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유리구슬>의 가사 한마디는 배우 이혜리를 위해 쓰인 문구가 아닐까. 작품 속의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리저리 긁힐지언정 구르기를 포기하지 않는 어느 자갈길의 영롱한 유리구슬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랬던 그가 시리즈 <선의의 경쟁>에서 처음으로 흑진주 같은 모습을 선보인다. 최상위층 자제들만 다니는 채화여고 3학년생 유제이(이혜리)는 고혹적이며 속을 알 수 없는 실권자다. 1등과 회장이란 단어로만 채워진 완벽한 생활기록부를 가진 그가 평범한 전학생 우슬기(정수빈)에게 먼저 다가간 건 학교 전체의 사건으로 남는다. 오직 한 여자에게만 웃어주고 말을 걸고 손을 내미는 여자의 광적인 매력은 이혜리의 살짝 웃는 입가와 은근한 터치에서 짜릿하게 발산된다. <선의의 경쟁>이 공개된 첫주에 만난 이혜리는 자신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음에 놀라워하며 또 대중이 자신의 변신을 어떻게 봐줄지 호기심을 보이며 일렁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선의의 경쟁>을 두고 나눈 이야기를 먼저 실었다. 이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선의의 경쟁’ 구도로 묶어 돌아봤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칠흑 같은 밤으로 자리를 옮겼어도 여전히 이혜리는 빛나고 있었다.
- 유제이는 이혜리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본 적 없는 캐릭터다. 이 점이 <선의의 경쟁>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맞다. 제이는 확실히 다른 결이었다. 대본을 통해 화려한 제이를 보는데 그동안 내가 가수 활동 때나 시상식에서만 잔뜩 꾸민 모습을 보여드렸지 작품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제이에게 확 마음이 갔다. 더 혹했던 건 제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이 친구의 행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캐릭터가 먼저 보이는 대본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큰 줄기를 따라가면서 읽고 전체적인 재미를 중요시하는 편인데 첫장을 열자마자 제이가 내게 그냥 뛰어들어와버리니까 신기했다.
- 각본과 연출을 겸한 여성감독과의 소통도 긴밀했을 것 같다.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작업에 앞서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톤이 어느 정도인지를 인지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 혼자 레퍼런스를 먼저 찾은 뒤 검토받기보다는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감독님에게 직접 여쭤본다. 그게 제일 빠르고 정확하니까. 김태희 감독님도 열정적인 분이라 호흡이 참 잘 맞았다. 촬영 들어가기 두세달 전부터 제이가 많이 들었을 것 같은 노래, 학교와 제이네 집 세트 등 배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전달해주셨다. 덕분에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엔 언니 제나 방이, 오른쪽엔 제이 방이 있고, 방 분위기는 이랬지’ 하면서 대본을 더 실감나게 읽었다. 실제 촬영에 들어가서는 이미 봤던 세트장이라 어색함이 덜했다. 원래 잘 안 하는 애드리브도 할 만큼 현장이 편했다.
- 채화여고의 일인자가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게 하는 유제이의 입학설명회 신에서부터 제이스러움이 드러난다. 서두르지 않는 말투와 걸음걸이, 꼿꼿한 자세가 완성하는 분명한 아우라가 있다.
내가 잡은 제이의 상은 범접할 수 없고 손을 뻗으면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제이를 계속 상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투와 자세가 만들어졌다. 한 꺼풀 더 들어가자면 그 모습이 제이에겐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완벽한 딸을 원하는 아빠(김태훈)가 만족할 만한 하나의 틀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 어떤 큰 상처가 제이의 내면에 자리한 게 분명한데 그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긴 걸로 짐작된다.
제이를 연기하는 데 있어 부녀 관계를 이해하는 게 우선이었다. 제이에게 아빠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니까. 늘 여유롭고 당당한 제이가 아빠 앞에서만큼은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제이가 느끼는 항상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후반부로 갈수록 커지는데 그 감정을 점진적으로 잘 표현하기 위해 제이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아빠가 어릴 때부터 자매를 비교했던 말과 행동이 제이에겐 굉장한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다. 그게 곧 제이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을 거고,
- 장면으로 직접 드러나기도 하지만 제이는 자기만의 아쿠아리움 안에 있는 캐릭터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갇혀 있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도 세상사 전반에 시큰둥하다.
