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비상선언’ 배우 이병헌, “디테일의 설득력”
2022-08-03
글 : 김소미
사진 : 손익청 (스틸 작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이어 <비상선언>으로 마주한 이병헌은 힘을 빼고 뉘앙스를 찾는 데 통달한 베테랑 같다. <남한산성>의 최명길,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을 연기할 때와 같이 극적으로 우아하게 다듬은 마스크는 잠시 벗어둔 채, 그는 멋있기보다는 차라리 누추한 순간이 더 많은 보통의 초상을 스크린에 옮긴다. “말투나 걸음걸이, 시선의 디테일들이 만드는 차이가 모여서 영화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설득력을 만든다”는 그의 원칙은 설정값이 극도로 제한된 기내 공간에 배우가 내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캐릭터의 개성이 활보할 통로를 뚫고 만다. <비상선언>의 재혁은 아토피를 앓는 딸과 함께 하와이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아버지이며, 끔찍한 테러의 초입부터 상황을 주시하는 비상한 목격자다. 배우 이병헌은 점차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기내에서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비범한 과거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 <남산의 부장들> 직후 팬데믹을 통과해 2년 만에 개봉작으로 극장을 찾았다.

= 작품 촬영은 쉼 없이 계속했지만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 건 며칠 전 시사회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영화 개봉 후 무대 인사하면서 관객과 직접 만나고 팬들과도 소통하는 게 내 일의 일부이자 익숙한 루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그걸 아예 못한 셈이고, 이번에 <비상선언>을 보러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을 보는 순간 뒤늦게 그 사실을 체감했다. 시각적으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 항공 스릴러로서의 장르적인 재미를 우선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인데, 막상 열어보니 테러리즘과 한국 사회의 현주소에 관한 문제의식도 뜨겁게 녹인 작품이라 흥미롭더라. <비상선언>을 선택할 때 어떤 점에 주목했나.

= 시나리오를 처음 볼 때만큼은 재미에 집중한다. 이야기 구조나 사회적인 영향력은 그다음에 찬찬히 따져보는 편이고, 내가 시나리오 안에서 충분한 재미를 느꼈는지 감정과 직관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비상선언>은 시나리오를 처음 펼친 순간부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2시간가량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걸 하게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 한재림 감독은 재혁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설명하던가.

= 아주 평범한, 어느 딸아이의 아버지라는 점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 비행공포증에 얽힌 재혁의 트라우마와 과거사 같은 것은 영화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요소다. 우선 이 인물을 대변하는 특징은 아토피 때문에 반에서 놀림받는 딸을 위해서 극심한 비행기공포증이 있음에도 하와이행을 택했다는 점이다. 비행기 타는 게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사람인데도 말이다.

- <백두산>의 김시아 배우에 이어 이번에는 김보민 배우가 딸을 연기하면서 두 자매 배우와 모두 부녀 연기를 한 셈이 됐다. <싱글라이더> <백두산> 때도 아버지를 연기했는데, 이번엔 어느덧 극중 설정과 배우의 실제 자녀의 나이대가 비슷해 보인다.

= 확실히 전보다 확신을 가진 채로 연기할 수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고 무언가 챙겨주는 표현을 할 때 과거에는 관찰하고 배워서 했다면 <비상선언> 때는 내 안에 쌓여 있는 경험을 토대로 연기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꺼내어 쓴 느낌이다. 다만 아들만 있는 부모와 딸만 있는 부모는 많이 다르다는 말을 이번에 확실히 실감했다. 아들과는 늘 같이 뛰어다니고 힘을 쓰고 해서 아무래도 터치가 투박해지는데, <비상선언>을 준비하면서 주변의 딸 있는 부모들을 지켜보니 아빠들이 대체로 나보다 훨씬 스위트, 소프트하더라. (웃음) 그런 차이를 관찰하면서 역할에도 녹였다.

- 힘 빼기의 기술, 그리고 현실성에 대한 해석이 돋보였다. 드라마틱한 상황과 평범한 인물 사이에 약간의 온도 차가 있어서 외려 사실적으로 다가왔달까. 재혁은 트라우마로 인한 비행기공포증으로 과호흡을 겪고 현 상황은 테러범이 바이러스 물질까지 살포한 상태이지만, 인물을 지나치게 어둡거나 비장한 톤으로 그리지 않았더라.

= 그게 현실에 가깝다고 봤다. 갑자기 공황이 찾아와서 죽을 것 같은 상태인데 사람이 어떻게 무게를 잡고 있겠나. 재혁 자신은 과호흡이 와서 당장 기절할 것 같아도 비행기에 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불 뒤집어쓰고 자꾸 술만 마시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연기하는 동안은 재혁의 상태에 진정성 있게 접근하는 것에 집중했다. 사무장(김소진)이 진석(임시완)을 의심할 때 재혁이 이를 커튼 너머로 훔쳐보는 약간 코믹한 모습 역시 그게 리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 조명, 카메라 등 최대한 사실성을 추구하는 작품의 지향에 맞추어 나 또한 무엇이 진짜 평범함인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후반부에 재혁이 내리는 어떤 선택 역시 너무 영웅적으로 멋있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오히려 비행기 안에서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이 어떤 얼굴을 짓고 어떻게 호흡하는지, 과장하지 않으면서 그 고통과 안간힘을 생생히 전달하는 게 우선이었다.

