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가 카메라 시대에 던지는 의문
2022-01-2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가장 영화적인 얼굴의 오늘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배우의 얼굴은 영화를 위한 작은 장소다. 클로즈업된 얼굴에는 그 자체로 영화적인 힘이 내장되어 있다. 프랑스를 연기한 레아 세두의 얼굴은 영화적인 동시에 영화적인 것을 무너뜨린다.

브루노 뒤몽이 현재로 돌아왔다. <까미유 끌로델> <잔 다르크> 등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시대극과 어딘가 현실에서 한발 물러난 영화를 만들어오던 뒤몽은 미디어에 둘러싸인 인물의 삶을 조망하는 <프랑스>를 통해 완전한 현재에 뛰어든다. <프랑스>의 도입부는 마치 현재를 재정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너무 평범해서 도리어 이상한 첫 장면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스타 방송인 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두)에게 사람들이 몰려든다. 카메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놓여 있다. 잠시 후 무리를 등지고 카메라쪽으로 걸어와 카메라 앞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프랑스는 이어폰을 통해 아들과 통화한 뒤 무리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통화 내용도, 레아 세두의 패션이나 캐릭터의 명성도 아니다. 방금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를 정확히 의식하고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고정된 카메라에 동선을 맞추는 것은 카메라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초기 영화에서나 필요했던 움직임이다. 초기 영화는 무대극처럼 카메라를 고정한 채 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움직임은 인물에게서 나왔다. 대사 표현마저 제한된 무성영화 시기 배우의 과장된 표정 연기는 이동의 한계를 표현하는 동시에 한계로부터의 탈피를 염원하는 가장 강력한 움직임이었다. 카메라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오늘날에는 굳이 부자연스러운 동선을 만들면서 배우를 이동시킬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앞서 서술한 프랑스의 통화 장면은 흐름상 빼도 무방하다. 그러나 영화는 굳이 배우를 이동시킨다. 여기에 카메라가 놓여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중임을 주지시키듯이 말이다.

물론 인물이 카메라를 인식해 연기하는 순간조차, 배우가 완전히 극 바깥으로 빠져나와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를 의식하고 연기하는 일은 배우 레아 세두의 것만이 아니라 캐릭터 프랑스의 일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무수한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가 보고 있는 영상 역시 그중 하나다. 프랑스의 동선은 영화 속 인물이 연기한다는 당연한 사실뿐 아니라, 카메라 역시 하나의 캐릭터로 연기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우리가 보는 영화도 비판적인 미디어 환경으로부터 중립적 위치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는 카메라가 하나의 캐릭터임을 보여주는 좀더 노골적인 장면을 통해 보충된다. 프랑스는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샤를(엠마누엘 아리올리)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샤를의 첫 등장은 이상하다. 설산을 배경으로 운동하는 사람들 곁에서 프랑스는 거의 춤을 추듯 몸을 흔들고 있는데, 어쩐지 한쪽에 고정된 채 놓여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그쪽으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프랑스와 카메라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화면 앞으로 불쑥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프랑스를 끌어당겨준다. 샤를은 마치 카메라 뒤의 숨은 존재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출연한 것처럼 보인다. 샤를만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프랑스가 누군지 모르는, 실은 모른 척하는 인물이다. 정체를 숨기고 프랑스에게 접근한 샤를의 상태는 카메라 뒤에서 자신을 숨겨야 하는 스탭과도 통한다. 샤를이 영화 스탭을 상징하는 인물임을 염두에 둘 때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위선적인 인물로 표현된 점이다. 그는 프랑스를 취재하기 위해 요양원에 잠입했을 뿐만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접근해 그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에게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샤를은 프랑스에게 정체를 들킨 뒤에도 마치 유령처럼 프랑스 곁을 배회한다. 프랑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샤를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환영인가’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표현 그대로 샤를은 마치 유령처럼 영화 주변부를 맴돈다. 주인공을 떠나지 않는 스탭의 카메라처럼 그는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고 있으며, 그 곁을 떠날 수 없다.

셀카와 드라이빙숏

<프랑스>가 미디어에 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면서도 스스로 그 일부임을 노출하는 까닭은 단순히 새삼스러운 자기반성의 발로라고 볼 수만은 없다. 오늘날 카메라로 무언가를 촬영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재성의 지표다. 미디어를 둘러싼 현상을 영화에 담는 한,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처럼 열악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 레오스 카락스가 <아네트>를 통해 일상에 만연한 현실 지표들을 영화 안에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브루노 뒤몽 역시 미디어를 둘러싼 현실 속에 기꺼이 몸을 굴린다.

<프랑스>에서 두드러지는 현재성의 항목은 셀카다. 프랑스가 시민으로부터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는 상황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묘사되는데, 이는 단지 유명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리얼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는 굳이 보여주지 않은, 스타와의 셀카 사진이 가진 물질성을 상상하는 일이다. 셀카를 찍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얼굴 앞으로 손을 뻗어 배경에 있는 셀럽과 자신의 얼굴을 한 화면에 나오도록 한다. 셀럽과의 셀카 사진이 주는 느낌은 비현실적인 풍경 위에 자신을 얼굴을 얹는 방식의 관광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이미지가 마치 합성사진과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스타와의 셀카가 지녀야 할 기본 요건이다.