다행이다. 그런 양극단을 다 가진 인물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제이는 언뜻 무조건 1등을 해야 하고 최상의 포식자가 되겠다는 맘을 품은 인물로 보이는데 사실 무엇에도 미련이 없는 친구다. ‘미련 없음’에서 오는 어떤 여유로움, 미스터리함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충분히 살리고 싶었다.
- 스타일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한 컨셉은 무엇이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냈나.
제이는 채화여고 상위 1%의 실세라는 설정이다.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성적, 집안, 외모,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예뻐 보이는 게 컨셉 아닌 컨셉이었다. 이목구비가 돋보일 수 있게 긴 생머리에 흑발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현대극에서 흑발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같이 다니는 슬기(정수빈)와 예리(강혜원), 경이(오우리)의 스타일이 무난한 편이라 그 안에서 돋보일 스타일링이 무엇일지 연구를 많이 했다. 학교 안과 밖에서의 시각적 대비가 필요하겠다 싶어 학교 밖 의상은 힙한 요소를 넣은 걸로 준비했다.
- 이번 작품에서 연기 방식이 달라졌다는 인상이다. 전체적으로 미니멀한데 특히 얼굴을 쓰는 데에 있어 그랬다. 표정 변화는 적지만 그 위로 미세한 감정이 다 지나간다.
제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디렉션에 신경을 많이 쓴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눈빛 하나로 모든 걸 전달하는 연기는 정말 어렵다. 여전히 어떻게 하는 거지 싶고.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표현 방식이라 그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컸다. 내가 잘할 거라고 믿고 그런 역할을 맡겨주신 감독님과 내 표정을 잘 잡아줄 촬영감독님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내 표정이 좋았다면 그건 상대 배우들의 공이 클 것이다. 눈치보고 두려워하는 리액션을 모두 잘해줬기 때문에 제이의 무표정에 레이어가 쌓일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 연장선상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압도적인 장악력을 연기해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성공한 입장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다고 보나.
아우라도 장악력도 배우 혼자서 ‘이제부터 만들어내겠습니다’ 하면 만들어지는 게 절대 아니다. 디테일한 대본과 현장 스태프의 노고에서 생겨난다는 걸 이번 도전을 통해 절감했다. 제이는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반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인데 내가 그 정도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그때 감독님이 “반 학생을 연기하는 신인배우들 모두 혜리씨 같은 배우를 꿈꿀지도 몰라요. 이제 시작하는 친구들이니 혜리씨에 대한 동경도 있을 거예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런 구체적인 조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입학설명회 신도 현장의 말들이 나를 살렸다. 쉽게 주눅 들지 않는 성격임에도 제이만 주목하는 몇백명의 좌중을, 그것도 영어 대사로 압도해야 하는 상황이라 쑥스러웠다. 분위기를 풀어주는 장난 섞인 말들이 오갔기에 소화할 수 있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왜 제이는 슬기에게 꽂혔을까.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제이에겐 슬기가 필요한 어떤 목표가 있다. 드라마를 자세히 보면 둘 사이에 교류가 없었음에도 제이는 슬기의 전화번호도, 슬기가 이전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었다는 것도 안다. 제이가 밝히지 않는 무언가를 슬기가 알게 되는 후반부에서 갈등이 심해지는데 거기서 오는 재미가 크다.
- 그렇다면 극 초반을 지탱했던 둘 사이의 섹슈얼한 긴장감은 갈수록 빠지는 걸까.
그 텐션은 끝까지 살지 않을까 싶다. 필요에 의해 시작했지만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제이의 감정도 변화한다. 슬기는 자신에게 계속 잘해주는 제이에게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고.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사이. 제이와 슬기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