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싸고 ‘담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2022년의 암울한 현실을 빗대어 바라본 영화, <복지식당>을 소개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옮긴 정재익 감독과 그와의 협업을 자처한 비장애인 서태수 감독을 만났다. 이들은 “장애인콜택시가 도착하지 않아 로케이션을 이동할 때면 언제나 감독이 현장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 촬영기를 들려주었다. 진보적 장애 언론 <비마이너>를 만들고 있는 강혜민 편집장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장애인 단체가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담긴 장애인 이동권의 현재를 바라봤다. 2001년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로 장애인 1명이 사망한 이후 20년 넘게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와 권리 투쟁이 이어져왔지만 요즘만큼 관심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누군가가 정치적 여론전을 조작하는 동안 영화는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감정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맥락을 전하고 있다.
‘맞서다.’ 나는 요즘 이 단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서울교통공사는 3월4일 사내 게시판에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사례로’라고 시작되는 총 25쪽 분량의 PPT 파일을 올렸다(3월17일 <YTN> 최초 보도). “지피지기 백전불태 전장연과 맞서 싸우려면 우선 어떤 단체인지 알아야!” 등의 워딩이 담긴 이 문서에는 지하철 시위 중인 전장연의 약점을 찾아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싸움의 기술이 적나라하게 서술돼 있었다. 그리고 지난 4월13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생방송으로 일대일 토론을 펼친 JTBC <썰전 라이브>는 ‘장애인 이동권으로 맞선 이준석 VS 박경석’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걸었다. ‘서로 굽히지 아니하고 마주 겨루어 버티다’라는 뜻의 동사인 맞서다는 극복과 투쟁의 맥락 속에 주로 놓여왔다. 이 팽팽한 양립의 동사는 외부의 압력과 시련,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행위를 서술할 때 자연스러워진다. 혐오에 맞서고 부패에 맞설 수는 있지만 공기관과 국회의원이 시민과 마치 동등한 싸움인 양 맞서서는 안될 일이다. 공개 토론은 3월31일에 전장연측이 먼저 제안했으나, 이를 대결 구도로 표방해 소비한 미디어들에 의해 토론 이전부터 상처입은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신음했다. 그리고 토론 당일, 비장애인 기준에 맞춰져 있는 방송 녹화 스튜디오의 데스크는 휠체어를 탄 박경석 상임공동대표에게 한참이나 높아 보였다.
보이지 않던 장애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문제로 삼기 시작했다
방송 전날인 4월12일 화요일, <복지식당>의 정재익, 서태수 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이 머무는 숙소 맞은편의 경사로가 설치된 카페에서였다. 안부를 묻는 인사에 정재익 감독은 가장 먼저 “숙소에 턱이 없어 편하다”고 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테라스는 대로변에 있어 내내 도심의 차량 행렬로 붐볐지만 2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동안 장애인콜택시(장콜)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서태수 감독은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가 20명 중 1명꼴이라고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에도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이 집 밖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과 조건, 계기가 없는 것”이라 말한다. 장애인인 정재익 감독이 2018년에 장애인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서태수 감독을 만나 자신의 시나리오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동권은 오직 이동의 안전과 자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깥에 나온다는 것은 생존, 그리고 인간다움을 위한 첫발이다. “그전까진 1년 동안 집에만 있었다. 밖에 나와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얻으니, 구청에 가서 필요한 서비스도 신청하고 이렇게 영화도 만들게 됐다.”(정재익 감독) 정재익 감독은 2010년 교통사고로 경추손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이후 중증 장애를 가지게 됐지만, 당시 장애인 등급제로 경증인 5급 판정을 받았다. 장콜 이용, 전동휠체어와 지팡이 무상 제공, 취업 지원 등 중증 장애인에게만 배정된 복지 정책을 무엇 하나 이용할 수 없는 부조리를 온몸으로 마주했다. 결국 정재익 감독은 장애 등급에 이의를 신청하는 행정소송을 했고, 지체장애 4급으로 판정받았지만 그 과정은 길고 고단했다. <복지식당>에서 교통사고로 중증 지체장애를 얻게 된 30대 남자 재기(조민상)의 삶은 “분노와 답답함,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다 쏟아부으며” 써내려간 정재익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복지식당> 속 두개의 시선
<복지식당>에서 제주를 구르는 재기의 휠체어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매번 불가능을 향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깥에 나가 자력으로 돈을 벌고 월세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 장애인들의 적나라한 지적대로(“너는 거울도 안 보냐? 누가 봐도 중증이잖아.”) 겉모습만 보고 재기를 중증 장애인으로 오해한 각종 단체와 시설에서 재기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려다 말고 갑자기 의사를 철회하는 순간이 계속해서 장애물이 된다. 재기의 장애인 카드를 확인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려고 했던 것을 다시 빼앗아야 하는 입장의 민망함과 난처함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당황은 즉각 냉담한 회피 혹은 비난으로 대체된다. “왜 진작 5급이라고 말 안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해요?” 매뉴얼에 따를 뿐인 행정 직원 한 사람과 싸워 무얼 하겠냐는 일말의 관조적 여유가 재기의 삶에 있을 리 없다. <복지식당>의 인물은 이미 오래 참아왔고, 그래서 더이상 참아낼 재간이 없다. 정재익 감독은 배우 조민상이 자신의 분노가 무용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기어코 울분을 토해내는 연기를 할 때 “그 정확한 이해에 깜짝 놀랐고, 위로받았다”.
