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사랑 후의 두 여자'가 절망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방식
2022-04-06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해협을 건넌다는 것

상실과 배신으로 가닿은 절벽 너머에도 삶이 있음을, <사랑 후의 두 여자>를 보며 깨달았다.

슬픔을 가눌 수 없다. 기도에 신이 응답할 리 없다. 신의 목소리 대신 여자에겐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벽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하지만 백악의 절벽은 붕괴하고 회벽의 천장은 무너지는 중이다. 이것은 메리의 환상인가? 회복될 수 없는 상실 이후 고요히 그녀의 삶은 해체되고 있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영국의 신예 알림 칸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 <삼형제>(2014)로 주목받은 후 BBC필름과 영국영화협회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는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주연을 맡은 요안나 스찬란은 런던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무너져내린 절벽 가까이

영국계 백인 이슬람교도 메리(무슬림 이름으로는 파히마)는 남편 아흐메드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버해협을 왕복하는 페리선박을 운항하며 장기 외박 생활을 해온 남편이 이편 영국의 도버에서 메리와 신앙적 결혼 생활을, 저편 프랑스의 칼레에서 주느비에브(그리고 그녀와 아흐메드와의 아들 솔로몬)와 세속적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정체를 숨기고 찾아간 메리를 주느비에브는 이삿짐을 정리할 임시 청소부로 착각한다. 그렇게 메리는 타인의 삶에 잠입하여 자신과 남편을 공유했던 그들의 삶을 관음하기 시작한다.

종종 메리는 해협을 향해 아찔하게 솟은 백악의 절벽에서 페리선박을 운항하는 남편 아흐메드의 귀환을 기다렸을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 위해 위험한 절벽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을 것이다. 간혹 절벽은 무너져내린다. 절벽 가까이 가지 말라는 전언은 상징적이다. 진실에 너무 가까이 가면 삶이 파멸된다는 것. 하지만 메리는 절벽 가까이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존재를 말소하는 경험의 임계치에 도달하지 않고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메리가 해협을 향한 절벽에서 남편의 귀환을 기다렸듯 저편 프랑스의 주느비에브는 해협을 향한 등대가 있는 마을에서 아흐메드를 기다렸을 것이다. 메리의 삶에는 신실한 신앙, 무슬림 가족, 부재하는 아이(과거 사진 속 아이)가, 주느비에브의 삶에는 세속적 생계, 아들, 그리고 부재하는 남편이 있다. 수용하고 인내하던 메리와 달리 개방적이고 직설적인 주느비에브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해왔다. 무슬림으로 개종한 후 남편의 언어인 우르드어를 배우고 파키스탄 음식을 요리하며 신앙공동체의 복식을 입은 메리는 바지를 입고 직장 생활을 하는 주느비에브와 외견상으로도 성향상으로도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인다.

영화 속 붕괴의 이미지는 우선 백악 절벽의 무너짐 그리고 회칠한 천장의 균열에서 오는 하얀 먼지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하얗고 모호하며 삶을 흐트려뜨리는 것, 무너져내리는 것, 윤곽을 흐리게 하는 것.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속 두드러진 반영상들에 조응된다. 습기로 흐려진 버스 유리창, 수증기로 부예진 거울, 불투명 문양이 있는 커튼 너머 뭉개진 메리의 얼굴과 신체.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이 한없이 불투명해지는 것 같다. 한편 영화는 거울 너머로 메리가 주느비에브의 삶을, 주느비에브가 메리의 삶을 관조하는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두 여자가 상대방의 방에서 화장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거울 너머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보냈을 침실을 바라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대안적 관계 맺기

카세트테이프, 홈비디오, 사진과 편지 등 과거의 아날로그적 매체를 기억의 보조장치로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특히 영화가 사운드를 활용하는 방식은 한층 섬세한데, 핸드폰에 남겨진 남편의 음성 메시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남편의 목소리, 홈무비로 녹화된 영상 속 남편의 음성 등 부재하는 남편은 ‘목소리’로 현전한다. 돌이켜보면 오프닝에서 어두운 방에서 거의 식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 남편은 기도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만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영화는 부재하는 존재의 현전하는 초월적 목소리인 아쿠스메트르(Acousm tre, 음성존재)를 응답 없는 신의 목소리 대신 활용한다. 남편의 죽음 이후 음성사서함 메시지에 위안을 받던 메리는 그 메시지가 말소되자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하지만 영화 후반에 이르면 오래된 서랍에서 남편이 그녀에게 녹음해준 테이프가 발견된다. 그렇게 목소리는 과거로부터, 끝내는 더 먼 과거로부터 돌아와 해체되어가는 그녀의 삶에 새로운 관계성을 복원시킨다.

영화가 전달하는 세밀한 진정성은 통제된 카메라워크로도 드러난다. 영화가 느린 리듬으로 고요히 차이와 경계를 드러내는 방식이 꽤나 능숙하다. 부부가 조명이 어두운 실내로 들어와 남편이 방으로 가고 아내가 부엌에서 차와 음식을 마련하는 오프닝 장면과 이어지는 남편의 장례식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메리를 무슬림 가족들이 애도하는 장면의 정적인 롱테이크는 메리가 경험하는 절망의 시간을 정적으로 고요히 담아낸다. 또한 백악 절벽과 아흐메드의 무덤을 조망하는 익스트림 롱숏은 삶과 죽음(절벽과 해협, 공동묘지와 마을)의 경계를 전지적으로 조망한다.

영화는 멜로드라마적 갈등의 증폭 혹은 문화적 정체성의 서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대안적 관계의 전망으로 이어진다. 아흐메드와 주느비에브 사이의 아들 솔로몬의 은밀한 동성애 관계, 나아가 주느비에브와 메리가 같은 침대에 눕는 장면에서 묘하게 암시되는 퀴어적 긴장감은 영화가 새로운 관계성을 암시해둔 부분이다. 영화는 남성(성)의 부재 속에서 기존의 가족 통념으로 묶일 수 없는 새로운 젠더, 문화, 인종적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우회와 상징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메리는 더 먼 과거에 겪은 아이의 죽음과 가까이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중층의 상실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집 밖으로 모험을 떠난다. 절벽에 서고, 해협을 건너며, 적대적인 공간 속으로 잠입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례를 통과해가며 메리는 무지와 고립에서 성찰과 연대로 향하는 내적 성장을 경험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초반부 아이의 탄생과 장례식, 후반부 아키카(탄생축하 의례)와 성묘(죽음의 수용)라는 원형적 의례의 대위 구조를 가진 것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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