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상현(송강호)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브로커> 팀의 트럭은 지체 없이 달리고 있다. 지난 달 27일 칸 프리미어로 시동을 건 그들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고 돌아온 지 열흘 만에 한국 극장가에 도착했다. 덕분에 <브로커>를 일찍 만나본 관객들은 알 것이다. 이 작품이 힘주어 건네는 부드러운 메시지는 이동과 이동 사이에, 불 꺼진 모텔 방이나 공중의 놀이기구 안에서 전해진다는 것을. 촘촘한 일정으로 바쁜 <브로커> 팀의 이야기도 비슷할 테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말하지 못한 감상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맺어졌을지 모른다. <씨네21>은 그 틈을 비집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배우 강동원의 대화를 주선했다. 일본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눈 후 7년 가까이 <브로커>를 키워온 그들이다. 다른 언어를 쓰면서, 다른 작업을 병행하면서 말이다. 국내 개봉을 일주일 앞둔 시점, 감독과 배우는 줌(zoom)을 켜고 그동안 못 다한 얘기를 기다렸다는 듯 주고받았다. 작은 모니터를 휴게소 삼아 <브로커>의 오랜 여행기를 들려준 두 사람의 줌터뷰는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본 기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X 강동원, <브로커>를 말하다 ①>에서 이어집니다.
마음이 배어나오는 마법 같은 순간들
*이 기사에는 <브로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강동원 감독님이 러프한 시나리오 초고를 넘겨주셨을 때도 떠오릅니다. 제가 읽어보고 디테일한 피드백을 드렸던 기억이 나요. 감독님 영화 속 대사처럼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는데, 제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이야기 드렸던 것 같네요.
고레에다 동원씨의 피드백을 받고 제가 확신을 가진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브로커들의 여정과 더불어 두 여성, 그러니까 소영(이지은)과 수진(배두나)이 어머니가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것, 동시에 동수(강동원)가 어머니를 용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브로커>는 결국 어머니를 둘러싼 이야기라는 것을 제가 느끼게 됐거든요. 동원씨의 피드백을 통해 얻은 힌트입니다.
제가 원래 배우들에게 역할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거나 주문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보고 느낀 것을 발전시켜나가길 즐기거든요. 그런데 동원씨를 보니 아이와 진짜 잘 놀아주더라고요. 실제로 해진이(임승수)도 동원씨를 잘 따랐고, 동원씨가 우성이(박지용)를 안아줄 때도 전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실제 동원씨 모습을 영화에 잘 살리고 싶었습니다.동수라는 인물은 어릴 적부터 시설에서 자랐는데, 동수가 그 안에서 동생들을 잘 챙겼을 거라고 짐작하게 되잖아요. 소영은 그동안 우성이를 잘 돌보지 못했을 것이고, 상현(송강호)은 분명히 기존 가족 내에서 육아에 동참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동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강동원 저도 동수는 보육원에서 자랐으니 어린 아이들을 많이 돌봤을 테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점을 표현하려 했어요. 그리고 감독님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웃음) 감독님 영화를 보면 아역 배우들이 너무 빛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해진이를 연기한 승수와 감독님이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으니 감독님이 못해주는 부분을 제가 대신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많이 놀아주려했죠. 그 친구에게 최대한 행복한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고레에다 그 마음이 영화에도 배어나왔다고 느꼈거든요. 영화 후반부에 윤씨가 호텔로 찾아오는 장면에서도, 상현이 해진에게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타이른 다음 동수가 해진을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똑바로 하라는 식으로 행동하잖아요. 아이를 그렇게 거칠게 당긴다는 것은 어떤 신뢰 관계가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거든요. 그 와중에 해진은 이렇게 축구공 위에 올라가있고. 사내아이들을 보는듯한 그 느낌이 저는 정말 좋았어요. (웃음)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있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분위기가 영화에서 잘 스며들었어요.
강동원 저도 친하지 않은 아역 배우에게는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촬영장에 아이 부모님도 계시는데 눈치가 보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둘이 워낙 스킨십이 많았고, 목도 조르면서 놀았다보니 그런 게 가능했네요.
