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8일 열린 AVACI 연례 총회 오픈 콘퍼런스 현장. DGK와 AVACI가 한국 저작권법 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창작자의 권리 보호에 취약한 한국영화계는 음악·방송업계나 해외 주요 영화산업국에서는 당연시되는 영상물의 부가적 사용에 따른 저작권료(비례보상액)에 관한 법적 보장이 없는 상태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5월11~20일 서울 일대에서 시청각물창작자국제연맹(AVACI) 총회가 열렸다. 글로벌 K콘텐츠의 미래를 전망하기에 앞서 정비되어야 할 창작자의 공정보상권에 관해 첨예한 논의들이 오갔다. 감독 대담, 전세계 저작권법 관계자들의 오픈 콘퍼런스, 한국 문화창조산업 전망과 창작 환경을 진단하는 포럼 등에서 전개된 주요 현안과 쟁점들을 소개한다. AVACI 총회를 유치하고 ‘공정한 보상 캠페인’에 힘쓰고 있는 민규동 한국영화감독조합(DGK) 대표가 직접 저작권법 개정의 필요성을 알리는 인터뷰도 함께 전한다.
방송 작가와 가요 작곡가는 받지만 영화감독은 못 받는 것이 있다. TV에서 드라마가 재방·삼방되고, 노래방을 찾은 손님이 곡을 입력하면 창작자에게 자동적으로 분배되는 비례보상액, 바로 저작권료다. 음악계와 방송가에선 익숙한 이 개념이 OTT 플랫폼을 통해 끊임없이 작품이 재생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영상 창작자들에겐 여전히 해결하기 힘든 난제로 남아 있다. 국내 현행법상 영상저작물에 관한 특례(저작권법 제100조 1항, “영화 제작에 협력한 모든 사람의 저작재산권은 제작자에게 양도한 것으로 추정한다”)에 의거, 특약이 없는 한 영상 창작자는 저작권을 제작사에 양도한다는 추정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또 제작자는 저작권 일부 또는 전부를 다시 투자배급사에 양도하는 관행이 굳어진 지도 오래다. 한국 감독들의 경제적 보상에 관한 문제는 올해 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의 사례로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 제작사가 저작물 수익을 일체 관리하는 관행상 황동혁 감독이 흥행수익을 분배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올해 2월24일 열린 DGK 시상식 디렉터스 컷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옥자>(2017)의 경우 넷플릭스와 미국작가조합(WGA)이 맺은 협약에 따라 재상영분배금을 받았다고 밝혔다. 할리우드의 창작자 조합은 스튜디오, 플랫폼과 맺은 단체 협상안이 관철되어 있고 이를 통해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지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황동혁 감독은 봉준호 감독처럼 조합원이 아닌 데다 이른바 매절 계약으로 인해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만들고도 수익배분 구조가 다르게 적용된 셈이다.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DGK는 공정한 보상을 위한 법제화에 성공한 여러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식 정책 모델을 연구하고 AVACI 총회를 통해 세계 각국의 사례 수집에 나섰다. 민규동·윤제균 감독이 공동 대표로 운영하며 봉준호, 박찬욱, 최동훈, 이준익, 황동혁 등 400명 이상의 영화감독이 소속된 DGK는 1987년 개정 이후 멈춰 있는 국내 저작권법이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과 글로벌 OTT의 대두에 발맞춰 영상 창작자들의 권리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한국영화감독은 무엇으로 먹고사는가: 살아남아야만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주제로 연단에 선 강대규 감독(<담보> <하모니>).)
(콜롬비아 작가협회 대표로 발제한 작가이자 배우 알렉산드라 카르도나 레스트레포.)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위하여
5월11일 저작자 공정보상권 법제화 포럼을 시작으로 5월16~20일 5일간 AVACI 총회의 본격적인 행사가 열렸다. 5월16일 마련된 첫 대담, ‘대담한 영화감독들: 국경을 넘어 영상 저작자의 기본권을 말하다’에는 아르헨티나감독조합 사무총장이자 AVACI 회장인 호라시오 말도나도 감독, DGK 공동 대표인 윤제균·민규동 감독, <프랑스여자>를 만든 김희정 감독이 참석했다.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위한 영상물 공정보상권 시스템 도입을 논의한 이날 윤제균 감독은 “한국과 달리 유럽·남미에선 영화를 방송 또는 상영하는 플랫폼 기업이 감독·작가에게 일정 부분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과의 차이는 물론 한국 감독들이 받을 수 있는 해외 저작권료의 존재 자체를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국내 실정의 열악함을 전했다.
