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상냥한 웃음소리 같고, 표지는 파스텔 톤의 명랑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 여성의 날이었던 지난 3월8일 밤 11시, 윤가은 감독이 영화 대신 산문집 <호호호>를 들고 <씨네21> 트위터 스페이스에 입장했다. ‘나를 웃게 했던 것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윤가은 감독이 마음을 다해 아껴온 보물들을 하나하나 쓰다듬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가 영화만큼 좋아한 드라마, 만화, 음식, 공간 그리고 사람들이 <호호호> 안에서 먼지를 털고 윤기를 낸다. 그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GV, 북 토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대를 내려오며 그는 말했다. “기자들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듣고 계신 분들의 프로필 사진을 계속 봤어요. 여러분의 반응을 상상하며 이야기했습니다.” 독자들도 그의 음성을 상상하며 우리가 나눈 애호의 기록을 읽어주길 바란다.
디스토피아로부터 <호호호>까지
“이게 다 <씨네21> 덕분입니다!” 윤가은 감독이 출판사 마음산책의 연락을 받은 건 약 5년 전 <씨네21> 끝장을 장식하는 칼럼 ‘디스토피아로부터’를 연재하고 나서였다고 한다. 윤가은 감독은 2017년 6월부터 2019년 6월까지, 그러니까 데뷔작 <우리들>(2016) 이후 두 번째 작품 <우리집>(2019)이 있기까지의 기간 동안 한달에 한편씩 ‘디스토피아로부터’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글은 어린이라는 세계를 다정하고 예리하게 살핀 그의 영화들과 닮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출판인의 눈에도 띈 것. 하지만 <씨네21>에 실린 글이 고스란히 <호호호>에 담기진 않았다. ‘호불호’ 아닌 ‘호호호’의 세상은 작가가 스스로를 돌보려는 결심에서 시작되었다. “작품을 한창 준비하는 과정에서 번아웃이 왔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던 것 같아요.” <우리집>을 완성하고 나서야 책 집필에 돌입할 수 있었던 윤가은 감독은 지쳐 있던 계절의 문장을 떠나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고.
영화감독의 ‘그런 취향’
“소녀의 삶에 관심이 있어서라면 그래도 <로제타> 같은 걸, 춤과 열정에 관심이 있어서라면 아무래도 <블랙스완> 같은 걸, 우정과 연대에 관심이 있어서라면 모름지기 <델마와 루이스>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같은 걸 말해야 더 훌륭한 영화인처럼 보일 것 같았다”라는 윤가은 감독은 그러나 <브링 잇 온>을 찬미하는 것으로 <호호호>의 첫장을 열었다. 그는 ‘그런 취향’이라는 제목의 산문에 <펜트하우스>부터 <가십 걸>로 거슬러 오르는 “사실 많이 좋아했던 작품들”의 계보도 털어놓았다. 스물아홉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해서야 다르덴 형제를 알게 됐다는 그는 초반에 학교에서 듣는 영화 제목의 절반은 못 알아들었다고. 그는 오히려 데뷔 후 다른 감독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의외의 취향”을 공개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단다. “그제야 저도 안심하고 이런저런 취향들을 얘기했어요. 한풀이처럼"
여름이 좋은 이유
스페이스 방송 참여를 위해 윤가은 감독이 새로 만든 트위터 아이디는 @summerissogood. 여름이 너무 좋다고 외치는 이 아이디는 ‘여름병’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 오직 한 계절에 대한 그의 진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여름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친구들은 싫어하는데, 전 정말 여름이 더워서 좋아요. 수족냉증이 심해서 겨울을 못 견디는데, 더우면 오히려 에너지가 샘솟는 체질이에요. 게다가 여름이 되면 하루가 길잖아요. 해가 지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마치 초등학생과 하루 일과를 같이하는 느낌이에요. 밤새우는 걸 잘 못하는 저는 매일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고 있어요. (웃음)” <우리들> <우리집>을 모두 화창하고 생기 있는 여름방학 영화로 만든 감독다운 발언이었다.
빵은 언제나 옳다
방송 중 윤가은 감독과 <씨네21> 기자들이 열띠게 대동단결한 순간이 있었다. 바로 빵에 관한 수다를 떨 때! 이야기는 <우리집> 프리프로덕션 당시 윤가은 감독이 빵 때문에 빵 터진 에피소드에서 출발했다. “제작사 아토의 김지혜 대표가 회의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일찍 저를 부르셨어요. 어떤 날벼락이 터진 건가 싶었는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대표님이 <대부>의 말론 브랜도처럼 제가 그동안 사온 여섯개의 빵 봉지를 가리키며 심각하게 얘기하더라고요. 빵을 이렇게 많이 사오면 우리가 어떻게 먹느냐고, 우리도 돈 있으니 제발 사오지 말라고.” 좋아하는 걸 스탭들과 나누고 싶었던 ‘빵순이’ 윤가은 감독과 재택근무로 인해 빵 소비량이 급등한 기자들은 각자 선호하는 빵을 소개하며 환호했다. 윤가은 감독은 “파리에서 배낭여행을 하다 막 구워진 상태의 뺑오쇼콜라를 먹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 어디서든 그런 빵이 보이면 꼭 산다고.
문방구 들렀다 노래방으로
빵집을 나온 대화는 곧장 헌책방과 문방구로 향했다. 길창덕, 윤승은 화백의 명랑만화를 애독했던 어린이 윤가은은 아버지 손을 잡고 헌책방에 가곤 했단다. 문방구에는 매일같이 다니며 새로 들어온 물건을 구경했다고. “그때 못 샀던 것을 성인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대에 들어서서 문구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옛 모습을 간직한 가게를 찾기 어렵다는 그에게 몇몇 청취자는 망원동 동교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권하기도 했다. 그가 그리워하는 기쁨의 장소는 또 있다. “노래방을 진짜 좋아해요. 코로나19 이후 못 가서 아쉬워요. 쑥스럽지만 포 넌 블론즈의 <What’s Up>과 퀸의 <Somebody to Love>가 제 애창곡입니다. 부스 안에서 혼자 <보헤미안 랩소디>를 찍는 거죠. (웃음)” 이날 스페이스는 언젠가 노래방에서 재회해 실력을 뽐내보자 약속하며 매듭지었다. 책에 “노래 같은 영화를, 노래하듯 만드는 게 내 평생 꿈”이라 밝힌 윤가은 감독의 다음 멜로디 또한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