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의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진다고도 했지만 그렇게 극적인 전환은 없었다. 대신 늦은 새벽 혼자 고요히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문득 뒤돌아보니 70일 남짓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그에게 흠뻑 젖어 있다. 서서히 물들어 다른 상태로 나아가는 경험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두 영화를 다시 되새겨봤다.
시간과 함께 내 안의 언어가 익어간다. 입을 닫자 갈 곳 잃은 마음이 넘치고 번져 끝내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 되어버렸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굳이 말을 보태어 영화의 형태를 훼손하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내 안의 빈약한 언어로 이 상태를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말을 더할수록 오해는 짙어지고 본질에서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게 지면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 내심 안도하며, 이 비껴간 인연에 감사하며 수줍은 마음을 저 깊은 시간의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때론 간격이 시야를 확장시킨다. 떨어졌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감지되는 경우가 있다.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뒤 많은 평자들이 각자의 마음들을 꺼내놓았다. 스크린에 불이 꺼진 후 다시 시작되는 영화처럼,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주는 사진처럼, 미결된 사건은 스크린의 영원이 되어 지금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바닷속에 던져버린 진심은 스크린 앞 사람들에게 닿아 마침내 다른 형태로 거듭난 뒤 파도처럼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 쉴 새 없이 반복되는 파도, <헤어질 결심>을 향한 애정과 고백의 언어들을 보면서 어느샌가 결심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어디까지가 내 안에서 번져간 얼룩이고 어디서부터가 밖에서 스며들어 물든 생각인지 구분이 힘들어졌다. 사실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같은 장면을 두고 펼쳐진 다른 사유의 경로를 접하며 이제는 영화가 아닌 해석과 해석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다.
얼룩이 번져 사랑이 되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카메라로 조각한 사랑의 형태를 감상하는 것만큼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는 건 행복한 일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스스로 조개를 캔 것처럼 자신이 영화에서 받아들인 것을 소중하게 여기더라. 그게 참 기분 좋았다”는 정서경 작가의 벅찬 고백을 들으며 한발 늦게 들이치는 파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리 천천히 젖어드는 사람에게도 마침내 파도는 친다”는 김소미 기자의 말에 공감하며 이미 젖어들었다. 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보았지만, 끝내 무엇도 보지 못했다. 감춰졌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투명하기 때문”이라는 김소희 평론가의 해석에 완전히 동의한다. 적어도 나는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라는 김혜리 기자의 묘사보다 정확한 문장을 상상할 수 없다. <헤어질 결심>에 관한 글을 읽는 건 마치 해변에서 서래(탕웨이)를 찾아 헤매는 해준(박해일)의 심경을 닮았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이 타인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었을 때 찾아오는 뒤늦은 감격과 후회. 그리고 메울 수 없는 행복한 공허. 버티는 길은 오직 또 다른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본 것보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을 이 영화에 추가로 질문을 보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바깥에서 시작해도 좋겠다. 칸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해도 좋을 영화가 왜 흥행은 부진한 걸까. 모호함을 달가워하지 않는 2022년 한국영화 스토리텔링의 궤적에서 이 영화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고풍스럽다고 하고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한편 누군가는 전작의 과격한 묘사에 비해 지나치게 얌전하다고도 말한다. 