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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클로징] 망하고 망해도 살아남기
한 눈에 보는 AI 요약
영화 <서브스턴스>는 여성의 존재 자체가 공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 코랄리 파르자와 배우 데미 무어는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영화로 풀어냈다. 이들은 '먼저 망한' 경험을 통해 살아남아 이를 증언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말한다. 섭식장애 인식주간과 같은 움직임도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다. 먼저 망한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오는 2월24일부터 3월2일까지 진행된다. 이 행사가 처음 열렸던 해에 <삼키기 연습>의 박지니 작가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각각 섭식장애와 성형의 당사자이자 작가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섭식장애와 성형 둘 다 주로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외모와 관련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놀랍게도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어쨌거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우리가 이렇게 다 해봤고 이만큼 가봤으니 당신들은 부디…!

그즈음 나는 ‘선망국’(先亡國)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박 작가가 라이프 스토리 다이어리(Life Stories Diaries) 블로그에 쓴 글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신조어다. 검색하다보니 조한혜정 교수가 쓴 <선망국의 시간>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굉장히 앞서가는 선망국이죠.” 단박에 이해가 된다. 선진국(先進國)이 ‘먼저 발전한 나라’라는 뜻이니 선망국은 ‘먼저 망한 나라’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선망인’(先亡人), 먼저 망한 사람이었다. 박 작가는 이것을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먼저 도착했다는 깨달음”이라고 표현했는데 먼저 도착해서 먼저 깨달았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먼저 망한 어떤 이는 책을 쓰고, 또 먼저 망한 어떤 이는 영화를 만들며, 또 다른 먼저 망한 이는 그 영화에 출연을 하게 되는데….

영화 <서브스턴스>를 만든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50대에 접어들자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나고 자신이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력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배우 데미 무어는 말할 것도 없이 먼저 망해 본 여자다. 게다가 이 두 여자가 만나 만들어낸 영화조차 엘리자베스와 수라는 두 여자가 처절하게 망하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 속에 살가죽과 뼈, 피, 주사와 약, 음식, 비명과 날것의 소리, 공포와 광기, 불안 등이 없을 수 없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사실적인 묘사였다.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보디 호러’”라는 파르자 감독의 말은 이 영화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다.

끝까지 가고 또 가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결말을 보며 영화의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느꼈다. 먼저 망한 자는 살아남은 자여야 한다는 것을. 살아남아 그 망함을, 그 ‘디스토피아’를 증언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파르자 감독이 끝내 이 영화를 만들어냈고 무어가 결국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난해에 이어, 그리고 지난해에 이어, 기어이 올해 세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고 잘해내고야 말 먼저 망한 여자들, ‘잠수함토끼콜렉티브’에 뜨거운 응원의 마음(과 그 마음을 담은 후원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