스타와 찍은 셀카의 속성이 인물과 배경(스타) 사이 유리된 감각이라 요약한다면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조악한 합성 기술을 노출하는 것은 셀카의 감각을 영화적으로 전이하고 확장하는 실험처럼 보인다. 초반 기자회견 장면 중 마크롱 대통령이 등장하는 부분은 아카이브 푸티지로,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대화를 실시간 대화로 합성한 결과물이다. 브루노 뒤몽은 푸티지와 현재의 결합을 이음매 없이 말끔하게 잇는 대신 접합 지점의 어색함을 일부러 강조한다. 질문하는 프랑스의 뒷모습과 질문을 듣는 마크롱의 정면 얼굴을 함께 맞물려 보여주는 숏에서 거리상으로는 카메라에서 먼 마크롱의 얼굴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한눈에 봐도 어색한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은 마치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와 스크린 앞에 선 관객의 대화처럼 보인다. 마크롱이 답변하는 중에도 프랑스와 루(블랑슈 가르댕)가 눈짓과 표정을 동원해 딴짓을 하는 것 역시 그 질의응답이 실제가 아님을 표시하는 것 같다.

브루노 뒤몽은 드라이빙숏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의 의도된 오류를 새긴다. 프랑스가 지중해에서 작은 배를 나눠 타고 탈출하는 난민을 취재한 영상이 방송되던 중, 영상을 두고 프랑스와 루가 나누던 사담이 그대로 외부에 송출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들의 대화는 개인의 부도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일지라도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한, TV 속 허구처럼 인식될 뿐임을 보여준다. 회사 앞으로 몰려와 항의하는 사람들을 피해 겨우 빠져나온 프랑스와 루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눌 때, 이들 배경으로 에펠탑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진다. 그러던 중 같은 구도 안에서 컷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배경 이미지가 점프해 다른 풍경으로 뒤바뀐다. 인물이 탄 자동차에서 촬영된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불가능한 오류다. 이것이 실제 촬영된 이미지인지 합성한 영상 이미지인지는 <프랑스>처럼 연출자가 일부러 빈틈을 노출하지 않는 한 사실상 구분해내기 어렵다.

영화 속에서 기술적 오류를 노출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영화가 보여준 매체 비판적인 성격과 맞물린다. 프랑스의 취재 방식은 현장과 스튜디오를 넘나드는 것이고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곧 그의 개성이다. 스튜디오 안에서 짙은 메이크업과 화려한 의상을 입은 깔끔한 진행자의 모습과 현장 취재 장면에서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은 캐주얼한 차림은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프랑스는 스튜디오에서 깔끔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앵커이자 위험 지역을 직접 방문해 현장 리포팅을 전하는 기자다. 스튜디오의 프랑스는 취재 영상 속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스스로 유리된다. 현장에서 프랑스의 취재 방식은 냉정하게 말해 셀럽과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처럼, 전쟁이 일어나는 현장을 방문해 셀카를 찍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함께 현장에 투입된 촬영 기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자신을 찍으라는 것이다. 토크 프로그램에 패널로 초대된 프랑스는 ‘왜 늘 본인의 얼굴 위주로 영상을 찍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주관적인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나쁘게 말하면 사건 현장을 주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현장 PD로 카메라맨에게 찍어야 할 것을 지시할 뿐 아니라, 원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현지인에게 동선을 주고 상황을 연출한다. 전쟁 중인 위험한 상황마저 통제해온 프랑스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티스트(자와드 젬마르)가 탄 오토바이를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낸 이후부터다. 드라이빙숏의 배경 이미지에 불과하던 풍경이 자신에 의해 피해 입은 사람이라는 실제가 되어 당도했을 때, 프랑스는 당황한다.

영화가 기술적 오류를 노출하는 다른 이유는 과거에 통용되었던 영화적 기술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감독은 온갖 이미지들이 부유하는 오늘날 영화적인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일종의 후퇴를 감행한다. 이미지를 재생하는 방식을 사용한 드라이빙 시퀀스는 영화 속 고전적 트릭과 닿아 있다. 고전영화에서 드라이브 장면은 실제 자동차의 이동을 보여주는 대신 배경 이미지의 움직임을 통해 자동차가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내곤 했다. 움직이는 이미지가 곁에 놓인 고정된 사물에 움직임을 만드는 셈이다. 영화가 운전 중인 차를 후면에서 잡을 때, 배경과 차에 탄 인물의 실루엣만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면서 인물과 배경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미지 속에서 자동차는 일종의 축소된 영화관처럼 보인다.