고레에다 맞아요. 소영과 함께한 관람차 장면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어요. 저는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하고, 무척 잘 나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제가 그 관람차 안에 함께 탈 수 없었잖아요. 홍경표 촬영감독님만 거기에 계셨고요. 관람차가 위로 올라갈수록 무전 전파가 끊어져서 소리도 잘 들을 수 없었어요. 촬영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억울했죠. 게다가 홍경표 촬영감독님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소감을 별로 말씀 안 해주시잖아요. 만날 바람이 잘 들었다, 빛이 좋다고만 하시지. (웃음) 그래서 촬영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혹시 동원씨는 이지은 배우와 함께 그 신을 찍으면서 ‘아, 지금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으셨나요? 영화에는 첫 번째 테이크를 사용했거든요.
강동원 촬영 전날, 관람차 안에서 동수가 소영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는 장면이 조금 더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영의 눈물이 흐르기 직전에 눈가를 가리고 싶었고, 그전까지 기다렸다가 흐를 때 딱 가렸던 건데, 타이밍이 진짜 잘 맞아서 마법 같은 구간이 됐죠. 그 신은 정말 담백하게, 그저 진심을 다해서 연기했어요. 어떤 기교도, 기술도, 시선 이동도 없이. 그 장면에서 소영이의 감정은 많이 올라오지만 동수는 담담하게 있으면서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우리에게 10분, 20분밖에 시간이 안 주어졌잖아요. 그런데도 촬영이 잘 돼서 참 좋았어요.
고레에다 나는 그 신이 참 좋은데 그런 식으로 눈을 가리면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 같다는, 뉴스에서도 그렇게는 안 한다는 의견들이 있어서 어쩌나 싶었죠. 그래도 주변에 그 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찍기 잘 한 것 같습니다. 이 신은 소영에게도 중요하지만 소영을 통해 어머니를 용서하려는 동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죠. 그런 동수의 말을 듣고 소영의 마음도 움직이잖아요. 정말 마법 같은 일이 그 신에서 일어났는데,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더욱 아쉽습니다.
강동원 감독님까지 관람차 안에 들어오셨으면 더워 죽었을 수도 있어요! 진짜 더웠어요, 그 안이! (웃음)
고레에다 그동안 동원씨에게 제가 좋아하는 동수의 장면들에 대해 얘기를 못 했던 것 같아요. 오늘은 원거리에 있기 때문에 솔직하게 마음을 더 표현하고 싶은데요. (웃음) ‘동수가 이렇게 자라왔구나’하고 느낀 장면이 있었어요. 봉고차 안에서 동수가 상현과 주먹을 맞대는 것과 소영에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듣기 이전에 동수가 불을 끄는 모습을 좋아해요. 그걸 보면서 동수가 어떤 아이였는지 떠오르는 것 같았고, 그 순간만큼은 동수가 아이로 돌아간 듯해 저도 같이 ‘심쿵’했어요. 애잔한 느낌도 받았고요. 동수는 아마 평생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라왔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다는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강동원 동수와 상현은 같이 브로커로 일하면서 서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왔겠죠. 그런데 드디어 두 사람의 마음이 맞는 순간, 동수가 무척 기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동수는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제일 듣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보육원 관계자분들을 만나 뵈면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고레에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네요! 언젠가 송강호씨가 동원씨는 길 잃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졌다고 얘기했는데요, 그건 제가 그동안 동원씨가 연기한 캐릭터들을 보며 강하게 느낀 인상이기도 합니다. 장르영화에서도 그랬습니다. <늑대의 유혹> <군도:민란의 시대> <의형제>에서도요. 혈육과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의 슬픔과 분노가 눈빛에 나타날 때,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브로커>에 그 이미지를 따왔다기보다는, 동원씨의 매력을 뒷모습에도 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기존의 이미지에서 한발 벗어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도 고민했죠. 저로서는 성공했다고 자부하는데 팬들은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네요. <브로커>가 관객이 강동원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함께 움직여준 강동원 배우에게 감독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동원 여태껏 이런 얘기를 제대로 해보지 않았네요. (웃음) 감독님도 너무 고생 많으셨고, 같이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언젠가 감독님과 성인판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같은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요? 앞으로 또 작업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이렇게 대화할 수 있어 너무 즐거웠고요, 앞으로의 일정도 즐겁게 마무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