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영화광 출신이지 않나. 그러니 나도 한 번 해보자고 용기를 냈다.” <기행>의 각본, 감독, 미술, 촬영, 조명, 음악 등의 크레딧엔 전부 이하람 감독의 이름만이 올라가 있다. 촬영 장비는 아이폰 SE2, 촬영 기간은 단 4일.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제작한 세트를 배경으로 이하람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을 완성했다. <기행>은 탈영병이 한 소년의 끼니를 훔쳐 먹고, 굶어 죽기 직전의 소년이 처녀 귀신과 함께 지옥으로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무성 영화와 연극 무대, 어드벤처 게임을 연상시면서도 동화적인 색감과 대비되는 섬뜩한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간다. 주목해야 할 신인 감독이 탄생했다.
- 첫 장편을 연출하기 전까지 17년간 요리사로 일했다고. <기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 영화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관심이 많아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고, 공모전에 내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직접 만들면 어떨까.’ 원하는 감독님이 연출을 맡아준다는 보장도 없고 내가 바라는 장면들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데, 그냥 내가 찍어보면 어떨까. 요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는 경우도 있으니 한 번 도전해보자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뒤에 나올 퇴직금과 모아둔 적금을 계산해보니 어떻게 해볼 순 있겠더라. <기행>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그랬다. 돈 많이 벌어서 꼭 영화 찍어보겠다고 하더니 결국 실현시켰다고. (웃음)
- <기행>의 크레딧을 보면 각본과 감독뿐만 아니라 미술, 촬영, 조명, 음악, 색보정까지 전부 본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보면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소품이나 세트 만드는 과정이 유튜브에 잘 나와 었고, 콘크리트 질감 내는 방법 같은 것을 참고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지옥도 디오라마를 직접 제작한 거다. 세트를 한창 만들 시기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만큼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다리가 부러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때 문득 든 생각이 ‘아, 세트 마저 만들어야 되는데’였다. 일정이 꼬일까봐 무서워서 그날 바로 병원에서 탈출했다. 다행히 뼈는 예쁘게 잘 붙었다. (웃음)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했지만 지금은 이유 있는 도피였다고 여긴다.
-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나.
= 2~3일 정도. 그 전부터 핸드폰에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의 여정 등을 계속 정리해두긴 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새로운 전래 동화를 하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살아있는 그림책처럼 연출하고 싶어 세트도 그렇고 후반 작업을 할 때도 동화적인 연출에 신경을 썼다. 시나리오를 쓸 땐 장을 따로 나누진 않았는데, 부가 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싶어 편집 과정에서 추가했다.
- <한국 요괴 도감>에 수록된 처녀귀신에 관한 설명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본래 귀신과 같은 무형의 존재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 어릴 때부터 <공포 특급>과 같은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다. 호러물도 정말 좋아한다. <한국 요괴 도감>에서 하나 더 가져온 게 있는데 가면에서 피어나는 ‘목면지’라는 버섯이다. 먹으면 마약을 한 것처럼 웃게 되는 버섯인데 맥거핀으로 쓰기 좋을 것 같아 차용했다.
- 그 외에 참고하거나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을까. 4장 ‘지옥의 종교판매상’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연상시킨다.
= 3~4년 전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뭐라도 만들어 보고 싶었고 그 욕구가 <기행>에 반영됐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와 가오나시가 함께 여정을 떠나지 않나. 그 파트를 좋아해서 언젠가 저런 형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로리>도 참고했다. 천을 걸치고 나오는 유령은 어릴 때부터 상상하던 유령을 그대로 구현한 모습이었고, 처녀귀신의 외형을 구상할 때 레퍼런스로 삼았다.
- 프롤로그와 1장의 경우 전체적으로 톤이 어둡고 콘트라스트가 약하다. 어떤 의도가 담긴 연출이었나.
= 전쟁시기가 배경이기 때문에 정말 지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화면비도 그렇게 정했고, 에필로그에서 비네팅 처리를 한 것도 완전히 좁은 시야로 훔쳐보는 듯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 반면 2장은 마치 수묵산수화처럼 연출했다. 이를 배경으로 소년과 처녀귀신의 여정이 횡스크롤 게임을 플레이하듯 펼쳐진다.
= 옛날 어드벤처 게임, 플래시 게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일부러 소스를 찍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원하는 그림이 잘 나오지 않아서 어도비 스톡에서 라이센스 받은 사진들을 구해 전부 합성했다. 독특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으면 했다.
- 1~3장까진 대사가 자막으로 처리되는데 4장에선 지옥의 통계상이 주인공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이런 형식의 차이를 둔 이유는 무엇이었나.
= 소년에겐 언어 장애가 있고 대화 상대가 처녀 귀신이다 보니 둘이 대화하는 모습이 상상이 잘 가지 않더라. 그래서 앞부분은 자막으로 처리했다. 통계상의 대사는 영화의 모든 걸 설명하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단테 <신곡>의 길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중요한 캐릭터기 때문에 대사 또한 고심해 썼다.
- 소년과 탈영병의 대비도 흥미롭다. 소년은 죽고 탈영병은 살았지만, 천국에 당도한 소년과 달리 탈영병의 상황은 더 암울해지기만 한다.
= <기행>은 소년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원히 지옥의 굴레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한 대로 탈영병은 죽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승이 더 지옥과 다름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프롤로그와 1장을 어둡게 연출한 것과도 연결된다.
-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감독으로 데뷔까지 하게 됐다. 영화 취향이 궁금하다.
=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박쥐>인데 이번에 <헤어질 결심> 보고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웃음)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다른 영화들도 많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데이빗 로워리, 요르고스 란티모스, 드니 빌뇌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들의 영화도 좋아한다.
-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경우, 일반적으로 학교나 아카데미에 입학해 커리큘럼을 따라 공부하고 단편부터 연출하는 수순을 밟는다. 습작 한 번 없이 바로 장편을 연출할 결심을 했다는 게 놀랍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 시나리오 쓰는 단계에 멈춰있는 분들이 많지 않나. 나는 내가 연출한 영화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보자고 뛰어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어떻게 했나 싶긴 하다. (웃음) 세트도 혼자 만들고, 15톤 차량을 두 대 빌려 그 세트를 혼자 옮기고, 설치도 혼자 했다. 이 모든 걸 스태프 한 명 없이 진행하면서 영화는 이렇게 찍으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다음엔 촬영 감독님, 스태프들을 제대로 모시려 한다. 그래야 배우들도 덜 고생할 것 같다.
- 앞으로 다뤄보고 싶은 주제가 있나.
= 평생 찾아온 존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신이다. 이후에도 내 나름대로 신에 관해 계속 탐구하게 될 것 같다. 별개로 지금 준비 중인 차기작은 신내림을 기다리는 소녀의 이야기다. 무당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내용은 아니고 가족 드라마를 다룬 스릴러다. 촬영은 좀 독특하게 해보려고 구상 중이다. 물론 촬영감독님과 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