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2017) 이후 5년 만에 윤종빈 감독이 첫 시리즈물 연출에 도전했다. 9월9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은 브라질에 인접한 남아메리카 동북부의 소국가 수리남에서 벌어지는 한국 남자들의 마약 전쟁을 가열하게 가로지른다. 윤종빈 감독은 오랜 페르소나인 하정우, 황정민 사이에 의심의 축대를 세우고 그들을 부의 쟁탈전으로 몰아넣은 다음 감시자로 박해수를 내세웠다.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를 채우는 또 다른 얼굴들인 조우진, 유연석, 장첸 역시 제각기 뾰족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다. <오징어 게임> 이후 1년, 2022 추석 연휴를 겨냥해 넷플릭스가 호기롭게 내놓은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 <수리남>의 좌표를 찍어보았다.
미쳐 있거나 점점 미쳐간다. 인구 약 50만명, 이름도 생소한 수리남공화국까지 기어든 남자들은 저마다 딱하고 유해한 사정을 잔뜩 짊어지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수리남은 최후의 보루다. 돈과 권력, 생존과 믿음의 문제에 연루돼 피 흘리는 서사의 중심에는 마약이 있다. <수리남>은 대중 서사의 소재로서 마약이 갖는 선정성을 숨김없이 이용하는 드라마다. <나르코스>든 <브레이킹 배드>든 또는 마약에 관한 과학적 지식에 집중한 넷플릭스 스타일의 다큐멘터리든, 모든 마약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자극적이다. 미량의 결정체가 인간 정신을 헤집어놓고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며, 극단적으로는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신경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어두운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공작> <군도: 민란의 시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로 각종 범죄, 첩보 서사를 섭렵한 윤종빈 감독은 자신이 꾸준히 건드려온 금기, 부패, 불가항력, 그리고 욕망이라는 강력한 자장을 한국인 마약왕 스토리에서 다시 한번 극대화한다.
세명의 남자, 여섯개의 정체성
“쉬운 길 끝에는 뻔한 인생, 어려운 길 끝에는 행복한 인생!” 강인구(하정우)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동두천 잔혹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강인구 가족의 역사는 새벽녘 야쿠르트 배달 중 뇌경색으로 사망한 그의 어머니와 심야 화물차 운전 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이야기로 요약된다. 일찌감치 미군기지 옆 카센터와 유흥주점에서 일하면서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일’들을 익힌 남자는 어느새 집에 가득 쌓인 설거지들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더니(이 대목에서 잠시 경악해도 좋다), 수첩을 뒤적여 주변 여자들에게 차례로 청혼 전화를 돌린다. 소요산 자락 밑바닥에서 익힌 독기와 뻔뻔함, 사업 수완을 두루 발휘해 그는 어느덧 4인 가족과 전셋집을 소유한 중년이 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사이 자본의 섭리는 강인구에게 약간의 성취감을 쥐어주고 감사함과 만족감을 앗아가버렸다. 홍어회 앞에서 동창 최응수(현봉식)와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그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 수리남의 바다에선 홍어가 통째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돈냄새를 따라 짐을 싼다.
남아메리카 소국가 수리남으로 무대를 빠르게 옮긴 <수리남>은 정부 군인과 결탁해 홍어 비즈니스로 인생 절정기를 향해가는 강인구의 상승 곡선을 숨가쁜 몇개의 몽타주로 농담하듯 흘려보낸다. 잔혹한 본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일단은 마음 편히 즐겨두라는 투다. 적당히 능글거리며 버무린 프롤로그 끝에 등장하는 조커는 수리남 한인교회 목사 전요환(황정민)이다. 배우 황정민은 은은한 광택이 도는 성직자복을 입고 날렵한 모습으로 나타나 매번 자기 눈앞의 사태를 한눈에 조망하는 독수리의 눈빛을 쏘아붙인다. 온갖 공작과 민란, 범죄와의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머지않아 강인구는 ‘홍어 뱃속 코카인’ 사건에 휘말려 브라질 감옥에 갇히고, 음모의 배후에 목사 전요환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평범한 남자 강인구의 성공 신화를 압축한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서는 악명 높은 마약 범죄자 전요환의 극악무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친절한 내레이터로 등장한 인물은 수년간 전요환을 추적해온 국정원 미주지부 팀장 최창호(박해수). 그는 강인구에게 다시 수리남으로 돌아가 전요환 검거 작전을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수리남>을 구성하는 세명의 주축들이 각각 자기 전말을 모두 내보이는 2화 무렵에 이르면, 역할극의 출연진은 순식간에 배로 늘어난다. 민간인에서 언더커버가 된 강인구, 덩달아 강인구의 동업자인 국제 무역상을 연기하는 국정원의 최창호, 목사이자 마약 대부인 전요환이 공평하게 분량을 나눠 가진 수리남의 광대들이다. 세 남자가 여섯개의 정체성을 오가는 동안 위태로운 긴장을 부르는 요소들이란 대개 액션보다 대화에서 파생된다. 스릴과 서스펜스는 마주한 테이블 너머로 굴러가는 눈빛, 임기응변을 발휘해 내지른 거짓말, 도청과 위치 추적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총격, 카 체이싱, 탈주의 운동은 의도적으로 집약돼 있는 반면, 의중을 간파하기 위한 교묘한 대화의 운동을 집요하게 늘인 <수리남>은 의외의 지점에서 리드미컬해진다.
