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보라 평론가의 '실종'
2022-07-06
글 : 이보라 (영화평론가)
마주 보는 얼굴, 끝없는 의심

망치를 비장하게 휘두르는 한 남자와 리스트의 <Liebesträume> 3번이라는 기괴한 조화의 오프닝. <실종>에서 인상적인 순간들은 이렇게 의아한 선택과 급작스러운 변조(modulation)에 있다.

가타야마 신조의 <실종>에는 속박을 이탈하고 회피하는 몸들이 그려진다. 인물들은 죽음을 간절히 원한다. 삶을 중단함으로써 완전한 정지로 이행하려 열망하는 이들은 제각각 가능한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지난 <씨네21> 1359호 프런트 라인에서 김병규 평론가가 쓴 비평 ‘이미지의 조건, 영화적 몸짓’에서는 인물들의 신체가 고정됨으로써 죽음이 도출되는 사례를 열거했다면, <실종>은 몸들이 불가피하게 장치와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유예되는 사태를 형상화한 방식이라 일컬을 만하다. 가령 카에데(이토 아오이)의 엄마는 루게릭병을 앓아 스스로 목을 밧줄에 걸 수조차 없어 자살에 실패한다. 온갖 방법으로 죽기를 시도했던 ‘찌르레기’는 마침내 테루미(시미즈 히로야)의 벨트에 자신의 목을 맡기지만 충분히 조여지지 않아 다시 살아남고 만다. 그는 이전에도 투신했지만 팔다리에 외상을 입고 목숨은 건졌다. 이렇듯 역설적이게도 신체란 임의적 고통에 무작위로 노출될 정도로 연약하고 무기력한 동시에, 정목표에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밀하고 정확한 과정이 수반되어야 할 만큼 기계적인 성질을 지닌다.

부정확한 얼굴

그리하여 <실종>은 실종과 추적의 모티프에서 자주 다루듯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고 이를 판별하는 행위를 빈번하게 제시하는 한편, 인물들이 몸으로 그리는 동작이 모종의 성과를 이루거나 실패하는 과정 또한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3부인 ‘13개월 전’에서 사토시(사토 지로)는 밧줄에 목을 걸기 위해 분투하다 침대에서 떨어진 아내를 우연히 발견하는데, 문밖에 서 있다 아내와 눈이 마주친 사토시는 움직이지 않고 몇초간 그대로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간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아내의 병든 몸과 이를 바라보는 사토시의 굳은 얼굴, 그리고 즉각 반응하지 못하는 그의 몸을 병치함으로써 아내를 향한 연민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고통스러운 간병 과정에서 그 또한 은밀히 상상했을 아내의 죽음 충동을 적극적으로 차단하지 않는 이중성을 역설한다. 결국 테루미의 종용에 아내의 안락사를 그의 손에 맡긴 사토시는 그때 아내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자리를 비운다. 나중에 테루미는 사토시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의 돈을 요구하면서 “아내 분이 웃으셨어요”라고 덧붙이는데, 사토시는 직접 마주한 적 없는 마지막 얼굴을 마치 보기라도 한 듯 그 순간 테루미에게 돈을 주겠노라 약속한다. 본 적 없는 것을 봤다고 착각하는 오인의 트라우마는 대물림되어, 사토시가 운영하던 탁구장을 걸어 들어오던 카에데는 줄에 목을 건 채 매달린 엄마를 보기도 한다. 카에데는 아빠를 찾기 위해 그가 일하던 공사장에 갔을 때 연기에 휩싸인 테루미를 향해 “아빠”라고 부른다. 그러다 테루미의 얼굴을 다시 보고는 동명이인이라 생각할 뿐 그를 곧장 의심하진 않는다. <실종>에서 얼굴은 위선으로 포장하든 위장으로 감추든 손쉽게 오인의 기제가 되며, 남은 것은 허망하게 몸부림치거나 아예 정지된 채로 노출된 신체뿐이다.

