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지난 2년 간 중단됐던 플랫폼부산이 재개됐다. 플랫폼부산은 아시아 전역의 영화인, 창작자들이 모여 영화&콘텐츠 제작에 관한 경험을 나누고 실무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 그중 필름메이커스 토크는 아시아의 영화 거장이 직접 나서서 대담을 나누는 주요 프로그램이다. 올해 왕빙, 리티 판과 함께 필름메이커스 토크에 참여한 진가신 감독은 <첨밀밀>, <금지옥엽> 등으로 90년대 한국뿐 아니라 범아시아의 인기를 누렸던 연출자이자 2000년대 초반부터 김지운, 박찬욱, 허진호, 미이케 다카시 등 아시아의 유력 영화인들과 공동작업을 선행했던 제작자이다. 최근에도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제작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며 이제는 체인징픽처스를 통해 OTT시대의 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늘 배우고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이 내 세대의 미덕”이라는 그의 태도는 아시아의 신진 창작자들에게 힘을 불어넣고자 하는 부산국제영화제, 플랫폼부산의 취지를 적확히 대변한다.
- 필름메이커스 토크에 참여한 계기는?
= 국가, 세대와 무관하게 영화인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항상 필요하다. 아시아 전역의 영화인들이 협업할 기회가 2000년대 초반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극장 배급용 작품을 전시하고 거래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번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처럼 OTT 스트리밍 시대에 적합한 교류의 장이 더욱 필요해진 실정이다. OTT 시대에는 국제 배급에 대한 비용도 많이 줄었고, 특히 팬데믹이 지나면서 이러한 자리의 필요성이 다시금 커졌으며 앞으로도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필름메이커스 토크에서는 내가 80~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 시절에 어떻게 영화인으로서 살아왔고 성장했는지, 그리고 21세기에는 어떻게 아시아 전체를 범위로 제작 활동을 펼쳐왔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또 최근 체인징픽처스에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들도 적극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아시아의 신진 창작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한다.
- 영화, 콘텐츠의 다국적 제작에 있어서 강점은 무엇인가?
= 20년 전의 다국적 제작과는 또 다른 강점이 최근에 생기고 있다. 옛날에는 공동제작을 할지라도 여러 국가의 감독, 배우, 제작진들을 모아서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고 다소 상이한 제작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범아시아를 포괄하는 제작사가 공통된 매뉴얼을 가지고 해당 지역의 언어로 통일된 제작 과정을 거친다. 즉 이제는 한 제작사가 작업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허브를 구축하는 방식인 거다. 그렇게 아시아 전역의 창작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투자, 각본, 연출 등을 함께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나 창작의 가능성도 훨씬 커지게 되고, 작품이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소구할만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 이번에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 한국 시리즈물 2개를 기획 중이다. 콘텐츠 IP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는?
= 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웃음) 최근 유행하는 웹툰이나 웹소설에 기반한 IP 확장의 가장 큰 특징은 젊은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젊은 창작자들과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나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만 세상이 발전할 수 있다. 난 16살짜리 딸에게 늘 배우며 살고 있다. (웃음) 작년에 딸에게 크게 구박받은 적이 있다. 딸이 코난 그레이의 <Heather>란 노래를 듣고 있기에 가사를 보고 특별하게 동성애를 다루는 노래냐고 물었다. 그런데 딸이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된다. 그냥 다 사랑 노래인 거라고 바로 잡아주더라. 최근엔 사랑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젊은 세대에게 성공적으로 다가가려면 그들에게 배우고 맞춰가야 한단 거다.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 중 하나도 남자친구들 간의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다.
- 콘텐츠를 제작, 연출하면서 극장과 OTT 간의 이질감은 느끼지 않는 편인가?
=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예전부터 내 창작의 핵심은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스토리텔링의 힘에 있었다. 오히려 극장용 콘텐츠를 고집하다 보면 2시간에 맞게 작품을 다시 고쳐야 하고 원하던 이야기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배급 문제, 개봉 일자 등에서도 여러 비용이나 한계에 직면한다. 물론 OTT 스트리밍에도 현실적 제약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길이나 배급, 상영에 있어서 훨씬 큰 자유가 허락되는 건 사실이다. 소설로 비유하고 싶은데, 그냥 단순하게 영화는 2시간짜리 소설인 거고 시리즈는 6~7시간짜리 소설인 거다.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자기 작품이 어떤 포맷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보단 어떻게 하면 더 이야기의 핵심과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캐릭터를 잘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옳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한 유수의 영화제들도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당에 마냥 창작자 자신의 신념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맥락이다. 항상 젊어져야 한다.
- 제작자가 아닌 연출자로서는 배우 장쯔이와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 연출을 맡게 될 때만큼은 꼭 내 마음에 와닿는 작품에 착수하려 한다. 장쯔이와 작업할 <The Murderer>은 전형적인 내 스타일의 영화다. 1944~1945년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일본 패전 후 국민당이 중국을 수복하기까지 정권이 계속 바뀌는 탓에 한 사건으로 몇 번이나 재판을 받게 되는 여인의 수난사다. 역사의 격변에 영향 받는 한 여인의 삶이 그려지고, 그녀가 남편을 살해해야만 했던 이유를 통해 여성 해방과 인권에 대한 주제로까지 확장되는 식이다. 2016년에 이미 중국에서 촬영 전 작업을 완료했는데 작품의 러닝타임이 꽤 길어질 것 같아서 2개의 영화로 나눌지 아니면 5부작 시리즈로 완성해야 할지 작품의 포맷을 고민 중이다.
-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젊은 영화인, 창작자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었다. 한국, 아시아의 젊은 창작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많은 젊은 창작자들이 자신이 모든 분야에 재능이 충분하지 않다거나 꼭 내가 쓴 시나리오로 내가 연출해야겠단 마음을 가지곤 한다. 특히 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경우엔 더 그렇다. 그런데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감독이 디렉터인 이유는 말 그대로 디렉팅해야 하는 역할이란 뜻이다. 애초부터 영화란 협업의 과정이다. 그러니 감독은 배우, 각본가, 음악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 등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이의 아이디어와 재능을 온전하게 흡수하는 스펀지가 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취향과 미학적인 조건을 고수하기만 하면 오히려 작품이 길을 잃기 마련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영화는 팀 작업이다. 그렇게 마음먹는다면 누구나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가 될 수 있다.