한편 <복지식당>에는 두개의 시선이 있다. 지금은 폐지된 장애인 등급제의 허점과 폐단을 들추는 가운데(2019년 7월부터 단계적 폐지에 접어들어 현재는 장애 등급을 6개로 나누지 않고 중증과 경증만으로 구분한다), 영화는 더 집요한 악력으로 장애인 사회 내부의 권력 관계까지 움켜쥐려 한다. 재기가 병원에서 만난 또 다른 중도 장애인 봉수(송민혁), 그리고 병호(임호준)와 친해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것이다. 재기보다 상대적으로 경증인 두 사람은 장애인 복지제도의 세부를 잘 알고 행정 절차에 대응하는 수완도 뛰어나다. 특히 주변 장애인들 사이에서 ‘형님’으로 통하는 병호는 <복지식당>의 문제적 인물이다. 실제로 정재익 감독과 주변 장애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한 식당을 배경 삼은 <복지식당>은 홀로서기엔 등급제의 모순에 가로막힌 재기가 병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역설하고 있다. 병호는 재기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면서 대신 장콜을 불러주고 등급 소송을 위한 변호사를 알선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서사가 진전되면서 이 모든 호의가 곧 재기를 착취하는 수단임도 드러난다. 해악은 재기를 넘어 그를 돌보는 사촌누나 은주(한태경)에게까지 뻗친다. 매우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를 개인의 형태로, 더욱이 장애인 당사자로 묘사한 <복지식당>의 선택은 이 영화를 만든 주체들이 고민하는 현실의 복잡다단한 모순을 유추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장애와 비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폐쇄적인 집단 내에 형성되는 기득권의 횡포를 한 사람의 모습으로 압축해낸”(서태수 감독) 초상은 놀랍게도 매우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한때 피해자였음을 고백한 정재익 감독은 이런 이해를 덧붙였다. “장애인에겐 집단 내 밥그릇 싸움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니까. 그래서 다들 더 집요할 수밖에.”
영화와 사회의 대상화 오류
장애인 법정단체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은 3월28일 성명을 내고 이런 문장을 썼다. “장애인은 선(善)자가 아니다. 그러나 약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 시외버스에는 저상버스가 전혀 없고, 특별교통수단도 지역간 칸막이로 시외 이동이 불가능하다. 수많은 과정에서 차별을 몸소 체감해왔기 때문에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이 평생의 삶 속에 내재돼 있다.” (참고로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은 전장연의 시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장애인 권리 투쟁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이 부추긴 여론 갈등이 ‘언더도그마’ 현상을 논리로 삼는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오류에 빠져선 안된다는 주장. <복지식당>을 보고 나면, 과연 지금 언더도그마의 구호를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지 다시 묻게 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단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언더도그마를 말할 때, <복지식당>은 비장애인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장애인 커뮤니티 내의 권력형 범죄나 세력화를 짚으며 장애인을 향한 언더도그마적 시선을 해체한다.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들은 종종 우화에 가까워 보일 때가 있다. 켄 로치의 영화를 떠올려보자.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들을 스크린 타임 안에 순차적으로 집약해두니 그 자체로 매우 극적인 효과가 발생하고 때로는 극적 과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잔인한 시스템의 논리, 그 앞에서 무너지는 약자의 절망은 종종 작가들의 제어 능력을 넘어서 감정의 스펙터클로 향한다. <복지식당>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무상 제공 지팡이를 빼앗긴 뒤 휠체어에서 떨어진 재기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이 고통을 시각적으로 마주할 카메라의 권리, 그리고 관객의 권리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현실과 긴밀히 공모하려는 영화들에는 어쩔 수 없이 재현과 대상화 사이의 미세하고 깊은 크레바스가 생긴다. 오래 기억되는 영화들은 언제나 그 틈새를 뛰어넘으려는 안간힘을 쓴 결과물이다. 이제는 더이상 영화로 따라잡기 힘들어진 현실의 비극 속에서 더욱 필요해진 감각도 그것이 아닐까 한다. 도통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출근길에 나타나 과격한 시위를 벌일 때, 불편해지기에 앞서 의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 각자의 ‘선한’ 카메라가 상대를 어떻게 무심코 대상화하고 마는지를. 어쩌면 가장 불편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불편함이다.
그 남자의 집 앞
<복지식당>에서 재기는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조차 못한다. 시장 골목 안에 위치한 이층집의 계단이 너무 가파른 탓이다. 사촌누나 은주와 그의 아들에게 집을 빌려준 재기는 종종 집 앞에서 원래 자신의 공간이었어야 할 자리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날이 저물고 인적 드문 밤이 되면, 이 장소에 환상이 허락된다. 한번은 재기가 휠체어를 타지 않고 유유히 걸어서 돌아서고, 또 한번은 (아마도 어머니의 것일) 주름진 손이 술 취한 채 고개 숙인 재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텅 빈 시장 골목에 은은히 켜진 조명 아래에서 남자가 꾸는 꿈들은 평온하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영화 말미에서, 카메라는 불쑥 컴컴한 층계 위쪽으로 올라가 주인공을 비스듬한 부감으로 잡는다. 재기의 속마음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층집의 계단이 문득 생명을 얻은 것처럼 슬픈 눈으로 자신의 주인을 속절없이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