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빛깔 (1968)
|79분|드라마
석류의 빛깔
하얀 바탕 위에 석류가 놓이고, 칼이 놓이고 그 밑으로 핏빛 액체가 번져간다. 남자의 발이 탐스러운 포도를 짓이기면 글씨가 기록된 석판 위로 흥건한 과육이 흐른다. “내게 있어 삶과 영혼은 고문이다.” 반복되는 나레이션과 극도로 탐미적이며 퇴폐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보여주는 칼과 장미. 이 영화는 ‘그저 한 시인의 인생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그렇다. 이건 그 자체로 시다. 흔히 ‘영상충격!’ 따위의 선전 문구가 적힌 영화들을 보면서 정말로 충격을 받은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흔치않은 충격의 집합 가운데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며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 있지만 나에겐 첫 자막 아래 보이는 배경의 강렬한 색상부터 마지막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까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는 작품이다. 극장에서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특정 장면만 충격적인 것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가 완벽한 충격이다. 굉장히 느리게 보여지는 배우들의 동작은 섬세함과 관능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청년 시절 시인의 열정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론 (나르시즘적인) 극도의 퇴폐미를 형성하는 듯하다. 남녀 배우는 마치 물결 위에 비친 형상을 보는 것처럼 닮아있는데 사실은 같은 사람이다. 이들이 하나로 결합하는 순간 숙명적인 억압과 구속이 벌어지는 듯 낯선 땅에서 황금새장에 갇힌다는 표현이 나온다. 감추어진 수면 아래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처럼, 끝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특히 결혼을 앞두고 난교를 상징하는 듯한, 여럿이 석류를 먹는 장면에선 사운드가 정말 게걸스럽다. 탐욕스럽다. 욕망이 느껴진다. 상징과 기호, 사운드만으로 이토록 선정적이고 퇴폐적일 수 있다니. 하지만 정작 시인은 그 게걸스러운 무리 옆에 소외된 채로 서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식의 장면들에 얼이 빠져버렸다. 추접한 느낌은 전혀 없고 얼핏 보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나 스틸사진 정도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사실 감독인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Sergei Paradzhanov)는 화가이자 시인이었다고 한다. “파라자노프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4)라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걸작을 가지고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당대의 새로운 재능이었지만 소련이 봤을 때 그는 퇴폐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영화, 한마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적인 창작 원칙과 위배되는 영화를 만드는 위험인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파라자노프의 다음 프로젝트가 될 시나리오들은 당국에 의해 연이어 거부당했고 오랜만에 완성된 차기작(<석류의 빛깔>, 1969)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재편집된 형태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공개될 수 있었다. 파라자노프의 수난은, 1974년 초현실주의적 작품의 제작, 동성애와 성병 유포, 자살에의 선동, 예술품 불법 거래 같은, 일부는 부적당하고 또 일부는 위조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되면서 심화되었다. 결국 그는 4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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