극한의 세공에 대한 경탄의 목소리 뒤로 여전히 과시적인 부분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말도 섞여 들려온다. 다행스러운 반응이다. 이 영화는 거울과 마주선 듯 각자의 화답들이 충돌해야 마땅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영화 바깥의 이야기를 좀더 담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당도한 해변 앞에서 단순한 호기심이 앞선다. <헤어질 결심>이 사랑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묻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질문. 사랑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서래의 ‘마음을 가져다줘’라는 말을 번역기가 ‘심장을 가져다줘’라고 통역하는 순간 언어의 뉘앙스는 본래 정해진 고정관념 바깥까지 그물망을 확장시킨다. 힌트는 언제나 외부와의 간극에서 발견되는 법이다. 최근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물리학자 김상욱이 “사랑은 상전이(相轉移)”라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 무릎을 쳤다. 물이 얼음이 되는 것처럼 물체에 변수를 투입할 때 어느 시점까지는 ‘온도가 내려간다’는 연속적인 변화가 있으나 어느 순간 ‘액체가 고체가 되는’ 불연속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사랑을 하기 전과 후에 일어나는 불연속적인 변화. 본질을 유지한 채 다른 형태가 되는 순간에는 반드시 징후와 흔적이 동반된다. 서래와 해준은 언제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겼나. 해준의 시점을 따라가는 <헤어질 결심>의 전반부는 천천히 스며드는 해준을 닮았다. 해준이 서래에게 마음을 빼앗긴 순간이 언제일까. 서래를 심문하며 휴대전화 패턴이 알고 싶다고 말할 때? 시신 상태를 확인하겠냐는 질문에 서래가 ‘말씀’으로 듣겠다고 했다가 사진으로 선택을 바꿀 때? 시마스시를 함께 먹을 때? 나는 <헤어질 결심>의 현란한 편집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 약간의 과장을 보태 롱테이크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순간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분리되지 않는 연속적인 변화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준은 말한다. “당신 때문에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핸드폰을 바다 깊숙한 곳에 버리세요. 아무도 모르게.” 붕괴와 헤어질 결심이라는 불연속의 변화를 기점으로 서래와 해준의 관계는 드디어 다른 상태로 전이된다.
언어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어 필연적으로 오해를 동반한다. 우리는 말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각자의 해석을 꺼내어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야기가 창조되었다. 이야기와 사건은 닿지 못한 마음의 갈증을 메우는 과정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사건의 행간, 보이는 것 이면의 의미, 막간의 진실을 경유하여 누군가의 사연이 나의 것으로 거듭난다. <헤어질 결심> 역시 언어의 간격과 오해, 발신자와 수신자간의 시차를 원동력으로 삼는다. 간극을 좁히기 위해 동원되는 건 범죄 수사다. 용의자를 상상하며 뒤쫓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상대를 마음속에 그리는 연인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음 상황, 상대의 마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이른바 서스펜스는 오해와 긴장을 반복하며 로맨스와 같은 궤적을 그린다. <헤어질 결심>은 해준이 던진 이 말이 다시 해준에게 사랑의 고백으로 돌아오기까지 시차와 벌어진 간격을 따라잡는 영화다. 다만 이것을 다시 사랑이라는 언어로 포획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헤어질 결심>은 우리가 쉽게 사랑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가두어왔던 마음의 형태를 끊임없이 더듬는다. 지연되고 잘못 전달되는 사이 발생하는 지워지지 않을 흔적들. 차라리 얼룩이라고 해두자. 해준의 일상은 다시 등장한 서래라는 얼룩으로 훼손되어 마침내 완전히 얼룩으로 잠식된다. 그때의 얼룩은 여전히 얼룩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영화는 관객인 내게도 얼룩을 남겼다. 다만 서래와 해준의 관계, 두 사람 사이 마음의 형상은 오롯이 그들의 것이다. 다시 한번, 시선의 전환은 언제나 외부에서 시작된다. 