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식에게서 이렇게 깨끗한 순애보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디즈니+에서 4부작 뮤직 드라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선보이는 <사운드트랙 #1>은 그간 배우 박형식이 언제나 타입 캐스팅 저편에서 의외의 필모그래피로 저벅저벅 행군해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체감시킨다. 짝사랑 중인 오랜 친구 옆에서 늘 반 박자 느리게 동행하는 포토그래퍼 한선우는 멜로드라마의 판타지와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배우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2010년에 아이돌 그룹 제국의아이들로 데뷔해 성인식을 마친 박형식은 드라마 <시리우스>(2013),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2013, 이하 <나인>)의 아역을 맡아 배우로는 처음 눈도장을 찍었다. 청춘 드라마나 학원물에 어울릴 법한 이미지에 반항하듯 53부작 주말연속극 <가족끼리 왜 이래>(2014)로 들어간 그는 아버지로부터 졸지에 ‘불효 소송’을 당한 삼남매의 애환을 나눠가지면서 아이돌의 배우 전향 과정에 영감이 될 만한 선례도 남겼다. 이후 <상류사회>(2015)에선 전형적인 재벌가 상속남 캐릭터를 보기 좋게 뒤집고 <화랑>(2016)으로 사극을 경험한 다음,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2017)에선 기세 좋게 인기의 홈런까지 날렸다. 천재 변호사, 자기 주장이 강한 청년 창업가로 분한 <슈츠>(2018)와 <배심원들>(2019)이 연달아 호평을 받은 과정은 성실한 경력이 곧 역량의 진전을 이끈다는 희망적인 신화를 뒷받침하기에도 충분했다.
29살, 절정의 나이에 군 입대로 잠시 휴지기를 가지고 2년 만에 돌아온 박형식의 행보는 더욱 재미있어졌다. 강력계 형사가 되어 광인병에 걸린 사람들과 싸우는 드라마 <해피니스>(2021)로 다시 대중의 관심 한가운데에 부상한 지금, 재정비를 마치고 레이스에 한창인 배우가 우리에게 선보이는 얼굴은 카메라 뒤편의 치열함과 반대로 되레 말갛고 느긋하다. 연기하는 재미와 직업적 야심 사이를 놀이하듯 줄타기하는 요즘의 박형식과 만났다. 그는 섣불리 노련해지기보다 차라리 계속 천진난만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씨네21>과 처음 인터뷰한 것이 2019년 군 입대를 앞두고 <배심원들> 개봉 일정을 소화할 때였다. 돌이켜보면 병역의무와 스물아홉이란 나이 앞에서 데뷔 이후 가장 심경이 복잡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이 눈앞에 잔뜩 보이는데 커리어를 제쳐두고 나라의 부름을 따라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때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창 혼란스러울 시기에 모든 것을 강제 정지 상태로 둘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온전한 나로서 차분한 시간을 보냈다.
- 2010년 20살에 제국의아이들(ZE:A)로 데뷔한 이후 한번도 이렇다 할 공백기가 없었다.
= 많이 바쁠 땐 내가 나이를 먹고 있는 건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들이 닥쳐오니 그냥 헤쳐나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필요했던 건,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묵히며 성숙해질 시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자기 성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차근차근 짚어보는 거지. 약간의 부작용이라면, 이제는 너무 바쁘면 나도 모르게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게 된다. (웃음)
- 3월23일 디즈니+에서 공개된 <사운드트랙 #1>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짝사랑하는 포토그래퍼 한선우를 연기한다. 4부작의 호흡이 배우에게도 신선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 23살 때 출연했던 KBS2의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시리우스>가 4부작이었다. 그땐 아역으로 출연했으니 주연으로 제대로 4부작을 경험하는 건 처음이다. OTT 4부작 드라마, 게다가 뮤직 드라마? 처음 컨셉을 들었을 때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끌렸던 건 짝사랑 스토리라는 점.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대만 멜로, 그리고 일본 멜로를 좋아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 시장에선 보기 힘들었는데 <사운드트랙 #1>이 오아시스 같았다. 작품 순서 면에서 나 나름의 의미도 있었다. <해피니스>에선 광인병에 감염된 사람들과 싸워야 했고, <청춘월담>에선 세자인 나를 폐위시키려는 사람들이 난리인 상황이어서 <사운드트랙 #1>이 그나마 달콤한 시간을 허락해줄 것 같았다. (웃음) 스케줄 조율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몸이 힘들어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 포토그래퍼로서 늘 무언가를 포착해내야 하는 사람이라서인지 조심성과 끈기가 몸에 밴 캐릭터로 읽었다.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느긋한 박형식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느낌이다.
