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헌트>와 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 :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탄피처럼 지고 만다
2022-08-13
글 : 김수민 (시사평론가)

<헌트>는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간부인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를 통해 정보기관 내부의 혈투를 그린다. 취조실의 이중유리는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보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보기관은 그 반대로, 밖의 구석구석을 탐지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불투명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정보기관의 특징을 이용해 영화는 가정과 상상, 허구로 평행 세계를 만들었다. <헌트>는 한참 지나간 시대를 다루면서도 <남산의 부장들>보다 <26년>에 가까이 있다.

1983년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에 대한 테러 시도가 등장하는 도입부는 이 영화가 근본적·전반적으로 픽션임을 알린다. 이 장면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없다. 영화 초반의 대통령 방미와 종반의 아웅산 테러는 실제로 각각 1983년 11월과 10월에 있었다. 영화 내내 도사린 ‘베드로 사냥’ 프로젝트도 창작인데, 극중 대통령의 세례명인 ‘베드로’는 실제 전두환의 세례명이었다. 그는 퇴임 후 백담사에 기거하며 불교 신자로 알려졌지만, 청소년기부터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였다.

초반에서 실제 역사와 빼닮은 대목은 미국 현지 교포들의 대통령 규탄 시위다. 전두환의 불안한 지지 기반이 드러난다. 박정희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심화된 국민들의 민주 의식을 마냥 억누르다가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 암살 사건을 맞이했다. 여기서 다시 독재를 연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한국 정치 사상 가장 인기 없는 정권이었다.

신군부는 무엇으로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는가

1981년 한국에서 컬러TV가 본격 정규방송에 들어갔고,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이는 흔히 독재 정권이 고도로 대중을 길들이는 술책으로 해석되지만, ‘새로운 시대인데도 버젓이 독재 정권이 연장되었다’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부마항쟁이 흑백이라면 광주항쟁은 컬러풀하다. 더구나 몇몇 재야인사가 사법살인이나 의문사를 당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군중이 학살당했다. 해태 타이거즈를 연호하는 야구장 시민들에게는 오월의 한이 서려 있었다. 허수아비 야당을 세우고 짜고 치는 선거로 집권했던 전두환 신군부는 무엇으로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는가. <헌트>는 그에 관한 이야기다.

안기부의 두 차장이면서 씹어먹을 듯 반목하는 박평호와 김정도는 이미 1979년 10·26 사건 직후부터 악연을 맺는다. 창조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10·26 당시 김정도는 보안사령부에서, 박평호는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박정희는 생전에 계엄 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보안사령관이 맡도록 해뒀다. 보안사는 김재규가 수장이었던 중앙정보부를 역적 취급하면서 간부들까지 먼지털이식으로 수사했다. 급기야 1980년 4월14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직무 대리)를 겸직하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두명이던 차장을 한명으로 줄이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다만 영화 속 안기부처럼 결과적으로는 ‘2인 차장 체제’를 유지했다. 최종 결재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뜻을 전두환이 수용한 결과였다.

전두환에게 더 중요한 목표는 기존 간부들의 사표를 수리하고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이었다. 부서장 이상 간부 대부분과 국내 정보 인원 100여명이 해직되었고, 전두환의 측근들인 김성진, 허문도, 허삼수가 각각 기획조정실장, 비서실장, 감독관으로 들어왔다. 김정도도 이런 과정을 거쳐 ‘굴러온 돌’이 되었을 것이다. ‘기존 인사 대 신규 인사’, ‘국내 담당 대 해외 담당’이라는 극중 구도는 ‘분할해서 서로 싸움 붙인다’는 지배의 법칙에 들어맞기도 한다. 전두환은 중정을 이란 팔레비 왕정의 비밀경찰 ‘사바크’가 아닌 이스라엘 국제정보 수집기관 ‘모사드’처럼 바꾸겠다고 공언했지만, 5·17 쿠데타를 일으키며 전두환 신군부는 중정을 본격 재가동했고, ‘국가안전기획부’로 개명하고 나서도 이 기관은 ‘정권의 사냥개’로 남았다.

