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부모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영우는 자신이 가까운 사람을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한계를, 준호는 스스로가 그 한계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영우와 준호 모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비로소 진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반면 광호는 영우가 고래로 가득한 세계에 빠져 가만히 있을지라도 매우 이타적으로 영우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다. 결국 ‘너의 세계에 함께 있는 나’를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 건 아버지다. 물론 영우쪽에서도 나이를 먹으면서 김초밥을 사오는 방식으로나마 달라져보려고 노력한다. 영우의 두 가지 사랑은 가능한 방식이 다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정명석 변호사(강기영)를 두고 ‘유니콘’이라는 반응이 많았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영우가 첫 출근을 해 명석을 만나면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정명석은 대부분의 시청자가 영우를 보는 시선을 대변하는, 드라마의 기능에 충실하게 셋업된 인물이었다. 명석이 언제까지 영우와 줄다리기를 할 것인가 이견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주변 제작진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일찍 마음을 여는 쪽으로 자꾸 대본이 써졌다. 어떤 시청자는 주인공과 직장 상사의 ‘썸 같은 클리셰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였으면 좋겠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내 딴에는 그걸 해보려고 한 건데….
-서브 남주가 아니라 서브 ‘아빠’라고 불렸다. (웃음)=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매력이 그 매력이 아니었던 거지. (웃음) 차가운 도시 실장님이 아니라 자꾸 따뜻하고 구수한 명석이 됐다. 그래서 중반부터는 클리셰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포기했다. 근데 ‘서브 아빠’라는 별명이 정말 기분이 좋았다. 강기영 배우가 인기를 끌어서 기분이 너무 좋다. 배우가 가진 역량에 비해 분량이 적어서 미안했는데, 분량보다는 ‘멋있는 캐릭터’라며 접근해줘서 굉장히 고마웠다. 사람들이 “정명석의 삼천 부인”을 자청하는 모습도 너무 기분 좋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다룬 칼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조연 캐릭터는 권민우(주종혁) 같다. 한국 사회의 ‘공정 빌런’을 상징한다는 표현도 봤다. (웃음)=대형 로펌에선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런 공간에 우영우 같은 사람이 던져졌을 때 반드시 나타날 수 있는 반응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그 시선을 대변하는 권민우 캐릭터를 만들었다. 사실 작가로서 이런 생각까지 했다. 권민우처럼 말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저 공간이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우영우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마치 없는 것처럼 표현하면 드라마의 균형감이 깨질 것 같았다. 사실 작가가 앞장서서 작가의 언어로 권민우 같은 차별주의자를 비판하고 응징하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많이 느꼈지만,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권민우 같은 인물과도 같은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런 권민우를 ‘갱생’시키는 게 맞느냐는, 일부 시청자의 의문이 있었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에피소드물로 쓰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 다음 회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미국 드라마는 에피소드물로 만들어져도 멈추지 않고 계속 보게 된다.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내가 그 커뮤니티 안에 있는 인물들을, 그 세계를 나름의 애정을 갖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영우의 주요 인물들을 시청자가 나름대로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앞서 말한 이유로 권민우가 소악당의 역할을 하게 됐지만, 마지막에 다들 훈훈하게 끝나는데 혼자 팔짱 끼고 있게 두기에는 망설여졌다. 고민을 많이 하다가 권민우가 현실적인 개심을 하는 쪽을 생각했다. 사실 권민우는 180도 바뀌지 않았다. ‘갱생’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삶의 태도와 조금 다른 행동을 한다. 얄미운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영우의 편에 서보기도 하는 경험을 하는, 딱 그 정도의 변화다. 그런데 영우의 인성에 감화해서 민우가 바뀐다는 전개는 설득하기가 너무 힘들다. 원래 사람은 연애 감정을 느낄 때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나. 그렇게 민우가 수연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욕을 너무 많이 먹었다.
=주변에 보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친구가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연애를 하며 가슴앓이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수연이는 워낙 긍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됐기 때문에 연애쪽은 헛짓거리를 하며 헤매는 모습을 넣은 건데 내가 충분한 설득력을 부여하지 못했다. 서브 플롯에 큰 변화가 생길 때 훨씬 더 섬세하게 조심했어야 했다. 아직 작가로서 경험이 많지 않아 전개가 ‘급커브’한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부분은 정말 죄송하다.
-‘출생의 비밀’ 코드는 제작사에서도 우려했는데 고집한 이유가 있나.=16화에 등장하는 대사, “나에게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지만 최상현군에게는 좋은 부모가 되어달라”고 하게 되는 그림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출생의 비밀’의 전통적인 클리셰에서 성별을 뒤바꾼 것은 제작사의 공이다. 심지어 난 아버지가 버린 설정으로 가려고 했다. 진부함을 견디지 못한 제작사에서 성별이라도 바꿔보지 않겠냐는 의견을 줬다. 그러다가 태수미(진경)와 한선영(백지원)의 과거 악연이 있다는 설정과 함께 두 로펌 대표도 여자가 됐다.