= 어떤 의미로는 솔직한 사람이 아닐까? 능청맞은 데가 없는 캐릭터로 해석했다. 특해 오래된 친구들 앞에선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더 진지하고 차분하게 버티는 사람을 상상했고, 그래서 직업적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려고도 했다. 사회적으로 처신하거나 오히려 냉정하게 행동하는 식으로. 내게도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사운드트랙 #1>처럼 이성 친구는 아니지만, 20년 넘게 친구로 지내왔으면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의 내 경험에서 단서를 찾았다.
- 타입 캐스팅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사운드트랙 #1> 같은 멜로드라마를 진작 여러 번 했을 법도 한데, 정작 연기 활동을 시작한 뒤로는 팬들의 기대와 엇나가는 선택들을 주로 했다. 달리 말하면 계속해서 새로운 면모로 해석되는 행운이 주어진 셈이다.
= 예상 가능한 틀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물론 지금도 당장 해보고 싶지만 못하는 역할들이 있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이가 좀더 들면서 새 유형의 작품들이 찾아올 때까지 내 경계를 조금 더, 조금 더 확장해가는 수밖에. 솔직히 <해피니스>만 해도 이런 역할이 내게 올 줄 몰랐다.
- <해피니스>는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의 풍경과 좀비 장르의 상상력을 결합한 컨셉이 시의적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반 형사인 501호 정이현은 20대의 배우 박형식에겐 주어지지 않던 캐릭터였다.
= 군대 가기 전의 박형식에겐 들어오지 않았을 작품임이 분명하다. 누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지켜준다고? (웃음) 나이, 인상 면에서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역할도 상상 가능해졌다는 것,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 제대 후 복귀작이라는 점까지 겹쳐져 부담은 없었나.
=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함과 안정감이 더 컸다. 작품에 들어갈 땐 단순하게 집중하자는 주의이기도 하다. 너무 많이 생각하다가 결국 나 자신을 의심하는 수순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려 한다. ‘극 안에서 하나의 캐릭터로서 그저 잘 이루어지기만 하자’라고.
- 대중성이나 반향의 측면에서는 예능 <진짜 사나이>, 그리고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이 도약대가 되었다. 외부의 평가와 관계없이 스스로 기준점이라 생각하는 작품이 있나.
= 개인적으로는 <시리우스>를 꼽고 싶다. 내게 ‘처음’으로 각인된 작품이다. 이어서 <나인>에 캐스팅되었을 때 감독님이 <시리우스>를 보고 캐스팅에 확신을 얻었다고 말씀해주셔서 그 순간도 감동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전작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다음 작품에 캐스팅되는 것이 배우의 기쁨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체감했던 것 같다.
- 매년 최소 한 작품씩 확장과 변화의 포인트를 새겼다. 실패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순 없겠지만, 마땅히 쓴소리 들을 만한 이력이 없다는 게 배우 자신에겐 불안한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좀 제멋대로인 타입이면 옆에서 선배님들이나 동료들이 ‘야, 너 그러지 마’ 하면서 잔소리를 할 텐데 주변에 늘 잘하려고 노력하는 성격이다보니 사람들이 더더욱 내게 모난 소리를 못한다.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달까. 눈치껏 알고 스스로 고쳐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나면 오늘은 잘못한 게 없었는지 자기 평가를 내리는 게 습관이 됐다. 배우로서 더 성공하고 싶고 혹은 비판과 조언의 대상이 되어보고도 싶은데, 어느 쪽이든 나는 조금 애매한 게 아닌가 싶어서 종종 혼란스럽다. 요즘 딱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재미와 야심 사이의 갈등이란 게 참 어렵다.
