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이 에세이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은 순도 100%의 헛소리이니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시길.
최근 육아 전선에 심각한 장애물이 생겼다. 바로 TV라는 끔찍한 요물 말이다. 식사 준비 할 때 콩순이 태권 체조를 잠깐 틀어주면 “태꿘! 태꿘!” 하며 만족해하던 아이가 어느새 10분, 20분, TV 앞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TV부터 틀어달라며 쪼르르 소파 앞으로 달려간다. 바닥에 드러누워 “TV 틀어줘, TV 틀어줘” 울며 뒹구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어디 용한 신부님에게 구마 의식이라도 부탁드려야 하나 싶을 정도다.
콩순이 에피소드 몇개를 반복 재생해서 질리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 가증스러운 추천 알고리즘이 결국 문제의 ‘그 작품’으로 아이를 인도하고 말았다. 그래.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 말이다. 이 치명적인 영상물에 노출된 지 단 며칠 만에 아이는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콩순이는 저 뒷방으로 밀려나고 얄미운 펭귄 녀석이 아이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세대 불문하고 이렇게나 손쉽게 아이들을 홀릴 수 있다니. 제작사는 악마와 거래라도 한 것인가?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 하필 취향도 날 똑 닮아서는 뽀롱뽀롱 마을의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도 마이너 오브 마이너인 ‘로디’에게 꽂혔다. (하필이면 로봇 캐릭터라니….) 하다못해 ‘해리’나 ‘포비’ 정도만 되어도 좋겠건만 장난감 하나 제대로 찾아보기 힘든 로디를 간택하다니. 벌써부터 취향이 이런 걸 보면 앞으로 덕질하기 참 험난하겠구나 싶다. 근데 웃긴 게 솔직히 나도 로디를 제일 좋아한다. 특히 시즌4 ‘로디의 소원’ 에피소드는 <뽀로로> 전체 에피소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에피소드 같다.
“근데 있잖아 거기서 로디가~”라며 종일 수다를 늘어놓는 아이와 대화가 통하려면 나도 옆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와 함께 시즌3 1화부터 에피소드를 섭렵해가며 이야기를 따라가던 중,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어릴 적 <저주받은 도시>(1995)를 처음 봤을 때의 으스스함 비슷한 감정. 작품의 배경인 뽀롱뽀롱 마을 말인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뽀롱뽀롱 마을에는 어른이 없다. 각기 다른 종의 생물들이 한데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을 뿐, 부모라고 칭할 만한 존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체 이 아이들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성장한 것일까? 이들에겐 가족의 개념조차 희박하다. 한집에서 동거하는 커플이 몇 있긴 한데 전통적인 가족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굳이 비유하자면 생활동반자법의 적용 대상이 될 법한 시민결합의 양상에 가깝달까. 아무튼 누가, 무슨 목적으로 지성을 가진 반(半)인간형 동물들을 극지방에 외따로 모아놓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더욱이 이들에겐 프라이버시나 사유재산의 개념도 없다. 현관문에는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자유롭게 서로의 집을 오갈 수 있고, 집주인이 부재 중일 때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허락 없이 물건을 사용하기 일쑤다. 낚시로 얻은 식량은 함께 나누고, 아무 대가 없이 서로의 망가진 물건이나 집도 고쳐준다. 촌장도 없다. 위계 없이 모두가 수평적으로 마을의 의사 결정에 동참한다. 약간의 편견은 남아 있지만 종족 차별 의식도 어느 정도 극복한 듯 보인다. 이건 마치… 사회주의 코뮌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 아닌가?
시즌4의 첫 에피소드에는 ‘뚜뚜’라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는데, 같은 제작사의 자동차 애니메이션 <꼬마버스 타요>(이하 <타요>) 속 자동차와 거의 동일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유사한 디자인에 익숙하게 만들어 자사의 타 작품까지 감상하도록 꼬드기려는 고도의 마케팅 술수… 가 아니라 아무래도 두 작품은 같은 유니버스에 속하는 모양이다. 두 작품 속 디자인 철학이나 기술 수준이 유사한 데다 <뽀로로>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뽀롱뽀롱 마을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드러낸 바 있고, <타요>는 근미래 서울이 배경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고 있으니까. 2013년작 <뽀로로의 한국대모험>을 보면 뽀로로 캐릭터들이 도착한 서울에서 <타요> 속 등장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아직 자율주행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는 걸 보면 시대적으로 <타요>보다 <뽀로로>가 살짝 앞서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가족은 <뽀로로>를 섭렵하고 자연스럽게 <타요>로 넘어왔다. 요즘 우리 아이의 최애 캐릭터는 ‘포코’라는 굴착기다. 이 친구도 마이너라면 마이너인데, 그래도 굴착기 정도면 아주 마이너까진 아니어서 장난감도 하나 사줄 수 있었다. 어휴, ‘으랏차’ 같은 캐릭터에 꽂혔음 어쩔 뻔했는지.
<타요>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 서울, 일명 ‘서울시티’는 SF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유토피아다. <스타트렉> 시리즈에 비견될 정도로 흥미롭다. 이 도시의 탈것들은 모두 자율주행 인공지능이 장착되어 있는데, 다들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받는 듯하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꼬마버스들에겐 학습권도 주어지고, 장시간 근로할 수 없게끔 법규로 보호도 받는다. 심지어 주어진 업무를 마친 후에는 자유롭게 도시를 떠돌며 여가 생활도 즐길 수도 있다. 인권과 동물권만큼이나 로봇권이 널리 인정되는 사회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더 흥미로운 디테일들도 몇 가지 발견했다. 우선 이 도시의 인간들은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필요한 인간들은 신규 출하된 자동차를 만나 대화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고, 서로 마음이 맞을 경우 자동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일종의 입양처럼 느껴졌다. 돈을 내고 구입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이 도시에 화폐가 있긴 한 건가? 적어도 내가 시청한 범위 내에서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중 유일한 정비사 ‘하나’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오직 사명감으로 밤낮없이 자동차들을 수리한다. 무정부주의와 공동체 정신을 강조했던 뽀롱뽀롱 마을과의 유사성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
<뽀로로>와 <타요>. 미취학 아동들의 최고 인기 애니메이션 유니버스에서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는 친로봇-반자본주의적 유토피아의 모습이 유년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자국을 남길지, 앞으로의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게 될지 개인적으로 몹시 기대가 된다.
근데 SF 이야기하는 코너에서 웬 <뽀로로> 타령이냐고? 지능이 증강된 동물들과 인공지능 로봇이 극지방에 고립된 채 공동체를 운영하고, 자율주행 버스가 외계인과 힘을 합쳐 우주 해적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SF가 아니면 대체 뭐가 SF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