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2>로 인한 일시적인 착시일 뿐 시장은 회복되지 않았다.” 천만 영화가 이어지고 극장이 완전히 회복하리라 기대했던 많은 영화 관계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과열한 경쟁 속에 엄혹한 성적을 거둔 투자·배급·제작 관계자와 향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관계자들에게 앞으로의 전략에 관해 물었다. 이번 여름 결과가 기존의 전략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 관계자들은 관객의 눈높이와 상영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고 이로 인한 수익모델 다각화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다양성 영화의 투자 위축도 우려했다.
실제로 극장 영화에 활발하게 투자했던 투자사 책임자 B는 “현재 영화쪽으로 진행 중인 건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좋은 아이템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변수가 많다보니 영화보다는 시리즈로 자본이 몰리고 배급사마다 개봉 대기 중인 영화가 대거 밀려 있기 때문이다. “투자 조건에 걸려 있는 개봉 마지노선이 2022년을 넘기지 못한다. 현재 개봉 대기 중인 영화가 대부분 제작비 50억원 정도의 중저예산 영화라는 점도 문제다. 짧은 시기에 몰려 개봉하기 때문에 흥행 전망도 불투명하다. 배급사들이 눈치를 보며 개봉을 미루면서 누적된 문제가 폭발하고 있다.”(투자사 책임자 C) 또 다른 투자사 책임자 B는 “그동안 밀려 있던 영화들이 개봉하고 다시 투자가 이루어지는 선순환이 되기까지 적어도 1년은 걸린다”며 “현 경색 상황의 본질은 배급 스케줄이 꼬이면서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장르나 사이즈만 가지고 영화를 고르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 관객은 <탑건: 매버릭>처럼 감동, 스토리, 볼거리 모두를 갖춘 영화를 원한다. 평균 제작비가 올라가면서 다양성을 기대하기도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특정 장르에 대한 배제가 시작되면 과거 홍콩영화처럼 검증된 것만 반복하는 식으로 시장이 편중화될 가능성도 있다.” 검증된 영화를 찾는 관객의 시각에 관한 우려와 고민은 배급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말 극장에 와서 더 볼만한 영화가 뭘까에 대한 고민이 크다. 컨셉추얼한 영화가 돼야 눈에 띄어 관객이 극장에 오니까 앞으로 배급을 결정하거나 판단할 때 이런 점을 고려하게 된다.”(배급사 D)
다각화된 수익모델의 필요성
다수의 배급사 관계자는 다각화된 수익모델의 절실함을 피력했다. “시장 사이즈가 줄어서 영상 콘텐츠 하나만으로는 수익을 내기는 어렵다. 복합적인 IP 확장 등을 통해 수익구조를 변환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배급사 E) “이제는 한국에서만 잘될 것 같은 느낌이나 판단으로는 투자하기 어렵다. 중요한 관점이나 앵글이 글로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배급사 F) ‘해외 몇 개국 판매 쾌거’ 같은 보도자료가 나가도 수익으로 환산하면 높은 액수가 아니라는 거다. “드라마나 시리즈물에 비해 영화는 해외 세일즈로 수익이 나는 구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는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관객의 높아진 눈높이에 들어가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52시간 근무시간의 제한으로 제작비는 높아지는 반면 시장 자체가 작아지기 때문에 로컬 장사로는 답이 안 나오는 산업구조”라는 판단이다. 이러한 성적을 두고 배급사들 역시 겨울 성수기를 고민하고 있다. 배급사 G도 “기존에 너무 많은 포션을 차지하는 극장 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유통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사업적 노력을 해야만 그 작품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다른 수익구조를 염두에 두고 거시적으로 재투자라든가 작품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데 고려를 많이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투자자에게 안전망으로 떠오른 OTT 플랫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쿠팡플레이가 8월29일 <한산: 용의 출현>을 독점 공개한 데 이어 9월7일부터 <비상선언>을 서비스한다고 알렸다.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쿠팡플레이가 극장에 개봉 중인 <한산: 용의 출현>과 <비상선언>의 2차 시장 권리를 독점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320억원대에 이른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다. TVOD(건별 주문형 비디오)보다는 OTT 플랫폼에 SVOD(구독형 주문 서비스) 독점 권한을 넘기는 쪽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다.”(제작사 대표 H)
OTT 플랫폼에 콘텐츠를 독점 제공해 관객이 극장을 찾지 않게 될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지만 산업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홀드백이 무너졌다는 지적이 많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OTT가 제작사의 수입원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사인을 준 셈이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시장 변화로 보는 게 맞다.”(제작사 대표 I) 이미 지난해 <자산어보>가 티빙에 독점 공개되며 극장에서 넘기지 못한 손익분기점에 거의 닿은 점을 떠올려보면 이미 극장산업에서는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셈이다.
오래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영화 보는 게 힘들다라든지 티켓값 때문에 작품을 까다롭게 고른다는 얘기는 영화가 극장에서 보는 매체라는 데서 오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제작사 대표 J는 “올여름 시장을 겪으며 오래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영화의 기획, 오래 상영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 상반기 영화들은 전체 관객수가 줄어 손익분기점을 달성하는 데 예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름 시장의 승자로 손꼽히는 <한산: 용의 출현>도 한달여 만에 700만명을 돌파했고, 천만 관객을 만난 <범죄도시2> 역시 하루에 제일 많은 관객이 든 건 104만명이었다. 광복절 등 연휴의 경우 하루에 180만명을 웃돌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은 숫자다. 최근 개봉한 <육사오(6/45)>는 초반에는 개봉관 자체가 적었지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 사이에서도 개봉 2주차에 예매율 1위로 올라섰다. 극장 담당자 K는 “<육사오(6/45)>의 추이를 관심 있게 보고 있다. 관객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진 영화에 관해서는 장기 상영을 분명히 열어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공조2: 인터내셔날>이 유일한 추석 영화로 출격한다. 영화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공조2: 인터내셔날>의 선전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공조2: 인터내셔날>이 독식하더라도 시장이 좀 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10월에 준비하고 있는 영화들 역시 탄력을 받는다.” 개봉 전부터 예매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추석 흥행을 예고하고 있지만 배급사들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올 상반기 영화들의 예측 불가한 상황 탓에 기대하는 마음도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각각의 투자배급사는 올겨울까지 예정된 대작들을 순차적으로 개봉할 예정이다. 롯데는 9월 <인생은 아름다워>를 시작으로 <자백> <크리스마스 선물>(가제)을 예정대로 배급한다. CJ도 12월에 윤제균 감독의 대작 <영웅>을 배급할 예정이다. 다른 배급사들도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며 “어쨌든 마스크를 벗고 팝콘을 먹고 있지 않나. 올해 어려웠지만 지난해 여름 시장보다 낫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