-드라마에 ‘정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바다의 한선영 대표는 “정치적으로, 덜 낭만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라고 조언하고, 우광호는 딸의 출생에 얽힌 사연이 ‘정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한다. 최수연은 권민우에게 “동료를 위해서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서 처세며 정치며 잠깐 내려놓고 바보처럼 용감해질 수는 없냐”고 한다.=꼭 변호사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이 그렇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그렇지 않을까. 13살 때 <그랑 블루>를 보고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에는 돌고래가 뛰어노는 푸른 꿈이 있지만 이 업계의 일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나만 해도 거짓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증거를 남기려고 최근 아이폰에서 갤럭시로 기기를 바꿨다. 만약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시즌제로 간다면, 첫 번째 시즌에선 대형 로펌 커뮤니티에서 느끼는 처세의 어려움이 중요한 벽이 된다. 원리 원칙이 중요한 영우가 느끼는 충격, 세상을 좀 알지만 이타심이 가득한 수연이 느끼는 충격, 오히려 정치 안에 있을 때 활기를 띠지만 어떤 변화의 여지도 있는 민우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씩 다르다. 신입 변호사에게 정치가 중요한 주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판타지적인 드라마라고 하지만 의외로 뻔한 전개를 택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영우나 휠체어 사용자가 이용하기 어려운 회전문은 누군가의 호의로 사라지지 않고 마지막회까지 그대로 있다. 우영우가 대형 로펌을 나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지 않겠냐는 추측도 많았지만 영우는 한바다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현실 안에서의 가능한 희망을 보여준 것인가. 혹은 외뿔고래가 흰고래 무리와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모습을 담는 게 이 드라마에게 더 이상적인 마무리라고 생각한 것인가.=<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동화 같은 판타지라는 반응을 많이 봤다. 사실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작가로서 매 순간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만약 회전문을 없애거나 영우가 인권 변호사가 되는 얘기를 해야 했다면 훨씬 더 많은 에피소드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형 로펌 적응기, 대형 로펌에서 겪는 어려움, 새로운 대안의 등장, 영우가 겪는 갈등,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의 등장, 그리고 결말까지. 이 내용을 다 풀기 위해서는 16부작으론 부족하다. 지금 회차에서 가능한 고민들을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사실 자폐인, 레즈비언, 탈북자, 어린이, 지적장애인, 해고 노동자 등이 사건 당사자로 나오며 약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가 ‘정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가 굉장히 어렵다. 자칫 프로파간다적인 결론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완급 조절을 잘했더라. 어떤 메시지를 직접 드러내거나 결론을 짓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가 보였다.=현실에서도 그저 단순한 사안은 없다. 모든 일은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각자가 복잡한 입장을 갖고 있다. 드라마로 풀기에 옳은 판단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삐쭉 튀어나오는 이상한 지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강자는 뻔뻔하고, 약자는 울고, 우리는 악인을 족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질문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박은빈 배우가 핫하고 유인식 감독님이 스타 연출자니까,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하더라도 의미 있고 좋은 드라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감하게 지른 것도 있다.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잘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초반에 약속했던 쾌감을 더이상 주지 않는다며 “이럴 거면 내가 <100분 토론>을 봤다”는 일부 시청자의 화는 정당하다. 그리고… 흥행을 밥 먹듯이 했던 유인식 감독님인데 이상하게 9~10화를 쓸 때쯤 나랑 쿵짝이 너무 잘 맞았다. (웃음) 누구 하나 견제하지 않고 “희미하게 끝내지 말고 더 확실하게 가자”며 한도 끝도 없이 나갔다. 나나 감독님이나 영우의 성장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확고했다.
-박은빈 배우를 통해 구현된 우영우를 확인하는 과정이 작가로서 정말 감동적이었을 것 같다.=배우가 캐릭터를 준비할 수 있도록 관련 책과 진단 기준을 주긴 했지만 사람은 그렇게 항목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지 않나. 자료를 잔뜩 주면서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화면 속의 박은빈 배우는 항목이 아닌 통합된 인간으로 영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펄떡펄떡 뛰는 활어 같았다. 사실 이전 출연작을 보면서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머리형 배우’라고 혼자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우영우 버튼이 눌렀다 꺼졌다 하는 것처럼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혹시 진경 배우 칭찬을 함께해도 될까? (웃음) 너무 어려운 캐릭터였다. ‘엔딩 요정’처럼 에필로그 한신만 나오는데, 분량에 비해 중요도가 높다. 동시에 태수미가 가진 서브 텍스트와 감정까지 표현해야 했다. 배우에게 굉장히 불친절한 대본이었는데 너무 훌륭하게 소화해줘서 매신을 감탄하면서 봤다.
-신인 작가에게는 <자이언트> <낭만닥터 김사부> 등을 연출한 유인식 감독의 존재가 정말 든든했겠다.=에피소드물인 만큼 16번을 새로 세팅해야 하는 드라마의 프로덕션 퀄리티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유인식 감독님의 힘이다. 에피소드마다 작은 분량의 인물까지 어쩜 그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채워넣으셨을까. 드라마에 나오는 판사는 정말 판사 같고, 의사는 정말 의사 같다.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연출에 감탄했다.
-만약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시즌2가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없다. 이번 드라마는 우영우가 변호사가 되는 게 가능할 것인가를 질문했고, 신임 변호사의 대형 로펌 생존이 주된 테마였다. 그렇다면 시즌2는 주니어 변호사가 할 만한 고민을 보여주는 한 문장이 필요할 텐데,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고민해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