예외적 인물 혹은 예외적 장면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해변가의 부감 실루엣에 서래의 얼굴을 숨겨놓았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이 영화에는 무수한 기호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해준이 서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느껴진 예외적 순간은 두 사람 바깥에 있다. 나는 항상 박찬욱 영화가 도착적이라고 생각해왔다. 안에 담긴 내용물보다 포장의 방식을, 이야기보다 영화언어를 더 사랑한 자의 숙명 같은 굴레(혹은 오해)가 있다. 장면과 이미지가 내용과 상황을 앞서는 그의 영화는 현란한 만큼 공허하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에 이르면 끝과 끝이 통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극한의 세공이 도달하는 곳 역시 언어 바깥 정념의 덩어리, 이른바 포착된 진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숨은그림찾기는 보너스게임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이미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뒤 응시할 곳은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이어나갈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헤어질 결심>의 투명함은 에릭 로메르가 말했던 영화의 투명성과 끝내 같은 자리에 도착한다. 다른 경로, 같은 장소.) 박찬욱 영화의 지향점에 반발하면서도 끝내 동참할 수밖에 없는 항복의 순간은 해준도, 서래도 아닌 시마스시에 질투하는 수완(고경표)이었다. 수완의 농담 같은 질투를 보며 나는 이해와 분석을 접고 이 영화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기로 했다. 경찰서 계단에서 해준이 부하 형사 수완에게 ‘부검’이 무엇인지 서래에게 설명해주라고 지시하는 순간이 강렬하게 박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수완은 서래에게 보내는 일종의 비밀 연애편지다. 해준은 수완을 메신저로 남겨두고 홀로 계단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마치 다른 세계로 돌입하는 것처럼 분리되는 장면에서 나는 영화의 얼룩을 느낀다. 이후 수완이 서래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건 그야말로 질투다. 해준을 서래라는 세계에 빼앗겨버린, 남겨진 자의 질투. 메신저가 도구에 머물지 않고 질투까지 하는 흥미로운 풍경. 서래를 적대시하는 수완의 동기가 감히 시마스시를 함께 먹었기 때문이라면 과장일까. 농담 같은 질투심의 중심에 놓인 시마스시는 적어도 내게 있어 이 영화가 그리는 어떤 사랑의 흔적보다 명료하게 다가와 나의 얼룩이 된다.
끝내 붙들어 정지시키고자 하는 꿈
얼룩은 다른 영화로도 번져나간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깃발 아래 무언가를 탐닉한다. 줄곧 얼룩이 남긴 것들에 대해 말했지만 그렇다고 얼룩이 곧 사랑의 대체어가 되는 건 아니다. 사랑이 일종의 상태라면 얼룩은 이에 이르는 과정에 남겨진 흔적들의 총합이다. 사랑이라는 점에 도달하기까지의 선, 어쩌면 남겨진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신기루처럼 휘발된 자리에, 혹은 사랑의 형상을 감지할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질 때 종종 남겨진 것들에 집착한다. 빈자리가 클수록 집착과 방황은 더욱 짙어져 종국엔 대상이 아니라 지나간 얼룩,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탐닉하기 시작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것이겠지만 <헤어질 결심> 이후 만난 영화에서 유독 이 얼룩에 대한 집요한 탐닉이 두드러져 눈에 들어왔다.
예컨대 <탑건: 매버릭>은 36년의 시간의 간격 뒤에 뒤늦게 도착한 것들, 아니 아직 생존한 것들에 대한 애정으로 흠뻑 젖은 영화다. 1986년 <탑건>이 시대의 열기가 투영된 범상한 청춘영화였다면 36년이 지난 뒤 도착한 <탑건: 매버릭>은 살아남은 자의 진귀한 사례로 변모한다. <탑건: 매버릭>은 속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리메이크다. 구조와 형태를 고스란히 가져와 반복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버린 상황에서 여전히 같은 행위와 갈망이 반복된다는 건 어딘지 섬뜩한 구석이 있다. 매버릭은 특출난, 혹은 이질적인 존재다. 하늘과 비행, 속도를 향한 그의 갈망은 차라리 순수에 가깝다. 대척점인 아이스맨은 전투의 승리와 생존, 군사적 목적의 성취를 위해 비행하지만 매버릭은 비행 그 자체를 위해 비행한다. 목적이 배제된 순수한 욕망은 그 자체로 광기라고 해도 좋겠다. 사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런 거다. 선악, 옳고 그름 바깥에서 기꺼이 어떤 열망에 몸을 불사르는 상태. 그리하여 아이스맨은 상식의 세계에서 제독이 되었고, 매버릭은 주변의 시간을 붙들어 맨 채 여전히 대령의 자리에 남아 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매버릭은 마치 사진처럼 시간마저 박제시키며 자신의 순수한 열망을 여전히 수행 중이다.