영화에 나오는 ‘전두환을 반대하는 군인들’이 실재했는지 궁금증이 생긴 관객이 있을 것이다.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 반대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며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을 찾은 군 장성은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기에 두 차례 여당 국회의원을, 노태우 정부에서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이범준이었다. 전두환이 이범준을 통해 미국을 떠보았다는 설이 있다. 이범준이 그사이 생각을 바꿔 전두환에게 협력했을 수도 있겠다. 미국측은 제보를 받았을 당시 이미 ‘역쿠데타’ 세력의 정체와 실체에 의문을 가졌다. ‘또 다른 전두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유혈 사태와 실패 가능성을 우려해 전두환 축출을 포기했다. 영화에서 ‘베드로 사냥’을 반대하듯 말이다.

전두환을 몰아내고 싶었던 군인들은 있었을 수 있지만 실행 단계로 이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5공 남산의 부장들>의 저자 김충식은 신군부 보안사에 몸담았던 오일랑 전 청와대 안전처장의 견해를 저서에 옮겨 적었다. “전두환 보안사가 당시 계엄사를 포함해서 전군의 신경망(통신)과 급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을 때여서, 그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벌어질 수 없었다.” 영화 속 ‘전두환 정권 전복을 노리는 군인들’은 ‘양심적인 군인도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빚은 산물이자, 민주화 운동의 ‘대타’(代打)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북한의 테러를 다루기 전 ‘이웅평 귀순’을 거쳐간다. 1983년 2월25일, 한국군과 미국군이 합동으로 팀 스피릿(오늘날의 ‘키 리졸브’ ) 훈련을 실시하고, 북한이 준전시 상태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던 날, 북한 공군 상위(한국군의 대위에 가깝다) 이웅평이 미그-19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다. 귀순 계기는 ‘우연히 발견한 남한 라면 용지에 적힌 문구’였다고 발표되었지만 당국의 각색임이 유력하다. 이웅평은 나중에 이를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웅평이 북한보다 남한이 자유롭고 윤택하다고 판단해 귀순한 것은 틀림없다. 남한보다 ‘더 나쁜 체제’가 있다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버팀목이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전두환 정권의 허점을 노린다. 북한의 테러 시도에 대해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던 김대중 정부 초기에 그 조직에서 차장을 지낸(박평호, 김정도의 후임자인 셈이다) 라종일은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5공 정권이 쿠데타와 광주항쟁으로 들어섰으므로 인기 없고 정통성도 취약하다고 보고, 대통령 한명만 제거하면 뭔가 될지 모른다는 유혹 때문에 발생했다.”

북한의 전두환 살해 시도는 아웅산 테러 한번이 아니었다. 1981년 7월, 전두환이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 북한은 캐나다인 킬러 2명을 포섭하지만, 킬러들이 공작금을 들고 사라지면서 필리핀 경찰에도 암살 계획을 흘려버렸다. 북한은 방도를 바꿔 내부에서 암살 요원을 육성했고, 가봉에 북한 테러 요원 2명을 파견해 두 번째 작전을 벌인다. 가봉 정부가 전두환을 영접하는 장소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행사 당일인 1982년 8월22일 원격조종으로 폭파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최종 보고를 받은 김일성이 승인하지 않아 작전은 무산되었다. 그 행사에서는 가봉 군악대가 잠깐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웃지 못할 실수가 있었다. 김정일은 가봉이 아프리카 국가 중 면적과 경제 규모가 작아서 부담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김일성은 그동안 공을 들인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틀어질 것이라면서 실행을 막았다. 단 가봉에서 꾀한 암살작전은 아웅산 테러에서 다시 출현한다.

