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전 매년 1천만 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이 방문했던 지역. 다른 대륙에 비해 경제 성장률이 높기 때문에 글로벌 자본이 신규 수익원으로 주목하고 있는 시장. 한국과 밀접하면서 무궁한 잠재성으로 주목받는 동남아시아는 영화 산업 역시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아세안 10개국(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으로도 통칭되는 동남아시아권 영화를 담당하는 박성호 프로그래머 역시 이 권역을 “한 세대 뒤를 바라보는” 시네필이 특히 주목한다고 설명한다.
-아직 동남아시아 영화가 생소한 관객도 있다. 하지만 막상 접하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대중적인 작품이 많다.
=평균 제작비는 1~2억 원 정도로 한국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그에 비해 퀄리티가 높다. 태국 쪽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 필리핀 쪽은 유럽이나 남미권과 비슷한 톤 앤드 매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봤을 때 진입장벽도 낮은 편이다.
-태국 드라마 등의 인기로 국내에도 태국 배우들의 팬덤이 생겼다. 동남아시아의 인기 배우들을 캐스팅한 <6명의 등장인물> 그리고 주연 배우 마리오 마우러의 내한이 의미 있는 이유다.
=한국 인터넷에서도 ‘태국의 원빈’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더라. (웃음) <6명의 등장인물>에는 태국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배우들이 나온다.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세안 10개국 중 가장 빨리 중진국에 진입한 태국은 콘텐츠도 많이 만들고 주변 국가에 영향력도 많이 행사하는 문화 강국이다. 전 세계에서 BL 드라마를 가장 많이 만드는 국가 중 하나이며, 국제 시상식에서 수상한 광고도 많다.
-최근 동남아시아 영화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영화들이 솔직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보부가 영화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나 종교 비판을 담은 작품을 만들기 어려웠다. 10~20년 전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는데, <모범생 아논>이나 <자서전>은 21세기에 벌어진 일을 기반으로 한다. 덕분에 한국 관객이 더욱 공감하면서 동시대의 가치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 공동 제작 및 투자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결과, 특히 태국의 경우 유럽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작품들이 많다.
-아시아 국가들이 협업한 프로젝트들이 눈에 띈다. <아줌마>는 싱가포르 출신 감독이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영상위원회 등 다수 기관에서 지원받아 한-싱가포르가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한국 배우들도 출연한다. <룩앳미 터치미 키스미>는 아시아 3국의 감독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데이비 추 감독의 <리턴 투 서울>은 대부분 한국에서 촬영했다.
=나홍진 감독이 <랑종>의 제작을 맡자 월드 세일즈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동남아시아에는 단순히 K-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필름메이커들과 어떤 식으로든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영화인들이 많다. 얼마 전 작고한 <6명의 등장인물>의 M.L. 뿐드헤바놉 데와쿤 감독도 한국과 공동 작업을 하고 싶은 의사가 매우 컸던 분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낸 작품들이 올해 초청돼서 매우 뿌듯하다.
-필리핀의 거장 라브 디아즈 감독의 <부서지는 파도>가 아이콘 섹션에서 상영된다. 감독의 명성에 비해 긴 러닝타임의 장벽으로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텐데, 영화제 관객에게 그의 신작을 소개해달라.
=아쉽게도 개인 사정으로 인해 내한이 취소됐다. <부서지는 파도>는 오늘날의 필리핀을 담고 있다. 주요 매체에서는 아름답게 포장된 프로파간다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이 누적된 필리핀의 현실은 무척 어둡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라브 디아즈 감독의 첫 영화 <콘셉시온 구역의 범죄자> 이후 이번 작품이 제일 좋았다. 드라마적인 템포로 쭉 가기 때문에 3시간여의 러닝타임에 비해 보기 어렵지 않아 라브 디아즈 입문용으로 추천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롱테이크로 담아낸 긴 대화 신이 많은데, 주류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는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흥미로웠다.
-뉴 커런츠 부문에서 상영되는 <메멘토 모리: 어스> <다시 찾은 블루> <아줌마>는 어떤 작품인가.
=세 작품 모두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메멘토 모리: 어스>는 유럽 평론가들이 선호할 것 같은 스타일의 편집 리듬과 컬러 그레이딩을 보여주는 슬로우 무비다. <다시 찾은 블루>는 젊은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인간관계를 고찰한 성장 영화라 청년 세대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다. 한국과 싱가포르가 공동 제작한 <아줌마>는 한류에 빠진 싱가포르 아줌마의 로드 무비다.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오락 영화로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