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해변의 태양 아래 펼쳐지는 존재의 미스터리, 미첼 프랑코 감독의 '썬다운'
2022-09-01
글 : 김소미
정리 : 이다혜
그 휴가는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제1원칙. 모든 주인공들에겐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썬다운>에서 전통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나마 있던 최소한의 기능과 역할조차 지워가는 방식으로 인물은 서서히 자신을 휘발시킨다. 멕시코 최대 휴양지로 불렸으나 지금은 살인의 도시라는 오명을 덧입은 아카풀코 해변에서의 약 3주. 태양 아래 신체를 방치한 채 변태하듯 자기 껍질을 벗겨가는 남자 닐(팀 로스)의 시선은 전방이 아닌 발밑의 그림자를 향해 있다. 삶의 유한함과 무의미를 조용히 극단으로 몰고 가는 <썬다운>은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남성 인물들을 전시하는 수많은 자아도취적 서사에서 살짝 비껴나, 인물의 감정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나르시시즘을 물리친다. 자기 보호에 무심한 이방인이 머무는 해변가에는 제1세계 상류층 백인의 궁핍한 죄의식, 개발도상국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부서진 조개껍질들처럼 흩뿌려져 있다. 바다는 점점 핏물로 변해간다.

오프닝 신, 슬픔인지 졸음인지 혹은 냉정한 관음인지 알아보기 힘든 표정을 한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죽어가는 물고기 더미를 내려다보고 있다. 카메라가 앙각으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어, 가뜩이나 설득력이라고는 의식하지 않는 배우 팀 로스의 표정이 태양의 역광에 반쯤 묻혀 있는 탓이다. 그가 무언가를 느끼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쯤, 남자의 얼굴 위로 커다란 흰 천이 떨어진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제야 인간이 되어 움직인다. 여동생 앨리스(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자녀들과 함께 아카풀코의 고급 리조트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영국인 닐의 첫인상은 평화와 권태의 한 풍경으로 착각될 만하다. 그러나 고요는 이내 전화벨을 타고 들려온 어머니의 부고 소식으로 깨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오열하는 여동생 앨리스와 두 조카를 공항에 남겨둔 채 여권이 없다는 핑계로 관광지에 돌아온 닐 때문에 산산조각이 난다. 직업과 출신이 불분명했던 이 남자는 장례식에 가지 않기를 택함으로써 가족적 역할까지 불투명한 영역에 내버려둔다.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 곳에나 가달라”고 하는 그의 주문은 당장의 행선지를 넘어 남은 삶의 여정에도 적용될 말이다. <썬다운> 이전에 최초의 제목이었던 ‘유목’(driftwood, 流木)의 이미지처럼, 그는 온몸의 힘을 빼고 세계의 유속과 방향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한다.

무자비해서 매혹적인

미첼 프랑코 감독의 묘사대로 닐은 “자기 인생에조차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택시 기사에게 미래를 맡기고, 여동생에게 모든 유산을 상속하는 동안 그는 어느 것도 제대로 대답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한편 캐릭터가 자기 앞날을 방기하는 동안 영화는 인물의 자취를 따라 관객이 무심코 자각할 만한 대립쌍들을 천천히 심어둔다. 럭셔리 리조트와 값싼 호텔을 잇는 동선이 두어 차례 반복될 때 거론되는 세력으로는 남매를 둘러싼 막대한 상속액과 거대 도축 기업, 닐 주위를 떠도는 아카풀코의 블루칼라 노동자 무리가 있다. 느슨한 공존 상태로, 그러나 분명히 카메라의 지분을 차지하는 채로, 이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파열을 예고한다. 낯선 두 인물, 두개의 선택지, 두 계급이 부딪쳐 파국으로 치닫는 흐름은 미첼 프랑코의 영화(<애프터 루시아> <크로닉> <뉴 오더> 등)에서 이제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바이나, 계급 드라마로서의 긴장이 날카로워지는 후반부에서조차 <썬다운>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닐 자신이다. 영화 중반부, 호텔 방 안에 있던 닐의 짐이 모두 사라진다. “짐이 다 어디로 간 거예요?” 닐은 관리자에게 한마디 묻고는 이내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누가 몰래 방을 드나드는 것일까. 관객이 침입자의 존재를 제대로 상상하기도 전에, 닐은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누리던 문명의 혜택인 스마트폰마저 방구석의 수납장에 넣고 다시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때 진정 두려워지는 것은 점점 좁혀오는 범죄의 기운이 아니라 남자의 초연한 태도다. 나아가 만약 닐에게 공감할라치면 <썬다운>은 그의 가상한 노력에도 결코 자유를 성취할 수 없음이 좌절스러운 영화이기도 하다. 한발 물러나 바라보면, <썬다운>은 자신의 존재가 이 세계에 어쩌면 유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남자의 이야기도 된다. 어찌 됐든 태양 아래 우리는 모두 영원히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무자비해서 매혹적인 명제만큼은 동일하다.