영화도 현실도 모두 극적인

<헌트>의 종반부는 타이 방콕에서 벌어지는 테러로 물든다. 장소부터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와 다르게 설정되었고 흐름도 실화와 다르다. 실화를 아는 사람에게도 영화는 충격적이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더 충격적일지도 모르겠다. 아웅산 테러의 실제 전개를 설명해도 스포일러가 아니라는 뜻이다. 남한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비동맹 외교’에 공을 들였고, 전두환 정권은 1983년 인도를 포함한 서남아시아 지역 순방을 계획한다. 원안에 없던 버마 순방 일정이 청와대 지시로 삽입된다. 최근 용어로 치면 ‘전핵관’ (전두환측 핵심 관계자) 격인 3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가운데 한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설이 유력하다. 버마 방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북한과 가깝던 버마를 포섭하는 것. 둘째, 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을 연장하는 비결을 현지 정권으로부터 배우겠다는 것.

북한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강창수부대(지금의 개성공단 자리에 있던 771특수부대)에서 김진수, 강민철, 신기철 3인을 차출한다. 극중 ‘7인의 결사대’보다 단출한 구성이다. 잠입하기에는 이 편이 더 유리하다. 북한과 직접 교신할 수 있는 화물선 동건애국호를 타고 9월9일 출발해 9월15일 버마 랑군강 하구에 도착했다. 현지 한국 대사관과 안기부 요원도 북한 선박의 버마 입항을 본국에 보고하지만 테러 요원이 침투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 3인조는 검문검색을 피하려 행사장 인근 숲에서 사흘간 노숙했고, 10월9일 아웅산 묘소 건물 천장에 폭발물을 설치한다.

영화와 실화는 각기 다르게 극적이다. 실화가 영화와 다른 부분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전두환이 목숨을 건진 과정이다. 영화에서도 대통령이 입장하는 도중 혼선이 빚어지는데, 실제로는 더더욱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났다. 우선 전두환은 애초 버마 도착 시점으로 계획된 10월8일 오후 4시보다 더 늦게 버마에 도착한다. 미국에 ‘적국인 중국·베트남과 간격을 벌려 비행하라’는 권고를 받고 행로를 수정했다. 그렇게 도착이 늦춰지면서 아웅산 묘소 참배도 이튿날로 미뤄졌다. 첫째, 초안대로 도착했으면 10월8일에 참배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전두환은 10월9일 있었던 우연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도착을 늦췄는데도 어두워질 무렵 강행했다면 테러에는 더 좋은 조건이 생겼을 것이다.

10월9일 오전 10시30분 정부 인사들과 수행 기자들은 아웅산 묘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버마 외무장관이 약속시간인 10시15분이 아닌 10시19분에 나타나면서 뒤늦게 출발했다. 10시24분 차량 행렬을 발견한 북한 테러 요원 3인은 그것이 전두환의 차라고 오인했다. 그 차에는 주버마 한국 대사 이계철이 타고 있었는데, 그의 용모는 멀리서 보면 전두환과 헷갈릴 만했다. 이즈음 갑자기 군악대에서 나팔 소리를 내면서 폭발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나팔수가 이계철을 전두환으로 착각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경호실 천병득 처장이 시험 삼아 나팔을 불어보라고 손짓으로 주문했다는 설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북한 테러 요원 3인조는 나팔 소리에 속은 것이다.

이계철 대사와 장관 4명, 대통령 비서실 관계자 3명, 기자 1명, 경호관 2명, 대통령 주치의 1명을 포함해 한국인만 해도 17명이 숨진다. 늦게 출발한 전두환 외에도 천운으로 생존한 사람들이 있다. 뒷날 외교부 장관을 지내는 외교비서관 홍순영은 문서 작성을 하다가 숙소에 잔류했다. 공보담당 황선필은 언론 관련 보고를 끝낸 뒤 대통령의 권유로 차를 마시다가 타야 할 차를 놓쳐 뒤늦게 따로 택시를 탔다. 외교관 중 이수혁은 단상 정렬 작업을 마치고 내려가면서 목숨을 지켰고, 송영식은 단상에 올라가기 쑥스러워 물러나 있다 화를 면했다.