조종사들의 시대가 결국 끝이 날 거라는 제독의 단언에 매버릭은 답한다. “언젠가는.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 선언이 유독 애잔하게 들리는 건 ‘언젠가는’이라는 단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매버릭 역시 자신의 길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영원한 건 없다. 그렇기에 사랑에 빠진 자는 순간을 불태우고 기꺼이 사라진 뒤에 영원으로 기록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실패함으로써 남겨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작동된다. 하지만 <탑건: 매버릭>은 그걸 실패와 미결로 남겨두는 대신 기어이 오늘의 승리로 포장해버린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환상을 향해 투신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대의 물결에 떠밀려간 것들을 대변할 더할 나위 없는 달콤한 환상. 할리우드영화의 권능은 그것이 진실이 아님에도 기꺼이 만끽하는 해피 엔딩으로부터 발생한다. 진실이 아니기에 기꺼이 불편함을 망각하고 만끽할 수 있는 낙원. 물론 영화라는 꿈에서 깨면 다시 초라한 현실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여름 밤의 꿈을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탑건: 매버릭>을 이미지의 죽음으로 연결시킨 김병규 평론가의 탁월한 통찰과 죽음을 유예한다는 상상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나는 <탑건: 매버릭>이 집착하는, 꿈을 향한 낭만적 해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탑건: 매버릭>은 <헤어질 결심>처럼 투명하다. 이 영화는 전쟁의 작동 방식과 진실을 은폐하는 걸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물론 1986년의 <탑건>은 실제로 그랬다. <탑건: 매버릭> 역시 결과적으로는 전쟁의 실체가 은닉된다. 하지만 그것이 목표라기보다는 부산물, 요컨대 얼룩에 가깝다. 매버릭은 그저 꿈과 낭만에 눈이 멀어 그것을 향해 무한 비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문득 <토이 스토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버즈가 폭발형 로켓을 타고 우디와 함께 날아오른다. 우디는 신이 나서 외친다. “버즈, 너 지금 날고 있어!” 버즈는 답한다. “이건 나는 게 아니야. 멋지게 추락하는 거지.” 정지를 거부하는 현실 세계에서 그것은 추락으로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버즈와 우디는 추락을 향해 한없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영화에서는 다르다. 언젠가는 땅에 가닿을 걸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날고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영화는 죽음을 한없이 유예시켜 영원으로 만들 수 있다. 정지된 영상의 영원성.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1991)의 엔딩에서 두 사람의 차는 절벽으로 추락하는 것인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1979)에서 유골은 뿌려지는 것인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멈춰 선 영상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머물며 영원으로 기억된다. 현실(땅)로부터 한없이 유예된, 스크린(하늘)에 머물 것. 어쩌면 그건 영화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다. <탑건: 매버릭>이 끝내 고집해낸 환상 역시 하늘(혹은 영화)에 머무는 일이다. 36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반복된 이 영화의 순수함, 혹은 찬란한 광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의 뇌리 속에 박힌 <탑건: 매버릭>의 얼룩은 해변가에서 비치 발리볼을 하는 장면이다. 원리퍼블릭의 «I Ain’ t Worried»를 배경으로 탑건 조종사들은 근육질의 몸매와 함께 에너지를 발산한다. 팀워크를 다진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이건 서사적으로 불필요한 예외적 장면이다. 정확히는 서사와 별개로 떨어져 단독으로도 위력을 발휘한다.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끝내 붙들어 정지시키고자 하는 꿈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그 지워지지 않을 욕망의 흔적이자 (언젠가 좌절될) 꿈의 얼룩들 앞에 서 있다. 문득 영화라는 행위 전체가 이 얼룩을 향한 연서(戀書)처럼 느껴진다. «I Ain’t Worried»의 가사가 이토록 애잔하고 결연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조금씩 너에게 다가가고 있어/ 이 상황에 두려워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지금 난 걱정 따윈 안 해/ 난 뺏고 싶을 만큼 원하는 게 생겼을 때 가장 열정적이지/ 별거 아닌 일에 신경 쓰긴 너무 바빠/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는 끝났어.” 기어이 정지된 영원에 머물겠다는 각오. 기꺼이 눈이 멀겠다는 결심. 영원히 당도하지 않을 연서를 손에 쥔 채 나는 언제까지 스크린의 해변가를 서성일 수 있을까. 문득 슬프고 두렵고 안타까운 파도가 차례로 발밑을 적신 끝에 문득 내가 영화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야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