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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시네마] 추앙에 대하여 '나의 해방일지'
2022-04-29
글 : 유선주 (칼럼니스트)

매일 서너 시간씩 출퇴근으로 허비하는 경기도 도민 염씨 삼남매의 고충이나 미스터리한 알코올중독자 구씨(손석구)의 매력에 관해 종일 떠들 수 있지만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을 건너뛸 순 없다. 말수가 적은 막내 미정(김지원)이 아버지의 싱크대 공장과 농사일을 돕는 시간 외엔 술에 절어 사는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했을 때.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씨가 자기가 아는 그 뜻이 맞는지 사전을 검색하던 장면에 영문으로 리스펙트도 있던데 훨씬 가볍고 흔히 쓰이는 그 말은 어떨까? ‘날 리스펙트해요.’ 머릿속 <쇼미더머니>를 재빨리 떨쳐냈다. 추앙 때문에 염미정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드라마를 찬찬히 다시 보며 미정의 시선을 따라간다. 출근길 지하철 창밖으로 ‘해방교회’가 스쳐 갈 때는 그 풍경이 마음에 가라앉아 있다가 사내 동호회 가입을 거부하는 직원끼리 동호회를 만들면서 ‘해방클럽’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겠구나 싶고. 삼남매의 동네 친구 현아(전혜진)가 갈망, 갈구, 고갈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니까 어휘나 말투가 미정에게 옮아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추앙도 언젠가 현아가 썼던 단어일 수도 있겠지. 이 사람의 말이 저 사람에게 고이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번지면서 각자의 맥락을 만들어낸다.

보통 다수의 인정으로 성립하고 일방으로 향하는 추앙을 구씨 한 사람에게 요구했던 미정은 주말에 밭일을 하다가 당신도 추앙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한다. 무슨 추앙을 농촌 품앗이처럼 다루는가 싶어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뱉은 사람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던 단어가 둘 사이에 말이 오가면서 윤곽이 잡힐 때가 있다. 본래 뜻을 벗어나 범주를 넓히고 의미가 덧붙고 관계 안에서 재정의되기도 한다. 바람에 날아간 미정의 모자를 주우러 날 듯이 점프한 구씨는 그게 추앙이었단다. 말과 관계가 중노동이던 사람들끼리 둘만의 맥락 안에서 없던 용례를 만드는 과정. 어떤 대화는 자문자답으로는 가지 못하는 자리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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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의 휴식> / 왓챠

미정은 사내 인간관계에서 겉돌고 무시당하며, 기정은 머리카락 무게도 버거울 정도로 녹초가 되어 빡빡 밀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끊임없이 주변 분위기를 읽고 적당한 답을 고르느라 진이 빠진 나기(구로키 하루)는 회사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지고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고자 휴식기를 갖는다. 그의 해방은 매일 아침 찰랑거리게 손질하던 악성 곱슬머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나의 아저씨> / 티빙, 넷플릭스

뉴욕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서울에 태어났으면 달랐을 거라는 창희의 푸념에 미정은 “서울에 살았으면 우리 달랐어? 난 어디서나 똑같았을 것 같”다고 한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에서 서울 사는 대기업 부장(이선균)도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라고 한 적이 있다. 여기가 아닌 어디였어도 느낄 근원적인 공허를 지고 사느라 지친 사람들은 어딘지 조금씩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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