부정확성을 내포한 얼굴이 그나마 정확성을 갖추는 때는 사진으로 박제될 때로, 사토시의 얼굴을 복제한 전단지와 공교롭게도 게시판에 나란히 붙은 테루미의 현상범 포스터는 그들의 민낯을 드러낸다. 카에데는 테루미가 등장한 동영상을 정지하고 펜으로 그의 얼굴 위에 안경을 그린 뒤에야 아빠와 동명이인인 줄 알았던 그의 위장된 존재를 확신한다. 그러나 사진에 내재된 고정성과 정지성은 그 자체로 투명한 만큼 여타 가능성을 소거하는 ‘오직 하나’로 기능하기도 한다. 식별의 준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존재를 확증하는 해답이 되지는 못하므로, 사진 속 주인공이 나와 닮았다 하더라도(또는 설령 그것이 실제로 나를 찍은 것이라 하더라도) 사진을 기반으로 존재의 정체를 증언하는 일은 온전히 성립되기 어렵다. 고로 <실종>에서 얼굴은 가소적이고 은폐적인 성질을 띠기에, 얼굴을 마주하는 행위란 끊임없이 의심을 수반하게 된다.

딸의 반격

그리하여 카에데에서 사토시로, 일방적 추적의 방향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상호 교환 행위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 대목을 말하기에 앞서 그 장면 속 카에데의 ‘반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먼저 따져보고 싶다. <실종>은 ‘현재’, ‘3개월 전’, ‘13개월 전’ 총 3부로 구성돼 있는데, 현재는 카에데의 입장에서, 3개월 전과 13개월 전은 각각 테루미와 사토시의 시점에서 기록돼 있다. 그런데 3개월 전은 테루미의 살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제쳐두더라도, 13개월 전 일화에서 사토시는 자신과 아내의 이야기만을 설명할 뿐 카에데는 배제되어 있다(사토시가 테루미와 손을 잡은 일화가 밝혀지며 현재의 카에데가 사토시의 시점에 틈입하는 방식으로 그려질 따름이다). 각각의 분량은 동등하지 않으며 처음 제시된 카에데의 일화가 테루미와 사토시의 일화를 거치며 정보를 더해가는 방식이다. 물론 이는 배치된 순서상 불가피하며 장르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플로팅이기도 하다. 하나 서사가 전개되면서 정보가 사토시에게 무겁게 편중되어 있음이 드러나면서 모종의 위계가 고발되고, 특히 사토시의 에피소드에는 불쑥 그의 내레이션이 등장해 이야기의 위치를 재설정하기까지 한다.

이는 <실종>의 마지막 순간 뜻밖에 맞닥뜨리게 되는, 사토시를 향한 카에데의 반격과 함께 유념할 필요가 있다. 카에데에게 광적인 욕구를 지닌 연쇄살인범과 그를 처단한 사연 많은 가장의 위상은 그다지 다른 값을 지니지 않는다.‘부부’의 이야기를 핑계로‘가족’(이자‘모녀’또는‘부녀’)의 이야기에서 소외된 카에데는, 그리하여 자신이 엄마를 응시할 여지를 없애버린 아버지를 끝내 고발한다. 마지막 장면은 부녀가 끊임없이 공을 교환하는 탁구의 운동으로만 이뤄져 있다(이창동의 <시>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쪽으로 치우친 무게를 바로잡으려는 듯 드물게 수평으로 마주 보고 선 두 인물은 마지막에야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혹은 마지막에야 둘은 가까스로 마주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롱테이크로 이뤄진 부녀의 랠리,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딸이 알고 있었음을 깨달은 사토시가 허망하게 팔을 내리자 땅으로 떨어져 튕기는 탁구공, 서로의 비밀이 모두 노출된 상태에서 다시금 스윙을 시작하는 둘. 공은 떨어졌지만 이들 사이로 어김없이 오가는 탁구공 소리가 울려퍼진다. 통제 불능의 세계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려는 듯 부녀는 끊임없이 무용한 몸짓을 이어간다. 마주 보는 이들은 이제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관계를 지속할 것이다. 화면에서 얼굴은 사라지고, 두 손만이 부단히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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