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버지를 연기한 적은 많지만, 그에 비해 류승룡은 아버지 이미지가 지배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아마 그가 멜로 연기에 강한 중년 남자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칠지만 섬세한 캐릭터로 각광받기 시작했던 류승룡은 드라마 <황진이>,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도 멜로 연기를 소화한 데 이어 <도리화가>에서도 수지와 감정을 맞췄다. 때문에 그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복합 장르를 가진 작품의 중핵이 될 수 있다. 보편적인 가족극이면서 20대부터 40대까지 이어지는 부부의 멜로를 보여주는 뮤지컬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류승룡이 가진 독특한 위치 때문에 성립될 근거를 얻는다.
사사건건 아내를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 진봉은 쉽게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다. 특히 중반부까지는 “그럴 리 없겠지만 설마 비혼 권장 영화인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비호감으로 묘사된다.
= 초고 때는 더 비호감이었다. 나이대도 훨씬 높고 더 괴팍하게 구는 걸로 묘사됐는데 많이 덜어낸 거다. 삶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극에는 빌런이나 안타고니스트가 있어야 하지 않나.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진봉과 자식들이 해줘야 하는 구조였다. 이렇게 극을 설계하지 않으면 세연(염정아)의 롤이 작아질 수도 있다. 어떤 신은 자연스럽게 생활 연기가 나왔지만 진봉 캐릭터와 실제 내 모습이 많이 달라서 고통스럽기도 했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뒤로 가면 앞부분을 상쇄할 만한 좋은 신들이 나올 수 있도록 조율해갔다.
세연과 진봉이 처음 만났던 20살 때부터 연기하는 설정에 부담은 없었나. 영화에서는 일부러 80~90년대 한국영화처럼 연기한 듯 보였다.
= CG로 얼굴을 젊게 만들지 않아서, 대신 목소리 톤을 높이고 대사도 빨리 하고 마치 귀가 쫑긋 올라간 것처럼 연기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읽을 땐 젊은 역할은 다른 사람이 할 줄 알았는데 “아니요! 류 배우님이 하셔야죠!”라는 거다. 그때부터 도전 의식이 생겼다. 메소드 연기로 접근하진 않았지만 류승룡과 염정아가 그대로 과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적 기호로 약속되어야 하는 거다. 사실 내가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장발을 하고 대학생으로 나오는 게 어처구니없지 않나. 훈련병으로 나올 땐 연대장 같고. (웃음) 그런데 그 자체로 ‘저땐 저랬었지’라는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다.
20대의 진봉은 누구보다 열렬하게 세연을 사랑했다. 그랬던 그가 미운 남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다. (웃음)
= 개인적으로는 결혼하고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랬던 인간들이 사랑할 때 안 그런 척한 거라고 생각한다. (웃음) 진봉의 아빠(박영규)의 괴팍한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진봉에게도 그런 기질이 있었을지 모른다. 시대에 따라 아버지상이 바뀔 수밖에 없지만 진봉도 자신의 아버지를 보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있지 않았을까. 사실 진봉의 가족은 한국의 평균에 가깝다. 자식 키우는 걱정을 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다. 일상에 찌들면 감사함이 적어진다.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매사에 짜증이 났을 거다.
과거 서울예대 출신 배우들과 함께 동랑극단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고, 전위극을 한 적도 있고, 특히 <난타>는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이런 경험들이 뮤지컬영화 연기에 도움이 많이 됐을 것 같다.
= 여러 대형 뮤지컬에서 앙상블 연기를 했고, 소극장 뮤지컬 무대도 많이 섰다. 1995년에는 유해진 배우와 삭발하고 뉴욕 라마마 시어터에서 <구도의 길> 같은 행위 예술극을 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난타>에 올인했다. 당시엔 5년 동안 매일 같은 연기를 하느라 내가 매너리즘에 빠지진 않았는지 고민했다. 그런데 반복되는 연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터득한 몸짓 연기와 타이밍 감각이 있었나 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언제 공연하는지,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 관객의 연령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 같은 공연이 아니었다. 그렇게 체득한 몸 연기를 가장 먼저 구현한 작품이 <내 아내의 모든 것>이었고 <인생은 아름다워>를 찍을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무 연습 과정은 어땠나. 턴 동작이 많던데 이건 기본기가 있어야 소화할 수 있지 않나.
= 다행히 예전에 좀 돌아봐서 괜찮았다.(웃음) 난이도 높은 안무보다는 대중이 보기 편하도록 언어를 몸짓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이 영화는 어떤 상황의 대사를 기호화한 몸짓을 보여주는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70~80년대 안무를 보여주며 흥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후시녹음으로 화면에 노래를 입혔다. 이미지와 소리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끔 기술적인 접근은 어떻게 했나.
= 박자와 감정을 미리 정해놔야 현장에서도 그에 맞게 연기할 수 있다. 그래서 80% 정도 결정한 상태에서 모든 곡을 사전에 녹음했다. 현장에서는 녹음해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입을 벌리거나 실제 노래를 하면서 촬영했다. 현장 녹음본 중 건질 만한 부분도 있었다. 촬영이 끝난 후 연기할 때 감정과 현장감을 떠올리며 노래를 한곡씩 다시 녹음했다.
평소 노래 실력은 어떤 편인가. 극중 혼자 부르는 삽입곡이 꽤 있다. 뮤지컬영화는 기술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감정을 잘 담는 게 더 중요하긴 하지만.
=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어마어마한 명창들이 전국 각지에 있다. 내가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평범한 아저씨들과 다르지 않다. 레슨을 많이 받았다. 상황에 맞게 가사와 감정을 모두 잘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며 노래했다.
‘차기작 부자’다. 영화 <비광> <정가의 목장>, 디즈니+ <무빙>에 나온다.
= 그러고 보니 다 가족 얘기다. <비광>은 진한 피에 대한 이야기, 아이슬랜드영화 <램스>를 리메이크한 <정가네 목장>은 형제 이야기, <무빙>은 아이들을 지키는 초능력자 어른들의 이야기다. 가장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평범함에서 시작하는 작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