서도 그대로 입었다. 뒤로 넘겨 하나로 질끈 묶은 헤어스타일도 평소 내 모습이다. 감독님은 왠지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꿰뚫어보실 것 같다는 묘한 믿음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자유 극중 제니스(소니아 유안)와 유나가 공원에서 리허설할 때 가후쿠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일어났다”라고 하는 장면은 내게도 특별하다. 아무것도 의도하거나 준비하지 않은 채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충동’이란 걸 느꼈다. ‘상대의 머리칼을 넘겨주고 싶다, 웃게 해주고 싶으니 나뭇잎을 주워 쥐어주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불쑥 떠오르는 감정과 액션을 이어갔다.

유림과 유나 유림이 유나인지 유나가 유림인지 점점 경계가 모호해지고 서로에게 점점 다가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이게 뭐지?’ 하고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 무렵 감독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데 감독님이 “유림은 유나가 아니고, 유나를 연기하는 유림일 뿐이에요”라고 해주셔서 깜짝 놀랐다.

수영과 발레 표현하기를 갈구하면서도 스스로 자꾸만 절제하려는 버릇이 있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은 나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그런 나를 생각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운동이 수영이었는데 코로나19 이후에 수영장을 가지 못해서 많이 울었다. (웃음) 그리고 이제 시작한 지 2개월 된 발레는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버티고 단련할 때에 생기는 또 다른 행복감을 준다.

필름 사진 필름으로 사진 찍는 것에 관심 있다. 필름을 끼우고 찍고 맡기고 기다리는 모든 행위가 좋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뷰파인더 안에서 다시 보고 각도를 고쳐 잡는 일도.

서울 떠나기 프로젝트 인스타그램에 적어둔 문구처럼 낯선 사람들 속에서 혼자 조용히 여행하고 숨어 있는 시간이 내게는 늘 절실하다. 제주도를 좋아하는데 그래서 지난해에 운전면허도 땄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진대연, 안휘태 배우가 단체 메시지방에서 소식을 전해듣고 “너 정말 ‘드라이브 마이 카’구나?”라고 호응해주더라. (웃음)

소냐의 말 오디션을 보는 일에 지친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일이란 참 어려워서, 오디션이 점점 두렵고 힘든 일로 여겨진다는 게 스스로도 괴로웠다. 그 시기엔 알맹이 없이 그저 힘내라는 말이 더 힘겨웠다. 그런데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는 소냐의 대사는 앞으로도 그대로일 고통과 눈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함께 견디자고 말해주어서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안미옥 시인의 시 <생일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 구절,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에서 소냐와 유나, 그리고 나를 떠올렸다. 2022년엔 그 말을 곱씹으면서 열심히 해볼 작정이다.

Filmography

영화 2021 <드라이브 마이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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