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어거스트 버진'이 시공간을 재창조한 이유
2022-04-13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단독자를 염원하는 주문

이 영화를 두고 에릭 로메르를 언급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글에도 썼듯이 기원을 따지기보다 단독 작품으로 살피는 게 더욱 영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믿는다.

영화 후반부 배우이자 축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아고스의 딸 비올레타가 임신한 에바(잇사소 아라나)에게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고 묻자 에바는 아빠가 없다고 말한다. 비올레타가 동정녀 마리아 같은 거냐고 되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 대화가 종지부를 찍기 조금 앞서, 에바의 입에서 임신 사실이 탄식하듯 나오면서부터 영화는 재정립되기 시작한 터다. 영화 제목이 ‘어거스트 버진’인 이유, 배경으로 기능하는 8월의 성모승천 대축일 광경, 에바가 박물관에서 임신 중 네로에게 살해당한 포파이아의 흉상을 물끄러미 보던 장면, 또 등장인물들과 나눴던 생리, 달, 육아, 임신에 관한 이야기 등도 아귀가 맞는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3개월 전 헤어진 남자 친구인 듯 암시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에바는 유령처럼 실체가 없는 존재 같다. 길거리 공연을 하던 올카가 에바에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냐고 묻는 건 의미심장하다. 에바가 훑고 지나간 인물들을 상기해보자. 그들 앞에 있던 에바의 모습을 지우고서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다는 상상은 지나친 걸까. 에바가 보인 언행의 액션 없이 허공에 해대는 상대방의 리액션만으로 이뤄진 영화도 별도의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이런 가정이 가능할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재창조한 시공간이 보인 특성에 그 이유가 있다.

이중의 시공간

영화는 간단한 설정으로 독특한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사회 기능을 유지할 필요 인력만 남고 모두 휴가를 떠나면 관광객이 들어서는 마드리드에 에바는 주민이면서 관광객이 되어 남아 있기를 택한다. 그러면 마드리드는 굉장히 익숙한 동시에 탐험을 요하는 이중의 시공간이 된다. 일기 형식으로 장면이 구분되고, 에바의 일정을 반듯하게 따라가는 점을 보면 영화는 기록 매체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또 우리의 기억이 그러하듯 어떤 날은 길게 기록되고, 어떤 날은 아주 짧게 기입되는 와중에 에바의 행적은 신출귀몰한 것처럼 표현된다. 특히 물놀이를 하다가 홀로 남아 물 위를 유영하고, 방과 테라스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최소한의 운동만 보일 때는 부유하는 무언가처럼 보인다. 요컨대 <어거스트 버진>은 사실주의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영화의 전통을 모두 포섭하거나 반대로 배제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일상의 장면을 칼로 그어 뒤집어낸 시공간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 시점과 이곳에서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에바의 모습과 달리 이때 여기는 어떤 의미로도 단정되지 않고 공존하며 떠돈다. 그런 이유로 에바가 보인 말과 행동은 쉽게 수용된다. 쉽사리 열리지 않는 아파트 문을 다른 집의 사람이 대신 열어주는 일도, 하필 그 사람이 올카라는 사실도, 보호 스크린 밑을 기어가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재차 만난 그를 스토킹하듯 쫓아간 클럽에서 축제의 밴드 멤버에게 응원을 전한 뒤 아고스와 서로의 뺨을 때리며 친분을 쌓는 일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특별한 허용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에바를 제외하는 상상이 가능한 것과 함께 역설적으로 에바의 존재가 더욱 돌출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계가 모호하고 무엇도 가능한 시공간에서 에바는 오히려 관객에게 또렷이 인식되는 힘을 지닌다. 특히 여성성이 부각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 아닌 인간이기 전에 여성, 또 남성의 이항 대립으로서 여성이 아닌 단독자로서 여성이 전면에 나선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같은 기독교신화라 하더라도 아담과 이브의 얘기보다 수태고지가 더 여성의 실존적 고민을 대변한다고 할 만하다. 남성에 의존한 여성의 탄생기는 냉소하며 가벼이 넘긴다 해도 잉태와 출산과 관련한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일종의 우화로 간주하는 건 성급하다. 작품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태초 여성을 상징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이러한 그가 일상의 겉면을 살포시 벗겨내어 드러난 불특정한 시공간인 어느 8월의 마드리드에서 에바로 모습을 바꿔 나타난다. 영화관에서 만난 기치료 마사지사 마리아가 의식을 끝내고 에바의 머리에 모포를 씌우면 에바는 영락없는 동정녀 마리아의 초상이 된다. 더 나아가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얼마간 동정녀 마리아의 형상을 띠고 있다. 특히 영화 마지막 비올레타와 에바 둘이 같이 포착되는 장면은 어린 세대의 여성을 일부러 보여주면서 ‘동정녀 마리아’ 에바에게 벌어진 일은 세대를 거듭하는 여성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을 말한다. 그녀의 고민은 인류 최초의 여성이고, 지금의 여성이며,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여성이 품어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품이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도 그들은 에바가 연쇄적으로 만남을 이어갔던 인물군에 속하며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성별을 떠나 그들은 에바가 인지하는 예비 단독자들이다. 그들이 지닌 번민은 단독자가 되지 못해서 불거지거나, 단독자로서의 지위가 위태롭기에 발생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친구 루이스는 연인과 헤어진 뒤 아직 아픔을 치유하지 못했다. 이별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심한 고통은 단독자로서 자립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단독자에게 잉태와 출산뿐 아니라 돌봄도 실존적 고민을 안긴다. 아고스를 짓누르는 죄책감은 양육자로서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해 생겨났다. 의무 자체를 버거워한다기보다 죄책감을 털어내려면 스스로가 어엿한 단독자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결과다. 다시 말해 영화는 여성성을 내세우는 것 못지않게 단독자로 나서는 일도 긴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에바를 포함해 영화 속 동정녀 마리아들을 온전한 단독자로 상정하려 할 때 태아는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벌어진 수태는 신비한 일일지 모르나 실존하는 여성의 처지에서 보자면 한가득한 짐이며, 이상 상태다.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기 이전에 그저 벌어진 사태다. 이 사태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우선 아버지 모두가 없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의 부존재를 전제해야 단독자로서 우리를 살펴보는 게 용이해진다. 비올레타조차 에바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당연하게도 태아는 엄마의 몸속에 있으므로 엄마가 누구냐는 물음은 좀처럼 없다), 굳이 기원을 묻는 경우가 잦고, 또 기원을 상징하는 말이 ‘아버지’라는 단어에 경도된다. 그때마다 여성은 차하위의자리로 밀려나 단독자 되기가 어려워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고스가 아이스크림 사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에바는 비올레타에게 산책을 권하고 비올레타가 이에 응하면서 둘은 화면에서 사라진다. 단독자가 되기 위해 둘이서 자행한 적절한 도주는 아닐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