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재춘언니' 이수정 감독 "연대는, 여성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2022-03-31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시 읽는 시간>에서 시와 함께 삶의 쉼표를 그렸던 이수정 감독이 영화 <재춘언니>로 돌아왔다. <재춘언니>는 2007년 콜트콜텍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임재춘씨를 중심으로 13년간 이어져온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30년간 일해온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가 날아든 그날, 몇달 만에 끝날 줄 알았던 투쟁은 장장 4464일간 이어졌다.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던 임재춘씨는 연극 <햄릿>을 올리고, 밴드 공연을 하고,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며 지난한 시간을 단단히 버텼다. <깔깔깔 희망버스> 때부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온 이수정 감독은,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당찬 걸음을 집요하게 기록했다.

-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 대해 알게 된 건 언제였나.

= 2010년 무렵 프로듀서로서 다른 감독과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화의 배경이 기타 폐공장이었다. 콜트콜텍 회사에 관해 알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해고 노동자들에 관해 알게 된 건 김성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타(其他/Guitar) 이야기>를 본 이후다. 이들에 관해 알고 난 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 여러 해고 노동자들 중 임재춘씨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있다면.

= 희망버스(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 당시, 크레인에서 고공 시위를 벌이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조합원을 응원하려는 목적으로 운행된 버스.-편집자)를 탔을 때 휴게소에서 임재춘씨를 만난 적이 있다. <기타(其他/Guitar) 이야기>에서 본 덕에 임재춘씨는 내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인사를 건넸는데 반갑게 맞아주더라. 그 환하게 웃는 얼굴이 내게 오래 남았다. <재춘언니>를 만들며 모든 해고 노동자를 꼼꼼히 촬영했지만 임재춘씨가 그중 가장 다채롭게 촬영된 인물이었다. 연극, 밴드 공연, 식당에서 일하는 장면 등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고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도 서슴없이 꺼내주었다. 말솜씨가 유려하진 않아도 중간중간 등장하는 정곡을 찌르는 표현들 또한 마음에 들었다.

- 노조 파업 하면 떠오르는 비장한 모습들이 있는데, 임재춘씨는 <햄릿>의 오필리아 역으로, 하얀색 원피스에 꽃 왕관을 쓰고 처음 등장한다. 예술과 접목해 투쟁을 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 내가 영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햄릿> 연극을 공연할 때 너무 좋더라. (웃음) 임재춘씨가 투쟁을 고민하다가 점점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연극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대사와 함께 영화를 시작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투쟁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문화예술연대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영화에는 공연, 연극 등 활발한 연대 활동이 담기는 한편 투쟁하는 모습도 치열하게 그려졌다. 특히 끝장 투쟁 때 사장실에서 노동자들과 박영호 사장이 대면한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당시 출입문은 전부 닫혀 있었다. 기회를 보다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오가던 뒷문으로 치고 들어간 거였다. 다들 갑자기 움직이기에 직감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따라 올라갔다. 사장실에 앉아 있는 박영호 사장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13년 만에 처음 만난 거였다. 시위와 투쟁을 오래 하다보니 이런 순간이 오나 싶었다.

- 투쟁 과정은 흑백으로, 임재춘씨의 현재 모습은 컬러로 보여주었다. 색감의 대비를 준 이유는 무엇인가.

= 임재춘씨를 중심으로 가겠다고 결정한 뒤로 무성영화 컨셉을 가져가고 싶었다. 임재춘씨가 한 말이나 쓴 일기를 살려서 텍스트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고. 그래서 컬러 촬영분을 흑백으로 바꾸고 비율도 고전영화처럼 4:3 비율로 크롭했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있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기간 동안 계절도 제대로 체감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저 유예된 시간을 사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투쟁 기간은 흑백으로, 자신들이 원하던 일상으로 되돌아갔을 때에는 컬러로 표현해보았다.

- 제목을 <재춘언니>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 인천 지역 여성 활동가들이 임재춘씨를 재춘 언니라고 불렀었다. 나도 처음엔 언니라 부르는 게 어색했는데 점점 익숙해졌다. 남자 중심의 노동조합에서는 지회장과 같은 직함으로 불리고 위계도 분명하게 있다. 하지만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경우는 달랐다. 평조합원들이 권위를 가진 언어 대신 편하게 수다를 떨고, 시스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연대는 기본적으로 여성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를 담고 싶었고 관객에게 다가가기에도 더 좋을 것 같았다.

-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 20대 때 영화운동을 하면서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작업을 했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20년 정도 공백기를 가졌다가 희망버스를 계기로 집회 현장에 다시 가게 됐다. 집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더라. 40대가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고 대량 해고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다보니 여기까지 이어졌다. 대학생 때 운동권에 속하진 않았고, 회색분자와 다름없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1980년대에 공부를 하면서 노동자, 노동운동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무렵부터 노동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던 것 같다.

- 다음 작품에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 대마에 관해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대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 풀이 기후 위기의 대안 작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다. 활용 범위가 정말 넓더라. 단순히 마약성 성분이 있는 풀이라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에 관해 짚어보려 한다. 촬영은 40% 정도 진행됐고, 내년쯤 완성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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