드라이빙 시퀀스가 대부분 자동차 내부와 외부 풍경 사이 분리된 감각을 보여주었음을 염두에 둘 때, 프랑스의 남편 프레드(뱅자맹 비올레)와 아들의 자동차 사고 장면은 예외적이다. 두 사람이 탄 차가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장면은 실제의 사운드가 제거된 채 음악이 덧씌워져 있으며 슬로모션으로 실제 속도를 왜곡해 보여준다. 영화는 사고의 순간과 경과를 자세하게 보여주지만, 이 사고는 실감난다거나 슬프지 않고 다만 갑작스러울 뿐이다. 이 장면이 묘사되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잔혹하게도 죽음을 앞둔 순간만이 풍경과 내부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움직이는 강렬한 순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 순간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풍경과 내부의 분리는 비판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계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얼굴의 골상학 다시 쓰기

<프랑스>는 무엇보다 얼굴의 영화다. 이때 얼굴은 머리를 포함한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레아 세두의 얼굴과 표정은 ‘미디어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방식의 단순한 정리를 중단하도록 강제한다. <프랑스>가 얼굴에 탐닉하는 방식은 머리의 얼굴성을 탐구한 장 뤽 고다르의 몇몇 영화에 닿아 있다.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는 아나 카리나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어떤 사전 설명이 배제된 상태에서 아나 카리나의 두상이 정면, 측면, 뒷모습으로 분화되어 나타날 때, 이러한 방식의 얼굴 몽타주는 즉각 ‘영화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후에 이 이미지는 경찰 수사용 머그숏의 일종이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영화적이라고 인식되는 것에 대한 배반과 풍자인가. 혹은 머그숏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인가. 후자를 긍정한다면 영화적인 것은 아나 카리나의 얼굴에서 비롯된 것인가, 연출 방식에서 오는가. 아니면 장면에 흐르는 음악의 힘일까.

<프랑스>에서 레아 세두의 얼굴 클로즈업숏이 수사용 머그숏으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나, 그보다 더 가혹한 데가 있다. 레아 세두의 얼굴이 포토제닉한 것과는 무관하게 어느 면으로 봐도 영화적인 것과 무관한 방식의 숏이 레아 세두의 얼굴을 무례하게 장악한다. 충격적인 두개의 숏이 있다. 하나는 바티스트와 만난 뒤 혼자 벤치에 남아 눈물짓는 프랑스의 정수리 클로즈업이다. 프랑스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떨구는 장면이 이어지긴 하지만 숏이 주는 기이한 느낌을 무효화시키진 않는다. 정수리숏은 영화에서 얼굴과 두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지니고 있던 모종의 경계를 깨고 들어온다. 이 숏은 예측하지 못한 사이 도처에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며, 무엇보다 드론숏의 각도를 연상시킨다. 드론은 영화에서 촬영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공격술의 일종으로 언급된다. 드론은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들었던 것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늘 옳은 방식으로 쓰인다고 확신할 수 없다. 때로 드론은 정수리숏처럼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른 하나의 숏은 레아 세두의 우는 얼굴을 아래쪽에서 포착한 롱테이크다. 프랑스가 운전 중인 자동차가 다리 위에서 정체돼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 갑자기 샤를이 나타나 그의 옆자리에 탑승한다. 프랑스는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샤를에게 분노를 퍼부으며 쫓아낸 뒤 핸들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눈물을 참는다. 카메라는 마치 핸들 속에 잠복된 각도에서 변화무쌍한 레아 세두의 얼굴을 보여주는데, 그 각도는 어떻게 찍어도 얼굴이 훌륭해 보일 수 없는 각도다. 카메라는 오랫동안 레아 세두의 얼굴을 비추고, 레아 세두는 혼신을 다해 얼굴의 모든 근육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려고 애쓴다. 그 얼굴은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연예인 엽기 굴욕 사진처럼 충격적이다.

레아 세두의 얼굴과 머리를 향한 클로즈업숏은 도처에 카메라가 존재하게 된 상황이 영화에 미치게 될 영향을 배우의 얼굴을 통해 드러낸 과격한 상상의 산물처럼 보인다. 배우의 얼굴은 영화적인 것이 깃드는 최후의 장소이자, 최소 단위이다. 배우의 얼굴은 여전히 영화적인가. 그렇다면 그 얼굴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레아 세두는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마리아 팔코네티 혹은 <비브르 사 비>에서 팔코네티의 얼굴과 마주 보며 눈물짓던 아나 카리나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영적이거나 영화적이기보다 까닭 없는 우울과 자기 연민의 발현처럼 보인다. 그 얼굴은 다양한 장소와 표면을 옮겨가며 자신의 눈물마저 소외시킨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은 현재가 숨 쉴 작은 공간이다. 프랑스는 샤를에게 현재를 미루지 말라고 충고하며 현재를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지만, 그가 마주하는 것은 길에 세워진 누군가의 자전거를 미친 듯이 부수고 떠나는 한 남자다. 어느 모로 봐도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구원하는 방식은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 영화에 기댄 채 때때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것, 그리고 아직 남은 얼굴에 집중하는 방법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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