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전주국제영화제]
JeonjuIFF #5호 [인터뷰] '유랑의 달' 이상일 감독 X 홍경표 촬영감독 대담
2022-05-02
글 : 조현나
사진 : 오계옥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포착하다

빗물이 떨어지는 사라사의 책 위로 그늘이 진다. 사라사가 올려다본 곳엔 우산을 든 후미가 서 있다. 얹혀사는 친척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사라사는 후미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몇 달 뒤 후미는 아동유괴죄로 체포되고, 사라사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시선을 감내하며 성인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사는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다시 후미를 마주한다. <분노>의 이상일 감독이 <유랑의 달>로 돌아왔다. 나기라 유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사랑이나 가족애와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히로세 스즈, 마쓰자카 도리가 주연을 맡고, <기생충> <곡성> <버닝>의 홍경표 촬영감독이 합류하면서 작품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 또한 높아졌다. 불같은 에너지로 작품에 전력을 다하는 이상일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어떻게 합을 맞춰갔을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두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다.

- <기생충> 촬영 현장에서 두 감독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들었다.

이상일 전주국제영화제에 영화가 초대돼서 한국에 왔는데, 그때 마침 전주에서 <기생충>이 촬영 중이었다. 현장에서 홍경표 촬영감독을 만나 인사를 드리니 <분노>를 잘 봤다고 말씀하시더라. 굉장히 감사했다. 언젠가 꼭 홍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 작품이 좋았다고 하시니 ‘꿈이 이뤄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홍경표 <분노>의 편집, 스토리를 끌고 가는 방식 등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정말 힘 있는 영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작업이 끝난 뒤에 ‘<유랑의 달>을 같이 하고 싶다’고 봉준호 감독을 통해 연락을 받았고, 그때부터 이상일 감독과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분노>에 이어 다시 한번 원작이 있는 작품을 택했다. 소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이상일 현대사회를 그려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소위 평범하거나 옳다는 사회적 기준점을 벗어난 사람들에 관해 SNS 상에서 맹렬히 비난하는 상황이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하는 후미와 사라사의 관계성을 다뤄보고 싶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선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 홍경표 촬영감독은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석했나.

홍경표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압축적으로 잘 정리한 시나리오였다. 인물들의 밀도 높은 감정, 정서를 극대화하는 공간, 자연과 어우러지는 분위기 같은 것에 집중하며 읽었다. 이상일 감독의 생각을 듣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토대로 어떻게 구체화시키면 좋을지 대화를 많이 나눴다. ‘100% 스토리보드 없이 찍고 싶다’는 이상일 감독의 의견에 따라 작업했고 그래서 날씨의 변화 같은 걸 더 기민하게 포착하려고 했다. 스토리보드가 없으니 시간의 압박이 생겼지만 그만큼 영화가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유하면 즉흥적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느낌이랄까. 신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쾌감이 있었다.

- <유랑의 달>은 로케이션이 중요한 작품이다. 도쿄와 나가노를 주요 배경지로 삼은 이유는.

이상일 대부분 나가노에서 찍고 도쿄, 시즈오카, 요코하마에서 조금씩 추가로 촬영했다. 영화의 배경은 대도시와 시골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도시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곳으로 설정했다. 자연 풍광도 놓칠 수 없었다. 생활 반경 안에 호수와 산이 있고 그 위에 달이 떠있는 곳. 그런 환경에 두 사람이 존재하는 그림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 원작에선 후미와 사라사가 동물원으로 놀러 가는데, 영화에선 호수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홍경표 그 로케이션은 정말 잘 바꿨다고 생각한다. 초반부터 이상일 감독이 ‘이 영화에서 공기의 흐름, 특히 물의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그 의도와 잘 맞아떨어지는 장소였다.

- 후미와 사라사가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카페에서 재회할 때, 두 인물을 공간의 양 끝에 배치한 뒤 카메라를 패닝하며 서서히 보여준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강하게 다가왔다.

이상일 두 사람의 거리감이 영화의 주요한 요소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는지에 관해 정말 많은 상상을 했다.

홍경표 스토리보드가 없기 때문에 인물을 어디에 둘 것인지, 카메라를 픽스할지 말지 계속 대화하면서 찍었다. 카메라를 패닝해 찍으니 감정이 물 흐르듯 움직이며 더 잘 전해지더라. 그래서 후미의 카페에서 재회할 때 한 번 더 보여주면 좋겠다고 자연스레 합의가 됐다. 그런 식으로 영화 안에서 반복되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 팬데믹 시기에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밟아가야 했다. 로케이션 헌팅 등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

홍경표 평소에 장소 헌팅을 꼼꼼하게 하는 편인데 자가 격리 기간과 겹쳐서 어쩔 수 없이 줌으로 진행해야 했다. 이상일 감독이 카메라로 직접 찍어 보여주며 ‘여기 어떠냐’고 하면 내가 보고 같이 판단하는 식이었다.

