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항구도시 구암의 건달들 사이 몰아치는 피바람 '뜨거운 피'
2022-03-23
글 : 김현수

항구도시 구암의 건달들 사이에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부산의 작은 포구 구암 일대를 수십년 동안 쥐락펴락해온 만리장 호텔 사장 손 영감(김갑수)은 겉으로는 덕망 있는 지역 유지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해수욕장 이권 사업과 밀수 사업을 쥐고 흔드는 지역 건달 패거리의 두목이다. 그에게는 충실한 오른팔 희수(정우)가 있다. 손 영감의 각종 사업, 그중에서도 만리장 호텔 운영을 도맡고 있는 희수는 자신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손 영감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게 문제다. 다른 건달들이 전자오락게임 사업을 같이해보자며 그를 꼬드기자, 마흔줄에 접어든 희수는 추풍낙엽마냥 흔들린다. 손 영감에게 평생 충성을 바친다 한들 자신에게 만리장 호텔을 물려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늘 애물단지같이 구는 손 영감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도다리도 눈에 밟힌다. 희수는 무리해서 손 영감에게 독립을 해보겠다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의리도 정의도 없는 건달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업이 평탄하게 진행될 리 만무 하다.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뜨거운 피>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인 천명관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각색을 시작으로, <북경반점> <총잡이> <이웃집 남자> 등의 각본을 써온 그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영화감독의 꿈을 드디어 펼쳐 보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수많은 시나리오와 소설을 집필해온 그가 왜 다른 작가의 소설 원작을 택해 연출 데뷔를 한 것일까. 천명관 감독을 사로잡은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의 특징은 건달들의 밥벌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암의 건달들은 무시무시한 칼잡이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멋스러운 세단과 고급 정장을 입고 다니며 폼 재지도 않는다. 일종의 조폭 판타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소설 속 인물들은 중국산 고춧가루에 국산 고춧가루를 조금 섞어 속여 파는 따위로도 돈을 번다. 천명관 감독은 바로 이러한 원작 소설의 건달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에 마음을 빼앗겨 영화화를 결정했다.

영화는 소설이 묘사하는 희수의 이야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에피소드를 걷어냈다. 희수가 만리장 호텔 일을 하다가 전자오락게임 사업을 하기 위해 호텔을 떠나는 과정을 그리는 1부, 그리고 게임 사업이 어그러지면서 뜻하지 않게 구암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을 담은 2부로 구성된 소설 이야기 가운데 1부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대부분 걷어내어 영화화하는 바람에 차근차근 사건 개요를 소개하는 과정이 사라져버렸다. 관객은 구암 일대 건달들의 기본적인 조직도조차 모른 채로 희수 주변을 맴도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다니며 방황한다. 주인공 희수를 비롯해서 희수가 아끼는 연인과도 같은 존재인 인숙(윤지혜), 그리고 인숙의 아들 아미(이홍내) 세 사람이 영화 안팎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친절하게 소개해주지 않아 이들이 서로 울고 웃으며 마음을 주고받는 장면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필수적인 장면이 생략됐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정된 시간 안에 희수가 처한 위기 상황의 전모를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누아르 장르 영화인데 모든 상황을 인물의 대사로 설명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깡패들의 비루함은 영화적인가, 그들을 프리즘 삼아 들여다볼 한국 사회의 문제가 과연 남아 있는가, 진지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뜨거운 피>는 건달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음을 애써 증명해 보이는 영화다.

CHECK POINT

부산

<뜨거운 피>의 배경인 구암은 가상의 공간이다. 구암은 허름하고 낡은 포구로 묘사되지만 영도 일대 건달들이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는 알짜배기 항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언수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 송도, 감천항, 서면, 남포동, 영도 일대가 바로 구암의 모티브가된 지역이다. 천명관 감독은 실제 부산의 해당 지역을 찾아 다니며 지역색을 담으려 노력했다.

아버지

손 영감과 희수, 희수와 아미의 관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유사 아버지의 형태로 서로를 아낀다. 아미가 희수에게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느냐는 다소 상투적인 감동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순간이 공들여 묘사되는 것도 아버지라는 존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버지 세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수의 몸부림을 통해서는 현재 40대들이 처한 현실 문제를 대입해볼 수도 있다.

밑바닥 인생

“우리는 세상의 제일 밑바닥인데 와 이리 높은 곳에 있나.”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막장 인생 인숙이 아들 아미와 사는 곳이 하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동네다. 인생은 곤두박질 치고 있는 중인데 집은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 천명관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누아르라는 장르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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