= ‘행복하면 장땡이야!’ 싶다가도 돌아서면 욕심이 생긴다. 그런 이중적인 내 모습을 전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고 있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결국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노력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 소속사를 옮긴 후 배우 활동에 집중하면서 처음 선택한 작품이 허진호 감독의 단편 <두개의 빛: 릴루미노>였다. 영화에 대한 갈증이 컸던 시기였을까.
= 선배들이 자주 영화를 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다 처음 허진호 감독님과 만나 작업을 했는데, 감독님은 정말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계시면서도 한신 한신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꾸려나가는 분이었다. 그런 조용한 진지함에 반했다. 영화 현장만이 가지고 있는 힘과 집중도를 느꼈고, 좀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배심원들>에 호출받았다.
- <배심원들>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상을 받았다.
=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말하면 영평상의 의미도 잘 몰랐다. 주변에서 “형식아, 너 그거 받은 건 진짜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어” 같은 말을 해주기에 군대에서 뒤늦게 어찌나 감격했는지. 한창 스스로에게 엄격할 때였는데 <배심원들>로 받은 좋은 평가가 자신감을 수혈해줬다.
- 뮤지컬 무대도 계속 도전할 생각인가.
= 물론. 무대 위에서 온갖 떨림, 설렘, 그리고 캐릭터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채로 공연을 마친 다음 관객의 박수를 박을 때, 그때의 행복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찌릿찌릿한 성취감이 있다. 공연 전날 침대에 누워서 머릿속으로 공연을 시뮬레이션하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그렇게 해서 상상의 공연을 한번 마친 다음에야 잠이 온다.
- 현장을 진심으로 즐긴다는 인상을 받는데, 촬영장이나 무대에서 재미를 느끼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 책을 받아본 뒤 우선 내가 빠져드는 건 상상이다. 늘 자기 전에 누워서 이것저것 상상하며 잠들기도 하고. 어릴 때는 만화책에 한번 빠져들면 7~8시간씩 한 자리에 앉아서 집에 누가 드나들든 듣지도 못했다. 현장에 가면 나의 상상력이 실제로 실현된다. 그러니 놀라울 수밖에! 그리고 아무리 계획해도 촬영장에 가면 다 틀어져버린다. 그 순간이 너무, 너무 좋다. 도전적이고 새로운 순간을 마주할 때 흥분하는 것 같다.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뇌가 활성화되는 느낌! 새로운 자극이 내게는 확실한 원동력이다.
- 진심으로 재밌어하고 즐기는 곳에 자신을 놓아둔 사람의 기쁨이란 게 이런 걸까.
=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분명하고, 또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무진장 애써왔다. 철없는 말이겠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걸 하고 싶다. 슬슬 주변을 보면 또래들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결정한다. 작품을 선택할 때 제작사와 채널은 어디며 투자는 어디서 받는지, 또 편성은 몇시부터 몇시까지 나오는지 진지하게 논의하는데 나는 ‘아! 저 역할 재밌겠다!’ 이러고 있으니… 물론 은근한 믿음도 있다. 이것저것 다 따지고 알아서 뭐 하나, 그런다고 더 잘되는 것도 아닐 텐데 하는 마음. (웃음)
- 30대의 배우 박형식이 기대하는 미래가 있다면.
= 어릴 땐 지금쯤 아빠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바람이 있다면 사회의 요구에 너무 쉽게 길들여지지 않고 내가 그리는 동화를 계속 꿈꾸고 싶다. 범법이 아닌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옳다고 믿는 것과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면서 연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