심플하고 대담한 마피아 게임
<수리남>에서 배우 하정우는 다소 퀴퀴한 마약왕 드라마의 채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수완 좋고 맷집 좋은 민간인 강인구는 특유의 유머와 뻔뻔함으로 심각한 순간에 종종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6인의 주요 캐릭터가 모두 자기 장기를 선보이는 데 능한 베테랑 남성배우들일 때, 물샐 틈 없는 조화 속에서 하정우의 능청은 오히려 간만에 적소를 찾은 듯 보인다. <오징어 게임> <야차> <양자물리학> 등을 거치는 동안 박해수에게 생성된 은근한 직장인 이미지는 <수리남>에서 비로소 활력으로 기능한다. 껄렁대는 무역업자를 연기하느라 진땀을 빼는 최창호의 어설픔은 스크린 바깥의 기시감과 어울려 꽤 흥미로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어설픈 교훈과 감정적 딜레마에 미련이 없다는 사실도 <수리남>을 차라리 산뜻하게 만든다. 속이는 사람, 속는 사람, 눈치채는 사람의 역할을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원형의 궤적을 그리는 마피아 게임. <수리남>의 구성은 이토록 심플하고 대담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만드는 전통적 힘겨루기를 계속 보게 만드는 큰 힘 중에는 1시간여에 달하는 매 에피소드의 러닝타임에 약간 지쳐갈 때쯤 효과적으로 등장하는 클리프행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수리남>의 마피아 게임은 그렇게 아무도 살해되지 않는 몇개의 밤을 아슬아슬하게 건넌다.
허구보다 더 극적인 실화
“본 작품은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시리즈 내에서 묘사된 인물과 사건은 극적인 목적을 위해 재창조되었음을 밝힙니다.” 수리남 군,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대규모 마약밀매조직을 운영한 조봉행의 실제 스토리는 극적 목적으로 가공되기 이전에도 충분히 드라마틱했다. 10억원가량의 빌라 건축 사기를 저지르고 수배 대상이 된 그는 1995년에 수리남 국적을 취득하고 불법 생선 공장을 운영하다가 남미 최대 마약조직인 칼리 카르텔과 손잡았다. <수리남>은 실존 인물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반으로 쪼개 각각 홍어 수입업자 강인구와 마약 대부 전요환이라는 두 인물로 탈바꿈시켰다. 2011년 <중앙일보> 취재에 따르면, 국정원이 조봉행을 검거할 목적으로 민간인과 협업한 것도 사실이다. 조씨로 인해 사업상 큰 피해를 본 민간인이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청했고 국정원은 극중 최창호의 역할에 해당하는 가상의 재미교포 마약상을 꾸며내 조봉행이 미끼를 물도록 유인했다. 약 1년에 걸친 긴 계획은 브라질 공항에서 희대의 마약왕이 검거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됐다. 조씨는 전요환처럼 실제로 수리남 보우테르세 대통령과의 친분을 자랑했고, 수리남 내 한국 교포들을 섭외해 운반책으로 이용했다. 마약을 보석이라 속인 뒤 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부들을 유혹했는데, 이로 인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여성의 실화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 방은진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