- 재혁의 서사는 거의 기내에서만 벌어진다. 항공기 세트에서 승객, 승무원 등을 연기하는 수십명의 배우들과 촬영하는 과정은 어땠나.

= 이렇게까지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배우들과 밀접하게 붙어 앉은 채로 긴 시간 연기해본 것은 처음이다. 처음 세트를 방문했을 때부터 놀라운 광경에 압도당했다. 실제 비행기 한대를 반으로 툭 갈라놓은 모습이었다. 촬영 장비들이 설치돼 있는데도 막상 좌석에 앉으면 진짜 비행기에 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배우로서는 최면을 걸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 항공기가 360도 회전할 때 아수라장이 된 기내를 보여준다. 완성도 높은 시각적 스펙터클이 구현된 장면인데 촬영 방식에 금세 적응했나.

= 원래는 미국에서 공수하려던 기계가 코로나19 때문에 계속 미뤄져서 한국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정도로 큰 비행기 세트를 초대형 짐벌로 돌리는 경우는 해외에서도 지금까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다고? 정말 대단하네!’ 싶으면서도 내가 타야 한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웃음) 수차례의 사전 테스트를 통해 안전성을 확인했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100여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돌 텐데, 걱정이 안될 수가 있나. 그런 긴장감이 극중의 공포심과 맞물려서 연기에는 도움이 되었다. (웃음) 수십번씩 돌다보니 나중에는 그냥 놀이기구 타는 기분이었다. 사실 배우들은 안전벨트라도 맸지, 촬영감독님과 스탭들은 세트에 기둥을 설치해 몸을 칭칭 동여맨 뒤 촬영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승무원을 연기한 전문 스턴트 분들이 눈앞에서 천장에 퉁 소리를 내며 부딪칠 때는 실제로 깜짝 놀라기도 했다.

- 아내와 자녀를 지키는 가장 캐릭터로 인호와 재혁이 나란히 등장한다. 보편적인 공감을 요구하는 만큼 신파에도 가닿기 쉬운 캐릭터인데 송강호와 이병헌, 두 배우가 미묘한 결을 살렸다. 두 사람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로 영화에서 만난 것은 처음인데.

= 후반부에 잠시 만나는 장면이 있었는데, 우리답게 주로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그랬다. 송강호 선배가 “야, 거기 비행기 안은 에어컨도 나오고 편하지? 땅에선 아주 난리다” 하면 내가 “아니야, 형. 여기가 진짜 더 힘들어. 바깥이 낫지.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좋잖아” 하는 식이었다. (웃음)

- 사무장 희진, 부기장 현수(김남길), 그리고 테러범 진석과 함께 기내에 탑승한 인물들과의 앙상블이 강조된 영화다. 동료 배우들에게서 발견한 면모가 있었다면.

= 김소진 배우와 김남길 배우는 현장에서 극과 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김소진 배우가 매사 예리하고 진지하게 캐릭터에 다가간다면 김남길 배우는 우선 준비를 마치고 나면 촬영장에서 유쾌하게 농담하며 사람들을 웃기는 타입이다. 배우마다 각자 준비하고 몰입하는 시기와 방식이 다른데 두 사람의 차이가 내게도 인상적이었다. 임시완 배우는 정말 독특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로 수시로 문자가 오는 거다. 작품과 역할에 대해서는 물론 내 사생활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궁금해하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웃음) 이런 경우에 선배님은 어떻게 하세요? 평소엔 뭐하세요? 선배님 집에 한번 가면 안될까요? 게다가 거절할 수 없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집에 초대해 같이 술도 몇번 마셨는데 캐릭터 연구를 위해 나를 묘하게 관찰하는 느낌도 있고 대답하기 어려운 심오한 질문을 던져 나를 종종 곤경에 빠트리기도 하는 후배였다. 그래서 시완이한테 문자가 오면 또 어떤 질문을 하려나 마음이 덜컹한다. 이 매력과 집요함이 연기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 프런트맨으로 출연한 <오징어 게임>이 비영어권 드라마로는 최초로 9월 열리는 미국 에미상 작품상 후보로 지명됐다. 시즌2에서 프런트맨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한데, 어떻게 내다보고 있나.

= 황동혁 감독님도 처음부터 시즌제를 생각하고 만든 드라마가 아닌 데다 <오징어 게임>을 만들면서 스트레스로 이가 6개나 빠질 정도로 고생하셔서, 시즌2는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나 싶다. 프런트맨은 짧은 분량의 카메오로 존재감만 보여주는 역할이었지만, 시즌2에서는 인물에게 어떤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부여될지 나 또한 감독님의 글을 굉장히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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