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리스 하나와 변기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에 한 소년이 갇혀 있다. 그때 방 한편에 설치되어 있는 낡은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따르릉… 따르릉….” 유괴범이 분명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작동하지 않았다고 밝혔던 고장난 검은 전화기가 불현듯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소년은 자신이 듣고 있는 벨 소리가 기적을 바라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청인지, 아니면 영악한 유괴범의 못된 계략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시끄러운 벨 소리가 멈추길 기다려보지만, 그 울음은 도무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전화벨 소리는 오히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소리와 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의 간격을 완전히 줄여가면서까지 울음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이에 굴복한 소년은 하는 수 없이 ‘블랙폰’의 수화기를 들게 된다. 그 순간부터 영화를 보는 관객은 원하든 원치 않든,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블랙폰>이 영화에 현실을 불어넣는 방식
1970년대 미국 노스덴버 지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이 유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시작했을 때 이 마을은 이미 아이들 여러 명이 실종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에 주인공 피니(메이슨 테임즈)와 여동생 그웬(매들린 맥그로)이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피니와 야구 경기에서 공을 주고받았던 한 아이가 유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지만, 달라진 건 마을 곳곳에서 아이를 찾는 전단지가 보인다는 것뿐, 아이들의 행동 양식엔 변화가 없다. 이건 피니와 그웬의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마을 전반에 아직 위기의식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례로 피니가 친구 로빈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둘은 당시 유행했던 시리즈인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들먹이는 등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곧이어 그랬던 로빈마저 전단지 속 사진의 주인공이 되지만, 피니와 그웬은 여전히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홀로 길을 걷는다.
영화는 아이들이 납치당하는 현장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자세히는 아니지만 뭔가를 보여주기는 한다. 바로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빠르게 벗어나는 검은 밴과 검은 풍선이다. 아주 잠깐씩 등장하는 이 ‘범행 현장 영상’은 브렛 유트케비츠 촬영감독이 슈퍼 8mm 필름으로 촬영한 장면들인데,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8mm 필름이 지닌 독특한 화면 질감이 극에 왠지 모를 현실성을 불어넣는다(슈퍼 8mm 필름은 실제 70~80년대 초 가정용 촬영 수단으로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마치 자신이 속한 현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행동하는 영화 속 인물들과, 반대로 이것이 실제 벌어진 일인 것처럼 기록 영상의 질감으로 찍힌 화면이 대조를 이룬다. 마침내 피니의 앞에 나타난 검은 차 옆에서 기괴한 분장을 한 그래버(에단 호크)가 모습을 드러낼 때, 현실에서 우리가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했던 각종 ‘OO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블랙폰>이 제시하는 게임의 규칙
정신을 차린 피니에게 친절한 오리엔테이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밀실’, ‘감금’, ‘탈출’의 키워드로 서사를 진행시키는 영화들은 초반부 얼마간을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데 몇개의 신을 소모하기 마련이지만, <블랙폰>은 이곳에 들어온 신입생에게 여유를 줄 생각이 없다. 그래버는 마치 유명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의 화가 잔뜩 난 모 교관처럼 다짜고짜 피니를 밀어붙인다. 우리는 그래버의 분노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안내받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그의 게임에 휘말리게 된다.
이에 질세라 문제의 전화벨이 울린다. 아직 게임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전화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이 전화는 우리를 도와줄 보급품인가, 아니면 교관의 함정인가. <블랙폰>은 아무 데나 터치해도 되는 스마트폰처럼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관객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은 다음, 유괴범 그래버가 제공하는 허기만 채울 정도의 조촐한 식사 같은 단서를 방 한편에 툭 던져놓을 뿐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선택은 두 가지 갈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버의 말을 믿고 그 음식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이 50 대 50 확률의 선택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상황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블룸하우스와의 협업
<블랙폰>은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2005), <살인 소설>(2012),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 저예산 호러영화에서부터 거대 제작사의 인기 시리즈 영화까지 두루 연출을 맡았던 스콧 데릭슨 감독의 신작이며, 동시에 이제는 국내 영화 팬들과 두터운 신뢰를 형성한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의 작품이다. 스콧 데릭슨 감독과 제작자 제이슨 블룸간의 협업은 전작 <살인 소설>을 통해 이미 성공적인 결과를 낸 바 있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패션 프로그램에 공식 초청됐던 이 작품은 북미 개봉 당시 3일 만에 제작비의 6배가 넘는 수익을 냈고, 이에 힘입어 속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두 창작자간의 좋은 기억은 <블랙폰> 프로젝트의 제작 과정을 보다 순조롭게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하우스와의 작업을 갈망하고 있던 데릭슨 감독이 작가 조 힐의 2005년 베스트셀러 단편집 <20세기 고스트>에 수록되어 있던 <블랙폰>을 읽고 큰 영감을 받은 것이 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세계 최고의 장르 소설가 스티븐 킹의 아들이기도 한 조 힐의 이 단편집은 발표 당시 세계 최고의 호러소설에 주어지는 상인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데릭슨 감독이 이 이야기에 특별히 매료된 까닭은 감독의 고향이 바로 소설 속 이야기가 펼쳐진 노스덴버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년 시절 감독의 기억으로부터 발전된 영화 속 세트 디자인은 아이가 주인공인 이 영화의 설정과 묘하게 어우러지고, 그렇게 <블랙폰>은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닌 한 시대를 담은
공포영화가 된다. 올 6월 북미에서 개봉해 8월28일 기준 8900만달러의 수입을 기록하고 있는 현 상황은, 데릭슨과 블룸의 다음 프로젝트를 기대하게 만든다.
<블랙폰>의 이름들
두 창작자만큼 이 영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단연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 그래버를 연기한 에단 호크다. 아이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이 영화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성인 배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데릭슨 감독은, 그래버 역으로 <살인 소설>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에단 호크를 선택했다. ‘에단 호크가 연기하는 살인마’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면 사이로 비치는 그의 섬뜩한 표정과 짐승 같은 육중한 몸뚱이로 거칠게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나면, 지금까지 로맨틱한 모습으로 사랑을 속삭이던 그의 예전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역들 역시 에단 호크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펼친다. 매들린 맥그로는 오빠가 지하에 갇혀 있는 동안 지상에서 홀로 분주하게 구출 작전을 펼치는 여동생 그웬을 연기한다. 꿈을 통해 미래 혹은 과거를 보는 능력을 지닌 그웬은 원작에선 비중이 작았지만 배우의 매력을 통해 용감하고 비중 있는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
사실상 1인극을 펼치는 13살 피니를 연기한 메이슨 테임즈 또한 인상적이다. 피니는 그웬과 달리 특별한 능력이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다만 피니가 특별한 것은, 수화기 반대편에서 말을 건네는 또래 희생자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니는 망자의 가호를 받는다. 공포영화인 <블랙폰>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피니가 계속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때문 아닐까. 이 영화에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피니가 외친 그 이름들일지도 모른다.
스콧 데릭슨의 데뷔작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스콧 데릭슨은 SF 액션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과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제외하면 데뷔 이후 줄곧 호러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는 특히 엑소시즘, 소위 퇴마, 악령에 관한 소재에 천착해왔는데, 그중 데뷔작인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고전적인 호러 스타일의 영화에 법정 공방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장르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고어한 장면과 드라마적 요소가 잘 어우러져 미국의 SF, 스릴러 등 장르영화를 대상으로 열리는 시상식인 새턴 어워즈에서 최우수호러상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의 고어 장면을 보다보면, 스콧 데릭슨이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다 촬영 직전 하차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다소 아쉬웠던 호러 장면들의 ‘스콧 데릭슨 버전’을 상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