이상일 휴대폰으로 영상통화하면서 라이브로 보여줬다. (웃음)

홍경표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할 법한 공간들만 골라서 보여주더라. ‘나와 보는 눈이 비슷하구나’라고 느껴 안심했다.

이상일 가장 힘들게 찾은 게 후미와 사라사의 아파트였다. 놀이터에서의 거리감이 베란다 벽 하나 정도로 좁혀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장소를 찾았다. 그런데 팬데믹 시기라 도저히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빌릴 수가 없더라. 게다가 영화에 등장한 곳처럼 베란다 단면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디자인된 아파트는 일본에서 굉장히 드물어서 나가노에서 겨우 찾았다.

- 이번 작품에서 빛을 신경 많이 쓴 게 느껴졌다. 실내 공간부터 말해보자면 후미의 카페와 집, 앤티크 가게 모두 조도를 낮춘 뒤 조명을 다양하게 활용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상일 홍 감독님이 인물을 찍을 때 인공적인 빛을 활용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주의를 기울였다.

홍경표 촬영할 때 빛을 중요시하고, 너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되도록 빛을 자연스럽게 쓰려고 해서 어둡다고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을 것 같다.

- 일본의 광량이나 색온도와 같은 요소는 한국과 어떻게 달랐나.

홍경표 공기도 빛도 좋다는 걸 가장 크게 느꼈다. 석양이 지는데도 반대편 하늘이 여전히 밝은 풍경을 일본에 와서 처음 봤고 무엇보다 매직아워 시간이 길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하늘이 푸르게 빛나는 시간이 한국보다 훨씬 길다.

- 사라사와 후미가 베란다에서 대화하는 신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이 내밀한 마음을 꺼내놓는 순간인데, 매직아워로 인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이상일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홍 감독님이 ‘베란다 신은 반드시 매직아워일 때 찍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매직아워가 짧다 보니 총 3일에 걸쳐 그 신을 촬영했다.

홍경표 정서적으로 잘 살아야 했기 때문에 매직아워를 포착하는 게 핵심이었다. 배우의 양쪽 얼굴을 고루 찍어야 했는데,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쪽 아파트에서 저쪽 아파트로 넘어가야 했다. 일본 스태프들이 고생이 많았지. 아마 그런 방식으로 촬영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 인물의 감정과 조응하는 장치들도 눈에 띄었다. 가령 비 오는 날, 후미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와 달리 사라사가 건널 땐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점멸한다. 사라사의 감정과 불빛이 잘 맞아떨어졌다.

홍경표 짧지만 중요한 신이었다. 후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사라사가 후미의 뒤를 쫓아가는 과정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져야 했다. 처음에는 횡단보도에서 촬영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일 감독이 ‘횡단보도의 패턴을 보여주면서 직부감숏으로 촬영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줬다.

이상일 이 영화에서 큰 크레인을 사용한 유일한 장면이다. (웃음) 말한 대로 신호등의 불빛이 점멸하는 게 사라사의 감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돼야 했기 때문에, 깜빡이기 시작하는 타이밍에 사라사가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차례 타이밍을 맞춰보았다.

- <분노>에서 함께 했던 히로세 스즈, 최근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마쓰자카 도리와 합을 맞췄다.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이상일 <유랑의 달>을 영화화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히로세 스즈를 떠올렸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 성장한 사라사를 잘 이해하고 표현해 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쓰자카 도리는 항상 깨끗한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우다. 옆에서 말없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 주는 토리를 잘 연기해 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홍경표 히로세 스즈는 다른 작품에서 많이 봤는데 마쓰자카 도리는 처음 보는 배우였다. <고독한 늑대의 피>라는 작품을 찾아보고 갔는데, 막상 카메라 테스트하는 날 보니 ‘이 배우가 그 배우가 맞나’ 싶었다. 10kg 정도 살을 빼왔고 눈도 묘한 느낌을 줬다. 영화를 위해 이미 자신을 만들어왔더라. 현장에서도 집중력이 좋았다.

- 마지막으로, 현장의 동료로서 함께 한 소감을 이야기해 준다면.

이상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홍 감독님처럼 커리어가 많은 분이 <유랑의 달>에서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구나 하는 것도 새삼 다시 느꼈다.

홍경표 <유랑의 달>은 내가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작품이었다. 일본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여러 촬영 방식을 활용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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