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가족은 곁을 지켜주는 관계의 유지와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머물다 떠나갈 때, 또 다른 이가 개입한다. 꼭 가족이 아닐수도 있어서, 그것은 흡사 한쪽 문이 닫히는 순간 다른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평단과 관객의 <브로커>에 대한 평가 내리기가 한창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고 작품은 아니다, 라는 쪽으로 평가가 모이는 모양이다. 동의하는 바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도 고레에다의 최고작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의 영화답지 않게 몇몇 엉성함이 돌출하는 영화다. 거기에는 언어를 포함한 문화와 환경의 차이가 적잖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이질적인 부분도 한몫한다. 브로커를 쫓는 두 형사의 묘사에서 드러나는 빈틈은 일본 영화 속 유머였다면 더 이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조차 고레에다의 섬세함을 제거할 정도는 아니다. 언어가 바뀌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감정의 결은 여전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 영화는 인물 사이에서 주고받는 정서적 등가물들에 관한 영화다. 부산에 비가 왜 그리도 내리겠나. 고레에다가 내내 추구해온 주제 내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브로커>는 실패라는 평가를 쉽게 내리지 못할 작품이다.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
<브로커>는 비가 오던 어느 날 밤 소영(이지은)이 가파른 골목을 지나 교회의 입구를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베이비박스 앞에 아이를 두고 떠난다. 영화가 이어 진행될 동안 나는 다른 영화에서 보았던, 똑 닮은 교회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리고 같은 부산에서 찍은 <영하의 바람>(2018)을 생각해냈다. <영하의 바람>에서 영하는 목회자가 꿈인 엄마의 짐으로 묘사된다. 언젠가 어린 시절에 영하를 떠나보내려 했던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딸의 곁을 기어코 떠난다. 엄마는 ‘세상은 혼자 견뎌내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같은 교회가 나오는 두 영화에서 엄마는 아이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차이라고는 아이의 나이뿐이다. 태어나 얼마되지 않은 아이와 성년이 코앞인 아이. 전자의 엄마는 후자의 엄마와 비교해 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아이와 관계를 끊기에 적당한 나이는 언제인가. 아이를 버린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배경이 교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천년 전,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자기 아버지를 호명하는 대신 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를 인간의 관계와 맞대어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내게 예수의 외침은 근대적 질문의 시작으로 느껴진다.
고레에다의 첫 장편 극영화 <환상의 빛>(1995)의 주인공 유미코는 어린 시절 행방불명된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향에 묻히고 싶다며 집을 나선 할머니를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네에서 함께 자란 소년과 나중에 결혼하는데, 남편은 태어난 지 3개월 된 아이를 두고 자살한다. 시간이 흘러 재혼한 남자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고서도 그는 첫 남편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윽고 두 번째 남편 앞에서 유미코는 ”그가 왜 자살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한번 생각하면 멈추지 않아요“라고 절규한다. 그는 자신과 아이를 버린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해 보지만 답을 구할 수는 없다. 죽은 전남편의 입은 열리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도 그가 죽은 이유를 모른다.
다수의 고레에다 영화에서 가족의 관계는 시험에 처한다. <환상의 빛>이나 <아무도 모른다>(2004)처럼 아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끊는 부모의 이야기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과 이음을 이야기한다.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아이의 삶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개입당하지 않기에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울 수도 있겠으나, <브로커>는 고레에다가 앞서 만든 영화와 비교해봐도 극단적인 경우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여러 아이가 집단으로 버려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 홀로 남겨진 소녀는 세 이복자매의 손에 이끌리고, <어느 가족>(2018)에서 학대받던소녀는 이질적인 존재가 모인 가족과 살게 된다. 그런데 <브로커>는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유아를 내세운다. 고레에다의 영화 속 가족은 곁을 지켜주는 관계의 유지와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머물다 떠나갈때, 또 다른 이가 개입한다. 꼭 가족이 아닐 수도 있어서, 그것은 흡사한쪽 문이 닫히는 순간 다른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틈을 주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 빛을 발하는 복잡미묘한 그 세계는, <환상의 빛>의 제목을 돌려 표현하자면 ‘빛의 환(幻)’이라 부를 만하다. 다른 것들이 반복해서 섞이고 충돌하면서 빚는 마법의 서클.
<어느 가족>에서 형사가 시신을 유기한 것은 무거운 죄라고 말하자, 주인공은 버린 게 아니라고 답한다. 그전에, 누군가가 버린 것을 주운 거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브로커>의 상현(송강호)은 버려진 아이에게 새 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선의’라고 부른다. 고레에다는 이 지점에서 주체의 위치를 뒤바꿔버린다. 엄마와 브로커와 형사의 로드 무비는, 그들이 아기에게 길을 찾아주는 이야기라는 착각을 스스로 뒤집는다. 빛의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 존재는 상현과 아기 엄마를 비롯한 어른들이 아니라 말을 건네지 못하는 아기 우성이다. 극중 ‘태어나줘 고맙다’는 대사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데, 사실 ‘태어나주다’라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아기는 태어나는 것이지 태어나주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극중 인물들이 각자의 빛을 찾게 하는 우성은 정확하게 말해 ‘당신을 찾아온 존재’다.
<브로커>의 스타일에 대하여
요즘 한국의 드라마는 한국적 신파에 모던한 서양 문화가 결합된 형식을 보여주는데, <브로커>는 그런 낯선 스타일의 한 예다. <브로커>의 각 인물은 기능적으로 의존하고 돕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의 당사자인 상현이 아이를 보면서 처음에 했던 말이 “이제 행복해지자꾸나”인 것에서 보듯, <브로커>는 신파와의 접점에서 파묻히지 않는다. 상현과 동수(강동원), 그리고 소영은 마이클 커티즈의 <천사탈주>(1955)에 등장하는 세 탈주범을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은 자이면서도 턱없이 낭만적인 크리스마스의 천사 같은 세 인물은 ‘천사가 별건가’라고 따질 태세다. 세 사람과 대척점에 놓이면서 마찬가지로 낯선 인물은, 자기 위치를 제일 깨닫지 못하는 형사 수진(배두나)이다. 사랑하는 이가 꼼꼼하게 챙겨주는 게 시야에 들어오는데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찾고 구하는지, 무엇이 소중한지 모른다. 에이미 만의<Wise Up>을 듣다 우는 것도, “애를 제일 팔고 싶은 건 나였나봐”라고 고백하는 것도, 마침내 내레이션으로 극을 정리하는 것도 수진인것은 당연하다. 드디어 그는 자기 옷을 상현의 세탁소에 걸 수 있게된 것이다. 결말에서 ‘빛의 환’의 세계로부터 쫓겨난 인물이 상현인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거룩한 행실을 통해 빛의 서클을 지키는 자에 해당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입던 갖가지 옷이 나란히 걸린 그의 세탁소는 끝내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