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우연으로 점철된 세상을 영화로 상상하기, 그리고 나와 당신 사이의 가능성들 '우연과 상상'
2022-05-04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우연과 상상>의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메이코(후루카와 고토네)는 귀갓길 택시 안에서 친구 츠구미(현리)의 연애담을 듣던 중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린다. 이후 전 남자 친구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를 찾아간 메이코는 그에게 뜻밖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늦깎이 대학생 나오(모리 가쓰키)는 대학교수이자 아쿠타가와상 수상 소설가인 세가와(시부카와 기요히코)를 방문해 그의 소설 일부를 낭독한다. 두 사람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번>에서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우연히 옛 친구(가와이 아오바)와 마주친다. 친구의 집에서 차를 얻어마시게 된 나츠코는 오랜 시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등 근 몇년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작가에게 매혹되어온 관객이라면 더없이 기다려왔을 신작이다. 혹은 아직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만나지 못했던 이에게는 입문작으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3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형 영화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한 동시에, 감독의 전작들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와 감응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첫 번째 에피소드의 자동차 대화 신을 보며 누군가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붉은색 자동차 내부를 떠올릴 수 있으며,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얄궂은 관계의 역학은 <해피 아워> 속 복잡하게 뒤엉킨 인연과 닮았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인물들간의 기묘한 동일성과 차이는 <아사코>의 그것과 겹친다. 말하자면 <우연과 상상>은 범상한 일상 속에 불쑥 틈입하는 우연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균열과 파국을 예리하고 세밀하게 포착해온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과 사람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기다.

<우연과 상상>이라는 영화 세계를 추동하는 것은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흐름과 축적 그 자체다. 예컨대 첫 번째 에피소드는 크게 2번의 대화, 메이코와 츠구미의 대화와 메이코와 카즈아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는 각각의 장면에서 두 인물이 말을 주고받으며 생겨나는 은근한 맥락과 징조를 통해 날카롭고도 밀도 있게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그렇게 2번의 대화가 밀고 당기듯 영화에 팽팽한 긴장감을 쌓아올린다면, 마침내 메이코와 츠구미, 카즈아키 세 사람이 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장면의 세 번째 대화는 우연이 촉발시킨 충동을 극한으로 몰고 가 예기치 않은 정념을 마주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 또한 주인공 나오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들이 극을 이끌어나가는데, 이 에피소드에서는 특이하게도 인물들간의 대화 못지않게, 나오의 문학 작품 ‘낭독’ 장면이 큰 힘을 발휘한다. 감독의 전작 <해피 아워>에서 극중 인물의 낭독이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읽는 것이었다면,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나오는 교수이자 소설가 앞에서 그의 소설 일부를 읽는데, 관객은 앞 장면을 통해 그 행동에 모종의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기에 긴장감은 극대화된다. 그러나 제목에서 예견할 수 있듯 ‘(교수실의) 문을 열어두었’기에 사건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모든 것이 안온하게 마무리되었다고 느낀 순간, 다시금 우연이 끼어든다.

앞의 두 에피소드가 ‘우연’을 소재로 입가에 쓴웃음을 감돌게 만든다면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다시 한번>은 조금은 다른 분위기로 ‘우연’이 빚어내는 기적 같은 순간을 들여다본다. 앞 두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불시의 조우는 인물들의 마음의 바다에 잔잔한, 그러나 강한 파문을 일으키고 이는 곧 은밀한 사랑과 비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와 조우하는 놀라움을 즐겨’달라는 감독의 전언대로, <다시 한번>의 예상치 못한 결말은 잔잔하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CHECK POINT

에릭 로메르

“단편영화 작업은 (장편과 장편 사이에서) 창작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에릭 로메르의 옴니버스영화 <파리의 랑데부>(1994)는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봉준호 감독 또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의 스페셜 대담에서 에릭 로메르를 언급한 바 있다.

베를린, 칸, 아카데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과 상상>으로 지난해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열린 제74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그는 <드라이브 마이 카>로 각본상을 수상했고, 같은 작품으로 올해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수상 실적만으로 영화와 감독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가 2010년대를 기점으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한명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여성배우들

<해피 아워>의 네 주역과 <아사코>의 가라타 에리카, <드라이브 마이 카>의 박유림과 미우라 도코까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여성 캐릭터와 그를 연기하는 여성배우들에겐 수수하고 담백한 분위기 틈새로 잊히지 않는 개성과 강단, 특별함이 배어난다. <우연과 상상> 속 주연 여성배우들 또한 ‘하마구치’스러운 여성 캐릭터를 놀랍도록 잘 소화하며 극에 몰입감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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