침묵의 응시와 관찰

닐과 앨리스의 관계, 부유층 남매의 집안 배경 등 인물의 심리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들은 수면 저편에 잠겨 있다가 서서히 떠오른다. 최소화된 설명과 대사 속에서 <썬다운>이 요구하는 것은 침묵의 응시, 그리고 관찰이다. 인물의 반응을 우선하며 서사적 정보를 지연시키는 방식은 <썬다운>의 풍자를 덜 노골적으로, 더 미묘한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미첼 프랑코의 <썬다운>과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루벤 외스틀룬드의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는 계급사회의 구조를 첨예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보여주지만, 동시대 자본주의의 벌레스크 쇼인 후자와 달리 <썬다운>은 차라리 1950년대 중반 각광받은 프랑스 문학 영화의 기운을 닮으려 한다는 점에서 극단을 달린다. 모더니즘적인 주관성, 네오리얼리즘적인 관찰력을 더한 결과 <썬다운>은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이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의 계보에 들어선다. 초현실적 순간을 태연하게 끌어안으며 종결 지점을 예측하기 어려운 실존의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이들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에 전혀 조응해주지 않는 외부 세계 역시 엄격하게 묘사함으로써 팽팽한 불안을 키운다. 다만 슬프게도 <썬다운>의 닐에게는 앞선 두 영화 속 인물들처럼 함께 평행선을 그리며 자기를 비출 거울 같은 짝이 없다. 사랑하는 대상(베레니세(이아주아 라리오스))은 있지만, 닐은 연인과 공동체를 이루는 남자가 아니다. 자신의 가족에게 그런 것처럼, 그가 사랑을 느끼지만 사랑을 추구하지는 않는 사람이라서다.

팀 로스의 초월하는 얼굴

<썬다운> 촬영현장.

여동생의 죽음을 사주한 혐의로 멕시코 구치소에 수감된 후 풀려난 닐이 변호사인 리처드의 인도에 따라 고급 세단에 몸을 싣는다. 2주 사이 두명의 가족을 잃은 닐은 이제 막 휴가지로 향하는 공항행 리무진에 탄 사람처럼 창밖을 유유히 바라보더니 이내 리처드에게 다시 아무 호텔에나 내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남자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 리처드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순 전해져온 충격파를 무표정하게 처리하지 못한 변호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자, 내내 태연자약했던 닐의 표정도 찰나 요동친다. 약간은 멋쩍은 미소 같기도 한 그 희한한 표정에서 입가가 조금만 더 벌어지고 눈꼬리의 각도가 아래로 떨어지면 저 남자는 곧 오열하거나 기절할지도 모른다. <썬다운>에 감상적 해석이 허락된다면 말이다. 어떤 연기는 종종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일으킨다.

휴양지에서 생긴 일을 다룬 영화

<로스트 도터>

휴양지의 훼방꾼은 대체로 성가신 나의 내면이거나, 여행 초반에는 잠잠하지만 점점 불길한 기운을 피워올리는 본국에서의 근심이다. 얼마 전 <로스트 도터>에서 자신의 조각난 모성 신화를 돌아보던 올리비아 콜맨에 이어 <썬다운>의 팀 로스는 거대 도축업으로 살찌운 자기 가문의 재산에 냉담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회복은커녕 묵혀둔 상념에 휩쓸려 그동안 정렬해둔 내면이 완전히 무너진 채 떠도는 두 영화의 인물은 성공적인 귀향으로 여정을 마무리짓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썬다운>에서 태양 아래 마비되어 있던 남자는 엔딩 신에 이르러 샌들, 셔츠, 선글라스 같은 자취만 남긴 채 끝내 증발해버린다. 그러나 비극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8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를 찬찬히 응시해온 어느 관객에겐 최소한의 물질적 증거만 남긴 채 투명해져버린 그의 존재 방식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진제공 엠엔엠인터내셔널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