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가고 있는 한 극장이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눈을 감은 채 각자의 머릿속에 자신만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지루함이 곧 끝난다는 사실에 설레어하며 영화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다. 그때, 그런 관객들과는 달리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연인과의 이별을 상상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건 영화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의 주인공 민영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영의 모습을 카메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감독 윤지혜이기도 하다. 장편 데뷔작으로 부산을 찾은 윤지혜 감독과 나눈 짧았지만 재미있는 대화를 전한다.
-어떻게 구상을 시작한 영화인지 궁금하다.
=실제 겪었던 일이 반영된 영화가 맞다. 좋아하는 사람과 영화를 볼 때 그 사람과 한창 좋은 시기였던 때에도 가끔 이 관계의 끝에 관해 상상하곤 했었다. 모든 영화에 끝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지금 이 관계에도 끝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던 것 같다.
-그중 길고 재미없던 영화도 있었나. (웃음)
=기억에 남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반은 졸아서 영화의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영화의 전당에서 빔 벤더스 감독의 <도시의 앨리스>(1973)를 연인과 함께 봤었다. 이번 영화를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의 영화 속 영화가 <도시의 앨리스>와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영화 속 영화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 영화를 본 다음 연인과 이별을 한 민영은 길에서 우연히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를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나리오엔 애초에 5분 정도로 짧게 들어갈 영화였으나, 촬영 직전에 스탭들과 협의도 하지 못하고 급히 장면을 추가한 기억이 있다. 인물들이 조금 더 배회하고 방황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로케이션 헌팅 때 찍어두었던 장소 이미지들을 추가했다. 장소들을 보여주는 흑백 영화라는 점에서 일전에 연출했던 단편 <목요일>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맞는 판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영화에 십 분 정도 삽입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미로 위의 산책>이다.
=주인공들이 결말이 정해진 영화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미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유유히 걸어다니는 모습이 ‘산책’ 같다고 느껴졌다.
-이별 후 연인의 집 주위를 산책하던 민영이 영화 촬영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현장의 슬레이터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 또한 나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슬레이터가 주인공인 단편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무산되면서 이번 영화에 스며들게 된 것 같다. 요즘은 현장에서 슬레이트를 잘 안 치는 추세인데 나는 자주 쳤었다. 치고 나서 곧바로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 곳으로 숨어야 했는데, 그 애매한 장소에 숨어 있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영화도 현실도 아닌 어떤 경계의 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민영이 만약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슬레이터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슬레이터가 보드 마커를 떨어뜨리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 또한 경험했던 일인가.
=실제로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하는 상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참고로 영화에 행인 통제에 실패해서 한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실제 벌어진 일이 맞다. (웃음)
-인간 윤지혜의 면면이 많은 부분 녹아들어가 있는 영화인 것 같다.
=특정 장면뿐만 아니라 연출적으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상을 볼 때, 거리를 두고 천천히 보려는 습관이 있는데 영화의 촬영 역시 그런 태도로 접근했다. 전체적으로 전경 샷이 많고, 인물을 작게 보이게 담았다. 거기에 나 자신도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점차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식으로 촬영을 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민영의 바스트 샷인 것도, 그러한 의도였다.
-그렇다면 민영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민영에게 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모험은 무슨 의미였을까.
=민영이 결국 어떤 기억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는 아니라고 본다. 그저 이번 모험을 통해 ‘머무는 것도 괜찮다’, 어떤 상태에 머무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민영이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 역시 그런 상태 자체를 온전히 봐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른 나이에 만든 첫 장편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예상을 했나.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내 영화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영화의 호흡 등이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 주변에서 피드백을 많이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 방향은 확고했고, 평소 고집이 센 편이 아닌데도 당시에는 신기하게 그런 의견들을 다 쳐내고 밀고 나갔었다. 만약 다른 의견에 휘둘려서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결과물이 나온다면 후회가 클 것 같았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내 것을 완성시키고 싶었고, 그래서 초청 결과에도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니까.
-영화 크레딧의 ‘감사한 분들’ 목록에 있던 ‘박완서 선생님’이 눈에 띄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고 박완서 작가님의 동명 단편 소설에서 빌려온 것이다. 내용은 전혀 다르다. 박완서 작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고, 평소 시나리오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작가님의 소설을 읽곤 했다. 그러다 이번 영화와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자연스럽게 같은 제목을 쓰게 되었다. 박완서 작가의 따님에게라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처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계속 연락을 시도하는 중이고,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가장 좋아하는 두 명의 감독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이번 영화에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다룬 것은 분명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실제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보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영화가 스필버그의 영화였기 때문에, 언젠가 그런 호흡의 영화도 도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