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가장 좁은 땅 위에서 가장 조용히 치러지는 스포츠가 아닐까. 조훈현과 이창호, 두 바둑 천재가 치러온 명경기가 30여년 만에 재현된다. 바둑 신동으로 불리던 이창호(유아인)의 실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뒤 조훈현(이병헌)은 그를 직접 자신의 집에 데려와 수제자로 키운다. 조훈현 국수의 공격적인 기풍과 다르게 이창호 국수는 묵묵히 자신의 것을 지키는 방식을 고수하고 1990년, 제29기 최고위전 결승에서 조훈현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다. 김형주 감독은 사제지간인 동시에 수십년간 수백번의 대국을 치른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의 이야기에 매료돼 이들의 서사를 영화 <승부>에 담았다. 침묵 속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는 천재들의 수싸움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 바둑에 대해 잘 알고 있나.전혀 모른다. (웃음) 바둑 소재의 영화를 연출해놓고 민망한 대답이긴 한데, 솔직히 잘 모른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가 사제지간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이번에 조사해보니 두분이 거쳐온 대국과 삶이 드라마 같더라.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해 영화로 그려보고 싶었다.
- 실존 인물을 다루다보니 여러 자료를 살펴야 했겠다. 1991년 M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승부>를 주요하게 참고했다고.
한창 <승부> 초고를 쓸 때 해당 다큐멘터리가 유튜브에 업로드됐다. 이전에 한 기자가 하루 종일 대국장에 머물며 취재한 기사 내용을 읽었는데 글로만 봐도 재미가 상당했다. 그런데 영상으로 보니 당시의 담배 냄새나 긴장감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더라. 가장 중점적으로 참고한 건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의 자서전이다. 한국기원에서 발간한 <월간 바둑>도 1970년대 발간본부터 영화상 마지막 대국이 담긴 1990년대 후반의 발간본까지 전부 읽었다.
- 영화에선 이창호 국수가 신동 소리를 듣던 어린 시절, 조훈현 국수와 만난 시점부터 다룬다.
이창호 국수의 팬이나 바둑에 대해 잘 아는 관객은 과거 신을 보고 ‘어, 이거 이창호 아닌데?’ 싶을지 모르겠다. 영화와 다르게 실제로 이창호 국수는 어릴 때부터 과묵한 돌부처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서전에 따르면 바둑을 접하기 전엔 승부욕 넘치는 개구쟁이였다더라. 성인이 된 이창호와 대비를 주고 싶어 어린 시절의 그를 밝고 당찬 아이로 그렸다. 또 보통 천재가 아니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어린 이창호가 여러 바둑 연구생과 동시적으로 대국을 펼치는 장면, 조훈현이 내준 난제를 풀며 사제의 연을 맺는 과정 또한 각색해 넣었다.
- 영화적 재미를 위해 추가한 요소가 있는 반면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의 기풍과 성격 차이는 그대로 담아냈다.
두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게 중요했고, 때문에 캐스팅 과정에 공을 들였다. 조훈현 역에 이병헌 배우가 먼저 캐스팅이 된 뒤 이창호 역을 고민하던 차에 유아인 배우가 떠올랐다. 외모, 연기하는 방식, 무엇보다 이병헌의 아우라에 밀리지 않을 배우가 당시엔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두 배우에게 전했는데 디테일한 것까지 잘 연구해서 현장에 나타났다. 테스트 촬영을 하는 날, 세트장에 가벽 하나 세우고 분장을 마친 두 배우를 나란히 앉혔는데 깜짝 놀랐다. 이병헌 배우는 조훈현 국수의 습관 같은 잔동작을 전부 체화해왔고 유아인 배우 역시 메이크업을 최소화한 채 체중을 살짝 불려 어린 이창호 국수와 비슷한 외모를 만들어왔다. 그 순간 이미 그림이 완성되어 있음을 느꼈다.
- 바둑을 두는 손동작도 많은 연습이 필요했겠다.조훈현 국수가 ‘바둑돌만큼은 정석대로 쥐고 놓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하셨기에 배우들이 착수 연습을 엄청 했다. 현장에서도 8~10수 정도는 미리 인지한 채 그 수가 어떤 느낌인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강도와 스피드로 둬야 하는지를 익혀둬야 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 기원은 세트로 제작했나.지금은 사라진 울주군청 안에 기원 세트를 제작했고 그 시대의 느낌을 잘 살리고자 했다. 스승과 제자가 대결을 벌이는 공간은 격투기 게임의 케이지, 권투 경기의 링처럼 보기만 해도 숨을 못 쉴 것 같은 처절한 느낌이 들면 좋겠다고 미술감독님께 말씀드렸고 그대로 구현해주셨다. <승부>에서는 두개의 메인 대국이 치러지는데, 첫 대국에 비해 두 번째 대국이 펼쳐지는 곳은 따뜻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그 차이를 비교하며 보시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 메인이 되는 두 대국의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첫 대국은 경기 과정보다는 두 인물이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했다.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선 시간의 경과를 드러내는 게 필요했다. 승부의 방향을 잃은 채 머뭇대는 제자 이창호의 시간, 또 후반부에 수세에 몰려 당황하는 선생 조훈현의 시간의 대비를 주고자 했고 요동치는 감정의 시퀀스를 잘 표현하려고 했다. 비교적 천천히 흘러간 첫 대국과 다루게 후반부의 대국은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 중계를 보듯이 연출했다. 이창호 국수는 스승을 꺾은 뒤 1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조훈현 국수는 그런 제자의 타이틀에 도전한다. 두 인물 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뼘 성장한 채로 마주하기 때문에 소리 없이 치열하게 수를 다투는 액션 시퀀스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 바둑을 잘 아는 관객도, 모르는 관객도 이해하며 볼 수 있게끔 CG를 활용해가며 직관적으로 경기 장면을 그려냈다.
현재 바둑이 대중적이거나 다수의 흥미를 자극하는 스포츠는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알기 쉽게 대국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카메라앵글과 무빙을 다양하게 가져가고, 말한 대로 CG도 넣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대국은 실제 기보를 따랐고 프로기사님들의 자문도 구했다. 시사회 때 바둑을 잘 아는 분께서 실제 대국과 기보가 똑같다는 것을 알아채시더라. 누가 알아볼까 싶었는데, 무척 보람찼다.
- <승부>는 굳이 따지자면 조훈현의 영화라는 인상이다. 그만큼 조훈현 국수의 서사가 중심이 됐는데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만약 이창호 국수의 서사를 중심에 뒀다면 천재 신동의 이야기로 풀 수 있을 테고 그것도 충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내가 꽂힌 포인트는 조훈현 국수가 제자에게 패한 뒤 바닥을 치는 부분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일반적인 이치라고 생각하는데, 바닥을 치고 다시 정상에 서는 과정이 인간 승리처럼 보였다. 조훈현 국수가 영화를 보고 농담처럼 말씀하시더라. 본인이 바닥에서 다시 1인자 타이틀을 거머쥐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승부>에서 너무 짧게 그려지는 것 아니냐고. (웃음) 전적으로 동의한다.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조훈현 국수의 입장에서 영화를 풀기로 결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