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경영하는 에블린(양자경)은 손님의 불평을 받아주랴, 딸을 돌보랴,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랴 정신없이 바쁘다. 이 와중에 세무당국의 조사는 나노 단위로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남편 웨이먼드(조너선 케 콴)는 이혼을,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여자 친구 벡키와의 관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모든 것이 쌓일 대로 쌓여버린 어느 날, 평소와 달리 범상치 않은 목소리와 눈빛을 장착한 웨이먼드로부터 우리 모두가 멀티버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많은 ‘나’들로부터 힘을 빌려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거대한 비밀까지도.
현재의 나, 다른 차원의 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요 키워드는 단연 ‘멀티버스’(다중우주)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현재의 내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나'와 연결되어 그들의 능력과 장기를 빌리는 독특한 세계관이다. 유명 배우가 된 ‘나’, 철판 요리를 하는 ‘나’, 핫도그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나’, 전투력 만렙인 ‘나’…. 이 ‘나’들을 가로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또한 나다. 영화는 초반에 자(自)와 타(他)의 경계를 명확하게 분리한다.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 사실을 알려준 웨이먼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름 아닌 “(다시 정신이 돌아온) 나한테도 말하지 마. 나도 기억 못할 거야”다. 낯설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주인공을 덜렁 혼자 내버려둔 듯 보이지만, 이건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문제 해결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조언이 반복되거나, 어느 주변에 놓인 거울이 에블린의 얼굴을 계속해서 비추는 것 또한 은연중 ‘나’에게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에블린이 어떤 ‘나’를 활용할지 스스로 판단해낼 즈음부터 이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진다. 딸 조이가 악질적인 빌런, 조부 투파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에블린은 그의 행태와 이력, 태도 등을 알고도 여전히 자신의 딸 조이를 떠올렸다. 소문이나 평가에 의존하기보다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기준 삼아 생각하며 각 개체 사이의 연결고리를 둔 것이다. 영화 안팎으로 경계가 허물어진 구조는 에블린이 자신과 주변인을 관계화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고, 오히려 조부 투파키보다 강력해지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데 이른다. 에블린의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조부 투파키가 드나들 수 있는 우주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조이를 죽이라고 명하는 아버지(제임스 홍)의 태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사실 에블린의 ‘나’들도 초반엔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로 비치면서 말 그대로 힘만 빌려주는 정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들은 에블린이 살아가면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파생된 세계에 머물러 있고, 그들의 결정에서 비롯한 결과 또한 에블린이 책임지면서 이 우주의 스펙트럼이 에블린이라는 존재 안에 귀속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본질은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왔다는 조부 투파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시종일관 “이 세상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처음부터 이곳이 싫었다”는 비관적인 말만 늘어놓지만 이상하게도 에블린을 집요하게 찾아다닌다. 그를 미워한 나머지 살인을 저지르려는 목적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디에 있든
이 질문의 답은 화가 난 세무당국 공무원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를 진정시킨 웨이먼드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따뜻한 말씨와 눈빛으로 불만에 찬 세탁소 손님을 위로하거나 공무원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을 밝게 보는 건 순진한 게 아니야. 그런 전략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에블린을 기다리고, 찾아다니고, 함께 베이글 홀에 가려 했던 것은 누군가가 용기낸 다정한 전략이 너무나 필요했고 또 그것을 다름 아닌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꾸만 모른 척하는 엄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뾰족한 말로 상처만 남기는 엄마. 그 한치의 다정함을 용기내지 못했던 엄마 곁에서 조이는 모두와 단절되고 싶었지만 동시에 연결되고 싶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원하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다. 잘 살펴보면 영화 제목은 이 주요 문장의 목적어와 부사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주어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나와 너를 모두 더한 우리일 것이다. 알 수 없는 회의감과 공허한 마음이 자꾸만 삶을 압도하는 세상에서 적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닐 때 원하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 영화는 본래 간접적인 시공간의 이동을 체험하게 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침잠했던 마음을 깨고 오랫동안 잠가둔 기억을 꺼내 상처의 본질을 직면하며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은 여러 ‘나’를 통해 복수의 삶이 가진 편의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에블린과 웨이먼드 그리고 조이가 진실된 본래 모습으로 둥글게 서로를 안을 때, 우리의 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을, 결국 우리의 삶은 유일하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