5월18일 열린 오픈 콘퍼런스에는 한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아제르바이잔, 크로아티아, 인도, 마다가스카르, 프랑스,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의 영화감독, 저작권법 관계자가 행사장을 채웠다. 신규 영상물 집중관리단체(CMO),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등이 창작자에게 필수적인 도구로서의 저작권 권리 발전에 관해 발표했고, 세계 각 지역별로 영상물 저작자 권리의 수준이 어떠한지 보고하는 현황 평가도 이뤄졌다. AVACI 집행위원인 이윤정 감독은 “영화가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인식, 제작사의 이익이 작가·감독에게 연결될 것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창작자를 위한 정확한 안전망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4년 가까이 국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입법이 지지부진한 사이 DGK는 해외 저작권 관리 단체들과 협약을 맺고 해외 저작권료 수집에도 나섰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에는 프랑스 저작권집중관리단체(SACD)를 통해 박찬욱, 봉준호, 연상호, 홍원찬 감독 등이 프랑스에서 발생한 저작권료 일부를 받았다. DGK는 순차적으로 스페인, 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신탁업체에서 저작권료를 받을 예정이다. 한국에 송금처가 마땅치 않아 십수년간 쌓여 있던 저작권료는 약 5~6년으로 책정된 신탁 기한이 지나면 공적 자금으로 전환되어 사실상 사라진다. 또 베른협약에 의거한 호혜 평등의 원칙에 따라 한국이 해외 작품의 방영 시 발생하는 저작권료를 저작자에게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 국가에서도 협약을 보수적으로 해석해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금액만을 돌려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해외에서 한국 감독의 작품이 상영될 경우 신탁기관을 통해 일부라도 저작권료를 징수할 수 있지만, 국내 상황은 묘연하다. 호라시오 말도나도 AVACI 회장은 아르헨티나감독조합의 역사를 예로 들며 낙관적 입장을 전했다. 1958년 창립한 아르헨티나감독조합은 2001년 해외 저작권료 수집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아르헨티나 국내 저작권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그는 “연맹국이 창작자 공정보상권을 법제화할 수 있도록 전세계 창작자들이 연대하면 변화는 일어난다”라고 발언했다.
(5월20일, AVACI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K콘텐츠의 중심,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들다른 매체, 공동의 작업’ 토크가 열렸다. 이다혜 <씨네21> 기자, 김보통 작가, 홍원찬 감독, 한지완 작가(왼쪽부터). )
저작권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공정한 재산권
2022년 DGK가 실시한 창작자(감독) 실태 조사(응답자 371명, 남성 80%, 여성 20%)에 따르면 영화감독들의 최근 2년간 연출료 연봉 환산액은 전체 70%가 2천만원 이하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중 2년간 0원(없음)으로 대답한 비율이 39.7%로 가장 높았고 30대 감독들의 저소득 경향이 특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합원의 73% 이상이 작품 외 경제활동으로 수입원을 충당했으며, 17%만이 공정보상(Fair Remuneration) 개념을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저작권의 포괄적 양도가 아닌 이용 허락, 2차 부가시장 총매출액에 대한 비례적 보상 등에 관한 특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는 조합원은 10%에 그쳤다.
DGK는 저작권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공정한 재산권이라는 기본 전제를 토대로, 저작물 사용에 대해 소비자가 지불한 사용료의 일정 비율을 비례보상액(저작권료)으로 징수할 수 있도록 저작권법 개정안을 도입하기 위해 시도 중이다.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해 저작료와 관련된 저작권법 일부 개정이 필요하다”라며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해 연내 발의와 상임위 통과를 목표로 힘쓰겠다”고 전했다. K콘텐츠의 글로벌 흥행이라는 헤드라인 이면에는 창작자들의 수익 양극화, 특히 20~30대 젊은 창작자들의 극심한 경제난이 자리하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융복합적인 제작·유통 양상을 띠는 영상 콘텐츠 시장의 특성상 산업 내부의 다각화된 이해관계는 점점 더 첨예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이 프랑스를 필두로 한 국제적 기준에 근접한 음악산업계마저 공연자(실연자)의 법적 권리가 불공정한 상황을 새롭게 논의하고 있는 맥락과도 연결된다. 인터넷 플랫폼이 팽창할수록 저작물의 권리자 일체가 공정한 수익을 분배받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의 필요성은 시급해질 수밖에 없다. 감독, 작가의 공정한 권리에 대한 산업 내 각 주체의 협의, 그리고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