버마 정부는 처음에 한국의 자작극 가능성을 드러내놓고 의심했다. 안기부 해외공작국장 이상구는 출국이 정지되었다. 도주하다 붙잡힌 북한 테러 요원들을 안기부가 조사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뚜렷해졌다. 3인 중 신기철은 주민 신고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사살당했고, 나머지 2명은 꺼내든 수류탄이 곧바로 터지면서 중상을 입었다. 그제야 공격용인 줄 알았던 수류탄이 자결용임을 알게 된 요원 강민철은 북한에 대한 배신감에 전모를 털어놓는다. 버마 정부는 북한에 대해 ‘국가 승인’을 취소하고 외교를 단절한다.

사건 직후 전두환의 행보는 놀랍도록 냉철했다. 남한 군부는 보복전쟁을 준비했고 ‘원산 상륙작전’까지 거론되었지만,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군부를 진정시켰다.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 독재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여겨졌던 대회들이 결국 독재나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의 결과 남한에 주둔하면서 북한의 규탄을 받던 주한 미군도 남한 군부를 잡아끌었다. 1980년대는 반전과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전두환이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1979년에 사라진 것이 우연일까.

나아가 남한과 북한은 정상회담까지 추진한다. 1984년 9월 한국에 극심한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구호물자를 원조하겠다고 기습 제의했고, 청와대와 통일부는 반대했지만 다름 아닌 안기부장 노신영이 자신감과 포용력을 보여주자는 역발상으로 전두환을 설득했다. 북한의 존재를 빌미 삼아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안기부가 별안간 남북 교류의 전도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주역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었던 것과 같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

남북 정권의 변덕은 일반인이 이해할 만한 한도를 벗어났다. 그들은 ‘아웅산 테러’조차 단박에 뛰어넘어버렸다. 안기부장 장세동과 북한측 특사 허담이 1985년 9월4일 면담에서 합의한 것은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합시다”였다. 1985년 10월17일 안기부 인사들은 김일성과 평양에서 만나는데, 3일 만에 북한 무장간첩선이 부산에 침투했다가 격침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뒤로도 남북간 비밀 접촉은 이어졌고, 전두환 정권 말기를 맞아 양측의 대화 의지는 크게 꺾이며 소통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때든 독재 정권은 한결같다. 정권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한다. 국민의 지지가 바닥이라서 적의 존재를 이용하고, 또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지 못한 현실을 타개하려 대화 무드를 조성한다. <헌트>의 등장인물들 같은 정권 핵심 관계자들도 이런 원리에 갇혀 있다. 독재 체제에서 옴짝달싹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독재자다. 해외로 축출된 이승만, 죽음으로 물러난 박정희에 이어, 한때 ‘대한민국 제1호’ 전두환은 ‘민주공화국의 타자(남)’로서 2022년 생을 마감했다.

박평호의 이름은 ‘평화’를, 김정도의 이름은 ‘정도’(正道: 바른 도리) 혹은 ‘정도’(正度: 바른 규칙)를 연상케 한다. 평화와 정도는 당장 철권을 사용하는 이들에 의해 구현되지 않는다. 설령 선한 목적을 가진 이가 있더라도 그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나 희생양 만들기는 그를 악의 편으로 이적시킨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 평화와 정도를 이루는 것은 그릇된 수단을 쓸 기회가 드문 평범한 사람들이다. 독재 권력에 대한 심판도, 한반도의 반전과 화해도, 민주화 이후에 진행되었다. <헌트>의 제작 과정에서 쓰인 총알은 1만발이다. 이 총성은,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탄피처럼 지고 만다는 이치를 역설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